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자락에서 보낼 시간들을 미리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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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을 간다. 설악산雪嶽山, 그 설악산으로 간다.
가서 그 설악산 자락에 여장을 풀고, 설악산 기슭인 인제와 양구
그리고 설악산 자락에서 한 사나흘을 살다가 온다.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설악산이『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하지(夏至)에 이르러 녹는다 하여 설악이라 한다.’
그리고, 중보문헌비고』에는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설산(雪山) 또는 설봉산(雪峰山), 설화산(雪花山)이라고도 하며,
겨울뿐만 아니라 사계절 모두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신라 때에는 영산(靈山)이라 하여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고 ,
또 옛날에는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육당 최남선은 「설악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설악산을 예찬했다.
‘탄탄히 짜인 맛은 금강산이 더 낫다고 하겠지만
너그러이 펴인 맛은 설악산이 도리어 낫다.
금강산은 너무나 드러나서 마치 길가에서 술파는 색시같이
아무나 손을 잡게 된 한탄스러움이 있음에 견주어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골짜기 속에 있으되
고운 모습으로 물속의 고기를 놀라게 하는 듯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풍경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라면
금강산이 아니라 설악산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할 것이다.
설악산은 그 경치를 낱낱이 헤어 보면 그 빼어남이
결코 금강산의 아래에 둘 것이 아니지만
원체 이름이 높은 금강산에 눌려서 세상에 알려지기는
금강산에 견주면 몇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는 아는 이가 보면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일찍이 매월당 김시습이 설악산에 들어와 오래 살았고,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던 만해 한용운이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몸을 숨긴 곳이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이었다.
한용운은 1896년 오세암으로 들어와 백담사를 오가며 십여 년을 살다가,
백담사에 머리를 깎았는데 그때가 1905년이었다.
그 설악산의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고개가 있는데, 새이령이라는 고개다.
백두대간에 위치한 고개로 영서와 영동을 나누는 중요한 고갯길인 새이령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고성군 간성읍 토성면 사이에 있으며 대간령이라고도 부른다.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뜻에서 `사이령`으로 불리다가 어느 사이에 `새이령`이라는 정감 있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641미터로 미시령과 진부령 사이의 고개로 총 11, 3키로미터의 아름다운 옛길이다.
새이령은 미시령이나 진부령이 개통되기 전에 동서를 이어주던 가장 빠르고 쉬웠던 길로 알려져 있다. 실로 새이령 옛길을 걷다보면 소와 말의 마구간 역할을 했던 마장터가 있고, 지나가는 행인들이 잠시 쉬어 갔던 주막과 숙박시설의 하나였던 역원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아름다운 새이령을 이번 답사 여정을 걸을까 말까, 고민중이다.
행복한 고민이다. 설악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설악의 고개를 넘는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한 여름의 축제가 될 것 같은데,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으니,
지금 이렇게 설악산 자락의 아름다운 고개를 떠올리는 것만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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