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가버린 것들을 그리워하며,.. 등 등

산중산담 2019. 6. 26. 10:49


가버린 것들을 그리워하며,


 

세월은 덧없네, 이 해도 다 갔네.

그리운 사람 가고서 아니 오시네.

 

굳이 말려 만류해도 가려는 임 내 어이하랴.

그 님은 뉘와 함께 어디에서 사는지,

 

내 생애 이렇거니 어이 아니 웃으랴.

세상이야 다단多端해도 봄은 오고 또 가누나.

 

묻노라. 저 세상 일 얼마나 아득하여

한 평생에 몇 번이나 이렇게 울게 하는지?“

 

조선 중기의 문신 이행李荇

<세모에 죽은 벗 박중열을 생각하고>라는 시의 전문이다.

 

봄이 오고 가는데,

가는 봄을 생각하자 문득 떠오르는 시 한편이다.

가버린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리도 깊을까?

가는 사람을 붙들지 않고, 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去者不追 來者不拒)”

옛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연偶然처럼 왔다가 필연必然처럼 가는 삶을

뉘라서 막고, 뉘라서 붙잡을 수 있겠는가?

가만히 다가왔다가 가는 바람을 응시하듯,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듯,

그렇게 무심히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 또한 쉽지 않은 것이 삶이다.

 

어둠 속에서 불을 켜면 나를 응시하는 저 책들,

책들도 무심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내가 떠난 뒤에도 저 책들은 내가 그들을 빼내어 펼친 뒤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스승의 날에 참된 스승, 참된 제자를 생각한다.

스승의 날에 참된 스승, 참된 제자를 생각한다.

 

남의 착한 일을 보면 몸을 가다듬어 반드시 스스로 살펴 볼 것이요.

남의 나쁜 것을 보면 만망하게 여겨 반드시 나를 반성해 볼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착한 것이 자기에게 있거든

굳건히 지녀 스스로 기뻐할 것이요, 나쁜 것이 자신에게 있거든

궂은 것이 몸에 붙은 듯 놀라서 미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한다고 하며 찾아주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요,

내가 옳다고 하여 찾아오는 사람은 내 친구요,

나에게 달랑거리는 자는 내 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군자는 스승을 높이며, 벗을 친하고 적을 미워하나니,

착한 것을 좋아하여 싫증을 내지 않고, 옳은 충고를 받아들여

고쳐나가면 비록 진보하지 아니하려 한들 아니 될 리가 있겠는가,

소인은 이와 반대로 난잡한 짓을 하면서 남의 흉보는 것을 미워하며,

나쁜 짓을 하면서 남이 칭찬해주기를 바라며,

마음은 호랑이나 이리 같고 행실은 금수 같으면서

남이 적대하는 것을 원망하며, 아첨하는 자와 친하고

바른 말 하는 자를 멀리하며, 옳은 행실을 닦은 사람을 비웃고

충직한 사람을 적대시하니,

비록 멸망하지 아니하고자 한들 될 수가 있겠는가?

시에 이르기를,

 

어울렸다, 헐뜯었다 이 무슨 추태일고 ,

좋은 뜻엔 모두 등을 돌리고,

나쁨에는 다 따라가거니,“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스승의 역할, 친구의 역할, 사람의 역할을 표현한 글로

<순자>에 실린 글이다.

 

나는 혼자서 공부했기 때문에 내 놓을 수 있는 스승이 없다.

그래도 사숙했고,‘ 오랫동안 함께 이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배운 스승을 꼽으라면 김지하 선생님이 내 유일한 스승이다.

김지하 선생님을 만나서 동학에 대한 참다운 공부법을 배웠고,

그래서 스승이라고 여기며 산다.

 

스승과 ,제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일, 역사 속에나 있던 일이다.

선생님;’이라는 말은 누구나 인사체례로 다 쓰는 칭호가 되었고,

그러다가 보니 참다운 스승과 제자는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가 조금 아는 것을 스승이 모른다고 치면

그것으로 스승을 헐뜯고 끌어내리려 안달인 시대에,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가, 그냥 같은 시대를 사는 도반일 뿐이다.

 

모두가 다 잘 알고, 잘난 시대가 이 시대라고 할 때,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의 글은 깊은 울림을 준다.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라 하리오,

나는 비록 부인과 어린이의 말이라도 배울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

최시형 <대인접물>에 실린 글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스승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시대는 스승이 따로 있고, 제자도 따로 없다.

컴퓨터가 만 사람의 스승이 된 것이다.

 

문자를 잡지 말고 뜻을 바로 알아,

하나하나 자기에게 돌려 근본에 합쳐지도록 하면,

스승 없는 지혜가 자연히 앞에 나타나며,

찬연한 이치가 밝아 어둡지 않으리.”

고려의 큰 스님 지눌의 글이다.

 

경외할만한 벗은 엄한 스승보다 낫다.

떼 지어 노니는 것은 홀로 앉아 있음만 못하다

<형원소어>에 실린 글이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도 이 시대에 별로 없는 그것이 슬픔이다.

스승과 제자, 친구와 친구 사이가 이지러진 이 시대에

그래도 자왈子曰우리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친구가 이렇게 말했지,’ 라고 경외를 표하던

그런 제자, 그런 스승, 그런 친구가 많이 있기를 고대하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일까?




생生을 멈춘 나의 도반을 회상하며,

을 멈춘 나의 도반을 회상하며,

 

나하고 오랜 세월을 같이 한 나의 도반이 생을 마감했다.

나하고의 인연도 이것으로 끝난 것이고,

이별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이십여 년 간 내 방에서 나에게 지금이 몇 시라고,

어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라고, 어서 자라고, 시간을 알려주던 시계가

어제 멈추었다. 갈수록 조금씩 시간이 늦어지기 때문에

건전지가 수명을 다해 그런 줄 알고 건전지를 갈았더니,

그만 동작을 멈추고 만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90년대 중반, 모 방송국에 출연해서 선물로 받았던 시계가

오랜 세월 내 시간을 관리해주다가 수명이 다해 멈춘 것이다.

이 십 여년, 짧은 시간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나 우정도 십년을 넘기는 경우는 흔치 않고

몇 년은커녕 몇 달도 못가서 파탄이 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데,

가끔씩 건전지를 갈아주고, 눈길만 주었을 뿐인데도,

내 곁에서 나를 위해서 의무를 다하고 살다간 시계를 보내는

내 마음은 쓸쓸하다,

이미 생을 마감한 시계, 그 시계가 이처럼 내 마음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그런 나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

 

그 시계는 나름대로 자기의 의무를 다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시계와 다른 생명체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나는

내 생애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몽테뉴는 잘 살다가 가는 삶, 그 삶을 아름답다고 말 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란, 내 생각으로는 터무니없는 기억 없이,

보통 인간의 본보기로 질서 있게 처신하는 인생이다.“

 

상식적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잘 살았다는 말을 듣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하여 염원하는 것이 있다.

 

라토나의 아들이여,

내가 받은 재산을 굳건한 건강과 아울러 내게 주도록 간청하노라.

그리고 나의 지적 소질이 머무르도록 기도하노라.

내 노년기로 하여금 추악한 꼴이 되지 말고,

아직도 칠현금을 탈 수 있게 해다오.“

호라티우스의 염원이다.

 

호라티우스의 염원이 오늘날 노년을 앞둔 모든 사람의 염원이다.

기억이 쇠잔해지지 않고,

내 삶을 내가 조절할 수 있기를 갈망하고,

그래서 내 노년이 가족이나 타인들에게 추악하게 보이지 않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생을 마감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곁을 지키다가 동작을 멈춘 시계처럼,

그렇게 살다가 갔으면 좋으련만,

사도 바울도 아니고, 예수나 부처도 아닌,

내가 모르는 나의 주재자가 내 기원을 들어주기는 들어줄까?





자고 일어나는 것이 불규칙한 세월,

자고 일어나는 것이 불규칙한 세월,

 

시절이 하수상해서 그런지, 아니면 걱정이 많아지거나 나이 탓인지

자고 일어나는 것이 불규칙하다.

책을 보다가 눈이 아파서 일찍 자면,

열두시 조금 넘어서 깨고, 잠이 들지 않고,

조금 늦게 잠들면 두 세 시에 깨어나면 잠은 들지 않고

정신이 초롱초롱 맑을 뿐이다.

그런 땐 다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

요즘 내 저녁의 생활이다.

요즘만 특별히 그런 것은 아니고,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이 더욱 그렇다는 것, 그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출구를 찾던지,

그 습관에 젖어들어 즐기던지, 해야 할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시공을 뛰어넘어 옛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서실書室에서의 수행법에 이런 말이 있다.

마음은 한가로운데 손이 게으르다면 그냥 감상만 하고 글자들은 그대로 두어라.

손은 한가로운데 마음이 게으르다면 급하지 않은 일을 처리하는데, 해도 좋고 인해도 좋다.

마음과 손이 한가롭다면 글씨를 쓰거나 시를 짓는 두 가지 일을 다 하라.

마음과 손이 모두 게으르다면 앉아 있거나 잠을 잘 지니, 정신을 억지로 피곤하게 하지 마라.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시나 짧은 이야기들을 읽어서 생각을 바꾸도록 하되, 그 상태에 너무 오래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마음이 한가롭고 별일 없다면 긴 글이나 경전의 주석, 역사 책, 고인의 문집을 읽는 것이 좋은데, 이것은 비바람이 그쳤을 때나 추운 겨울밤에 보는 것이 좋다.

또 이런 말도 있다

할 일이 많아 바쁜데, 마음은 여유가 있다면 생각을 하고, 마음은 번잡스러운데 손은 일하기 싫어 한가롭다면 그냥 누워 버려라! 마음이 손이 한가로우면 시문이나 글씨를 써라. 마음과 손이 모두 번거로우면 어떻게 해야 그 일을 일찍 끝내고. 정신을 편하게 할지를 생각하라.”

 

<취고당검소>에 실린 글이다.

마음이 한가로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런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밤중에 깨어나서 잠이 안 온다고 안달도 하지 말고,

새벽에 일어나 청승맞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

그 또한 나의 소명이고, 운명이라고 생각하자.

 

적막 속에 늘 깨어 있다면 고요한 경치가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깨어 있는 가운데 항상 고요하면 깨어 있는 생각이 달아나지 않는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하자.

 

이래도 저래도 가는 세월, 그 세월에 슬프지만 순응하자.

그렇게 밤 새워 책을 읽어도

가끔씩 눈만 침침하고,

어디 내 놓고 아픈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 행운이고, 감사할 일이 아닌가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거닐면서 현자가 되자.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거닐면서 현자가 되자.

 

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것도 어쩌다가 아니라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땀이 저절로 솟는다.

왜 그럴까. 알 수 없다. 다만 삶이 너무 단조롭거나, 아니면 삶에

지쳤기 때문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지만,

그것도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방문을 열고 어딘가 내가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고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몇 십 년 동안 익숙한 서점으로 자연스레 발길을 옮겨서

책의 바다에 빠지거나 책의 표면을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아니면 자연 속으로 들어가 내가 자연이 되어

세상의 온갖 사물에 정신을 내려놓고, 경탄을 하거나 전율을 하는 것이다.

전율戰慄, ‘몸이 떨릴 장도로 감격스럽다.’ 라고

국어사전에 실려 있는 전율이란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율이란 인간이 지닌 가장 훌륭한 면이니라.

세상이 인간에게 그런 감정을 쉽게 주진 않을 지라도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서야 비상한 일을 깊이 느끼게 되느니라.“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그렇게 묘사했다. 그와 같이 자연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비밀들과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 아름다움의 곁을 아주 가깝게 스쳐지나가면서도 보지 못하고,나중에야 내가 그 곁을 지나왔던가, 하고, 후회와 자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이 아무에게나 보이겠는가?

한정된, 선택된 사람에게만 보이는 그,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은

일부일 뿐이기 때문에 괴테는 <파우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을까?

 

라고 하는 보물을 끌어오려고 하는 자는

현자賢者의 마술이라고 하는 최고의 기술이 필요하니까요‘“

 

마술, 가?맬? 생각해보면 세상에 마술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나와 당신이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

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 길을 마음만 먹으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수 있다는 사실,

길을 걷는 나그네를 주시하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사랑거리는 것도

나그네를 따라가는 구름이나 졸졸 흐르는 시냇물, 그 모든 것들이

기적이고, 마술이 아닐까?

 

오늘 길을 나서서 만나는 모든 사물들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순간순간 경탄하고

전율 한다면 나도 당신도

세상의 모든 것을 깨달아버린 현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