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한양 남쪽의 큰 도회지였던 안성과 평택 지역을 거닐다.

산중산담 2019. 6. 26. 11:35



한양 남쪽의 큰 도회지였던 안성과 평택 지역을 거닐다.


 

2018년 가을의 초입에 서울에서 가까운 안성과 평택 일대를 거닙니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수원 동쪽은 양성과 안성이다. 안성은 경기와 호남 바닷가 사이에 위치하여 화물이 모여 쌓이고 공장(工匠)과 장사꾼이 모여들어서 한양 남쪽의 한 도회가 되었다라고 씌어 있는 안성을 두고 고려 때 사람인 강호문(康好文)은 다음과 같은 글 한 편을 남겼습니다.

 

용성 깊은 지역에 외로운 성 있는데, 고을 이름은 간의(諫議)의 명()자와 같다양성과 산이 많고 들판이 적다. 삼남지역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서울을 지키는 요충지이다.” 라고 실려 있는 죽산군이 1914년 군 면 통폐합 당시 안성에 통합되었습니다.

안성 지역의 문화유산도 많지만 특히 미륵불들이 많습니다. 태평원이나 분행역 같은 교통의 요지들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고구려 때 내혜홀(奈兮忽)이라고 불렀던 안성이 군으로 승격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였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민왕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 양주, 광주 일대의 사람들이 홍건적에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안성지역의 사람들은 항복하는 체하며 연회를 베푼 다음 취한 홍건적 장수 여섯 명을 베어 죽였다. 그 뒤로 홍건적이 남쪽으로 내려올 엄두를 못 냈고 그 공을 높이 산 공민왕이 군으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안성군의 땅을 두고 조선 시대의 문인 최부(崔溥)산은 동북쪽을 막아서 저절로 성이 되었고 지역은 서남으로 트였는데 기름진 들판이 질펀하다고 읊었다. 그의 말처럼 임꺽정의 스승인 병해대사가 머물렀던 칠장사가 있는 칠장산에 올라서면 가까이에 칠현산?덕성산이 펼쳐져 있고 먼발치에 남사당패의 근거지였던 청룡사를 품고 있는 서운산이 보인다. 그리고 비봉산?도덕산?청량산을 넘어서면 질펀하게 안성평야가 펼쳐진다.

 

안성의 국사봉은 안성리 삼죽면 기솔리에 위치해 있다. 국사 신앙의 터로서 유명한 이곳 국사봉 자락에는 미륵사가 있고, 그 미륵사에는 높이가 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쌍미륵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이 가솔리를 굽어보며 서 있다. 이러한 거구의 석불들은 고려 시대의 전형적인 지방 양식으로 안성 일대에 여러 개가 있는데, 이곳에서 국사봉 정상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국사암이 있고, 대웅전 뒤편에 궁예미륵이라 불리고 있는 아담한 미륵 세 분이 모셔져 있다. 미륵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미륵보다는 문인석(文人石)에 가까운 석인상을 닮은 이 미륵불은 어느 곳 하나 상처 입은 것 없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어떠한 연유로 궁예미륵이라 불리고 있는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이곳 죽산지방이 신라말기에 기훤(箕萱)이 봉기를 했던 곳이고, 그 후 궁예는 태봉국을 세워 이곳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미륵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궁예의 꿈은 깨어졌고, 그가 세웠는지 혹은 그 뒤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세웠는지 알 길이 없는 궁예미륵만 남아 바람 부는 산정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안성 태평원 미륵

안성시 이죽면 매산리 기시미마을 남쪽에는 영남대로 상의 중요한 역인 분행역이 있었다. 고려 때의 빼어난 문장가인 정지상鄭知常이 이곳 죽산의 분행역을 지나며 한편의 시를 남겼다.

 

저물녘에 영곡봉靈鵠峯 앞길을 지나서 아침에는 분행루分行樓 위에 이르러 읊조린다. 꽃은 벌의 수염을 접하여 붉은 것을 반쯤 토하고, 버들은 꾀꼬리 나래를 감추어 푸른 것이 처음으로 깊도다. 한 툇마루의 봄빛은 무궁한 홍이요, 천리의 사신은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로다. 머리를 중원으로 돌이키매 사람은 보지 못하는데, 흰 구름은 땅에 나직하고 나무는 찝찝하도다.”하였다.

분행역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영남대로상의 중요한 길목이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분행역分行驛은 현의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려 김황원金黃元이 대간이 되어서 여러 번 일을 말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성산星山에 있는 원으로 나가는데, 길이 이 역말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이재李載가 남방으로부터 돌아오자, 이에 시를 지어 주기를, “나뉘어 행하는 길 위에서인들 어찌 시가 없을손가. 머물러 사신에게 주어서 생각하는 것을 부치노라. 갈대 잎은 소소하니 가을 물 나라요, 강산은 아득하고 머니 석양 때로다. 옛 사람을 볼 수 없으니 이제 부질없이 탄식한다. 지난 일을 좇기가 어려우니 다만 스스로 슬퍼하노라. 참으로 그렇구나. 죄를 당하여 장사로 귀양 가는 손이, 관직은 낮고 나이는 늙어 귀밑털이 세었도다.”하였는데 나이는 들어 머리는 하얗고 몸은 마를 안 듣는데 귀양을 가는 마음이 얼마나 서러웠을까?

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도 이곳 분행역에서 가버린 세월, 다시 올 리 없는 그 세월을 회상하는 한 편의 글을 남겼다. “누른 진흙 벽 뒤에 옛날의 시를 남겼더니, 뭉개어서 자취가 없어서 기억할 수 없다. 수양버들은 아직도 일찍이 가던 길에 늘어져 있고, 강산은 오히려 옛날 놀던 때와 같구나. 젊은 미인은 어디 있는고. 부질없이 추억만 한다. 흰 머리로 두 번 오니 가만히 슬프기만 하누나. 부절符節을 가지고 다른 해에 비록 이른다 하더라도, 누에 오를만한 근력이 먼저 쇠할까 두렵다.”하였다. “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안성과 평택의 내밀한 곳을 아는 사?汰? 극히 적습니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고장 안성과 정도전의 가묘가 있는 평택지역으로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