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역사의 현장은 슬픔이면서도 희망이다.

산중산담 2019. 6. 26. 11:00


역사의 현장은 슬픔이면서도 희망이다.

역사의 현장은 슬픔이면서도 희망이다.

 

토요일 오후 한벽당에서 동고사를 거쳐 동고산성과 기린봉 일대를 걸었다. 전주 천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서린 그 길을 걸으며, 후백제의 견훤을 만났고,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과 11촌 간이었던 정인겸의 무덤을 보았다.

정인겸은 당시 정여립과 14촌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여립 사건 이후, 기린봉 자락에 있던 무덤이 파헤쳐지고 유골은 바람에 날려 흩어져 버렸다.

황진이와 사랑을 나눈 사람으로 알려졌고, 대제학을 지냈던 당대의 문장가인 소세양이 글을 쓴 비석은 두 동강이 났으며, 묘소를 지키던 석상은 머리와 귀가 잘린 채 땅속에 4백여 년을 묻혀 있었다. 그 당시 전주의 동래정씨들은 모조리 쫓겨나 충청도 증평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그 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1979년에야 전주로 찾아와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KBS 역사스페셜을 찍었던 당시 2005년에 만난 정길수 선생과 후손들 몇몇과 함께 찾아간 그 무덤은 수풀만 무성했다.

기축옥사 이후, 동래정씨들을 전주에서 다 내쫓김을 당했다. 충청도 증평으로 쫓겨 갔던 정인겸의 후손들은 380여년의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 1979년에야 무덤을 복원했다는 것이다. 그 때 제작진과 함께 무덤을 찾아가니 봉분을 새로 만들어 무덤을 판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묘 앞을 지키는 문인석 중 하나는 얼굴이 시멘트로 다시 만들어져 붙어 있었다. 목이 잘린 채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캐내어 복원했다는 것이다.

다른 문인석은 귀가 잘려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었다. 더욱 참혹했던 것은 익산 출신의 뛰어난 문장가인 소세양(蘇世讓)이 지은 비문이 조각난 채 묻혀 있다가 상석으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역사란 항상 승자의 기록이고, 패자는 말이 없는 것이다. 그 역사의 패자들을 복원하는 것은 후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일요일, 오늘은 새벽 세시에 일어나 다섯 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서 늦게야 이렇게 저렇게 모인 서른 한 명의 도반들과 함께 남한강의 폐사지를 찾아갔다.

거돈사, 법천사, 손곡 이달이 살았던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그리고, 여주의 고달사지등이었는데, 원주의 법천사에 기문을 남긴 사람이 조선의 문장가이자 이달의 제자였던 허균이었다.

원주의 남쪽 50리 되는 곳에 산이 있는데, 비봉산飛鳳山이라고 하며, 그 산 아래 절이 있어 법천사라고 하는데, 신라의 옛 사찰이다..... 금년 가을에 휴가를 얻어 와서 얼마 동안 있었는데, 마침 지관智觀이라는 승려가 묘암墓菴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그로 인하여 기축년에 일찍이 법천사에서 1년간 지낸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흥遊興이 솟아나 지관을 이끌고, 새벽밥을 먹고 일찍 길을 나섰다. 험준한 두멧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소위 명봉산鳴鳳山에 이르니, 산은 그다지 높지 않은 봉우리가 넷인데,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 새가 나는 듯 했다. 개천 둘이 동과 서에서 흘러나와 동구洞口에서 합쳐 하나를 이루었는데, 절은 바로 그 한가운데에 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리에 불타서 겨우 그 터만 남았으며, 무너진 주춧돌이 토끼나 사슴 따위가 다니는 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비석은 반 동강이 난 채 잡초 사이에 묻혀 있었다.

살펴보니 고려의 승려 지광智光의 탑비塔碑였다. 문장이 심오하고 필치는 굳세었으나 누가 짓고 누가 쓴 것인지를 알 수 없었으며, 실로 오래되고 기이한 것이었다. 나는 해가 저물도록 어루만지며 탁본을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중은 말하기를 이 절은 대단히 커서 당시에는 상주한 이가 수백이었지만, 제가 일찍이 살던 선당禪堂이란 곳은 지금 찾아보려 해도 가려 낼 수가 없습니다. 하여 서로 바라보며 탄식하였다.”

 

허균이 살았던 당시에 이미 폐허가 되었던 법천사지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발굴이 시작된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국보 59호인 지광국사 현묘탑은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지만 오랜 세월 서로 바라보며 의지를 했던 지광국사승탑은 일제 때에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되찾아온 뒤 경복궁에 놓여 져 지금도 본래의 자리에 부재중인 것이다.

절터는 또 어떤가? 그때도 현재도 법천사지는 발굴 뒤의 풍경이라 을씨년스런 풍경이 햇살 아래 그대로 남아 있다.

 

이틀에 걸쳐 답사를 했던 두 곳의 풍경이 지금 이 새벽에도 눈에 선하다. 그것은 부서지고, 무너지고, 쇠락해버린 그 장소와 사람들의 흔적들이 내 영혼 깊숙한 곳까지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고 오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아닌, 어쩌면 내 삶의 근원을 두고 아파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이 마음, 문득 떠오르는 깨어진 기와조각과 수풀 우거졌던 무덤, 역사는 언제쯤 그 추억들을 다시금 역사의 전면에 당당하고 의연하게 풀어낼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