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 대구시 논공읍에서 창녕군 남지읍까지

산중산담 2019. 6. 26. 11:41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여덟 번 째 대구시 논공읍에서 창녕군 남지읍까지-

 

낙동강 천 삼 백리 일곱 번째 여정이 2018914()일에서 16()일까지 대구시 논공읍에서 창녕군 남지읍에 이르는 강 길에서 23일간 실시됩니다.

 

어느 날 문득 강이 내게로 왔다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공자가논어옹아편에서 말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사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사느니라.”

물론 지혜롭고 어질게 살고 싶은 것은 나의 부질없는 욕심일 지도 모른다. 나는 그 강의 언저리에서 그 강의 진면목을 보고자 했지만 아직도 때가 아니라는 듯 강은 강대로 흐르고 나는 나대로 따라갈 따름이다. 언제쯤 나는 그 강과 한 몸이 되고 한 마음이 되어 흐르고 흘러 바다에 가 닿을 것인가.(...)

 

오랜 옛날부터 낙동강을 중심으로 터를 잡고 있던 마을들이 점차로 부족국가의 형태를 띠면서 여섯 가야를 이루었다. 김해지방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진주 또는 상주군 함창 지역의 고령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그리고 고령의 대가야가 그것들이었다. 대가야는 서기 42년인 신라 유리왕 18년에 이진아시왕이 세운 부족국가로 서기 500년쯤부터 그 세력을 떨쳐 금관가야가 사라지고 난 뒤로 침체해있던 가야 역사의 새로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라와 힘을 겨루기에는 끝내 힘이 모자라 16대 임금인 도설지왕 때인 562년에 마지막으로 신라에 정복당함으로써 가야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다.

천관우 선생은 일찍이 가야국이 문화수준이 높을 뿐만이 아니라 정치도 발전하여 삼국초기에 이미 왕관을 만들만큼 국가체제를 갖춰심국사기의 초기기록에는 신라와 맞서 난형난제의 세력을 이루었던 만큼 당시를 고구려, 신라, 백제와 북쪽의 부여를 포함하여 5국시대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초기 가야국의 중심이던 금관가야가 급격하게 쇠망한 것도 김해를 터전으로 삼았던 그 지배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인 듯하다고 추정하는데 가야는 바로 중국 대륙의 산업이나 전투기술을 포함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준 길목구실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가야의 땅이었던 고령은 신라 진흥왕 1018년 곧 현종 9년에는 영천현이 되어 지금의 성주인 경산부에 속했다. 그러다가 1395년인 조선왕조 태조 3년에 고양군영천현에서 한자씩 따 이름이 지어진 고령현이 되었고 1914년에 실시된 부, 군 폐합에 따라 고령군이 되었다. 지도에 표기된 바대로 소가야천, 대가야천을 보고 가야의 땅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는 고령의 초입엔 가야대학교와 대가야 왕릉 유물전시관이 있고 고령시외버스 터미널에는 “4만 군민의 식수원 대가야천 대가야의 명예를 걸고 지키자라는 프랭카드가 걸려있다(...).

 

강은 휘돌아가고 그 바로 아래에 개진면 부동으로 건너가는 물문(수문진)나루가 있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현풍할매곰탕은 1945년 달성군 유가면에서 박소선 할머니가 일성식당이란 간판을 걸고 가마솥에 끓여 뚝배기에 담아 팔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국 여러곳에 직영점을 둔 할매곰탕은 현재 박씨의 외아들 차준용씨가 대를 물려 이어가고 있다. 현풍은 본래 현풍현(玄風縣)이었다.

신라의 추량화현(推良火縣) 또는 삼량화현(三良火縣)이라 하였는데, 35대 경덕왕 때 현효(玄驍)로 고쳐서 화왕군(火王郡 : 창녕)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현풍(玄豊)으로 고치고, 8대 현종 9(1018)에 밀성(密城 : 밀양)에 편입되었다. 26대 고종 32(1895)에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창녕군(昌寧郡)에 편입되고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달성군에 편입되었다.(...)

 

느티골과 정수골을 사이에 둔 이 재는 그 생김생김이 다람쥐를 닮아 다람재로 불리는 데 고개를 넘어서자 눈앞에 나타난 산불 감시초소에는 그네 뛰는 이쁜 시악시가 그려져 있다. 다람재를 넘어 도동리에 이른다. 달성군 구지면 낙동강 변에 위치한 도동리에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다.

김굉필(金宏弼)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喧堂)이다.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이고,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지낸 승순의 딸이었다. 그의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증조부인 사곤(士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 개국공신 조반(趙?)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었는데 할아버지이래 살아오던 정흥동에서 김굉필은 태어났다. 어린 시절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었던 그는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나이들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김굉필은 경기도 성남(城南)과 미원(迷原) 등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주로 영남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소학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이때부터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하였다. 평생토록소학을 공부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하여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던 그는 나이 삽십이 넘은 뒤에야 다른 책을 접하였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모통이를 돌아가자 나타나는 낙동강은 푸른 강물과 하얀 모래사장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고 여정은 대암리에 이른다 낙동강 가에 대 바우가 있으므로 대바우 대방우 또는 대암이라 부른 대바우는 낙동강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처럼 평평하여, 그 위에 백여 사람이 앉을만 한데, 중종(中宗) 때 이상(二相) 이장곤(李長坤)이 이곳에서 놀았다고 하고 대바우에서 고령군 우곡면(牛谷面) 포동(蒲洞)으로 건너가는 낙동강의 나루터가 대바우 나루였다. 대암리 신당마을 입구에는 대암산맥이라는 이름의 가든이 있고 낮은 고개를 돌아가자 상승불패라고 쓰여진 비석 뒤편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의 묘소가 있다. 상승불패라는 비석은 적과 싸울 때마다 이겼던 곽재우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이 지역의 군부대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신댕이 북쪽에 위치한 곽재우의 묘에는 망우당 곽재우와 그 아버지 보재(寶齋) (), 그 할아버지 와성() 지번(之藩), 그 증조(曾祖) 현감 위() 사위 아들들의 묘가 있는데, 묘마다 비석이 서 있다.

내가 무덤 곁으로 올라가자 먼저 온 몇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어느 무덤이 곽재우 장군의 묘소인가 물어보자 묘가 작은 무덤 앞에 곽재우의 비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옆의 것이라는 설도 있고 어느 것이 곽재우의 묘인지 모른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며 갈 길을 재촉한다. 그 당시 전란이 소용돌이 치고 간 뒤 어느 누가 곽재우 장군의 무덤을 기억이나 했을까? 대바우 남쪽에 있는 마을인 짬들마리 마을은 앞에 둠벙이 있고 뒤에 돌산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고 대바우 동쪽에는 지형이 달처럼 생겼다 해서 이월 또는 월산동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

 

설마 사람들이 넘었던 그 고개를 못 넘을라고 비닐하우스 숲들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산길은 시작된다. 산길은 적적하다. 한구비 돌아가자 험한 바위가 많아서 듬말이라고 불리우는 마을의 빈집이 나타나고 조금 더 올라가자 칡넝쿨이 우거진 산비탈 너머로 내가 걸어온 낙동강이 꿈길처럼 깔린다.

벌초객들이 낫으로 베어논 길을 따라가다보니 옛길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나는 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강물이 흘러오고 그 강물 위로 또 하나의 강물이 접어드는 것을 그 강물이 대가천이었다.

대가천(大伽川)은 모듬내, 회천, 가천으로 불리우는데 김천시 증산면 남동쪽 두리봉(가야산 서쪽 봉우리)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흘러 유성리에 이른다. 그곳에서 서쪽에서 오는 평촌내(坪村一)를 합해가지고 동쪽으로 꺾이어 성주군 금수면 냉천동, 무학동을 지나 용두동에 접어든다. 남동쪽으로 꺾인 대가천은 가천면, 중산동, 창전동을 지나 수륜면 북동쪽 중심부를 ?고 고령군 운수면 서쪽 일부를 지난 고령읍 본관동 동쪽에서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소가천을 합하여 금천(錦川)이 된다. 고령읍을 지나 고아동에 이르러 서쪽에서 흘러오는 안림천을 합하여 모듬내 또는 회천이 되어 고령읍과 개진면의 경계가 되며 반곡면 북서부를 뚫고 월오동에 이르러 반곡면과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의 경계를 이루고 율지리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주로 가야산(伽倻山)의 동, , , 3면을 싸고도는 강이 대가천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령읍에서 소가천을 따라 올라간 매화산과 가야산 자락에 이름난 절집들이 있다.(...)

 

나는 강 건너 합천군 덕곡면 밤머리 일대와 현기리 일대를 내려다본다. 조선 중엽 이후 낙동강 중류의 최대 나루터였던 율지나루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 농산물의 집산지였다. 전국의 보부상과 장꾼들이 몰려들어 큰 장터를 형성했던 율지나루터에서 경상도 지역에서 성행하는 가면무극인 오광대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말뚝이라는 마부가 살고있는 이곳 초계는 양반의 세력이 드세어 상놈, 하인들은 그들의 무시와 천대 때문에 하루 하루의 삶이 힘들기 그지없었다. 힘든 세월을 보내던 말뚝이는 어느날 꾀를 내어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은 뒤 탈을 쓰고 양반들의 온갖 비리와 위선을 폭로했다. 탈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는 모르지만 양반들로부터 당한 온갖 수모를 후련하게 씻어낸 그 행사 뒤에 사람들과 상인들은 오광대 놀이를 발전시켰고 1900년대에는 경상남도 전역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오광대 놀이는 길놀이편과 탈 놀음판으로 나뉘어진다.

 

마을사람들이 한 이십년 전만 해도 남지장을 보러 다녔다는 산길은 이미 사라지고 없단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서 그 먼 산으로 난 길을 돌아갔는데, 나중에 보니 바로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옛길이 남아 있었다. 아지리 사람들이 남지장 보러 가던 길, 그 길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니,

그렇다. 마을 사람들이 자동차에 길들여져서 그처럼 많이 다녔던 이 길을 잊어 버리고 있는 그 세월에도 길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길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한 사람 지나갈 정도의 길, 예전에는 이 길을 나귀타고 가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소를 팔러 가기도 하고 송아지를 사서 가슴 졸이며 돌아오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벼랑길을 개나 다닐 정도의 길이라 개벼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돌아가다가 멈추어 서서 내가 걸어온 길과 그 길 너머로 보이는 낙동강을 바라다 본다. 가을 하늘에 유유히 떠가는 뭉게구름, 그 아래로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넓은 강물이 흐른다. 얼마쯤 걸었을까?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그 사이로 희미한 길이 이어져 있다. 미로 같은 대숲 길을 걸어가자 문득 보이는 집 한 채, 빈 집이다. 마른 댓잎이 수북한 문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규모 있는 한옥이 내 눈을 가로막는다. 금세 라도 누구여?” 하고 문을 열고 나올듯한 집,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습관처럼 마루에 잠시 앉았다가 다시 울울창창한 숲길을 헤쳐 나가자, 정수장이 보이고, 멀리 보이는 남강, 아름답고 호젓한 남지장 가는 길이 이렇게 마무리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