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아홉 번째 창녕군 유어면에서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창녕군 유어면에서 밀양시 수산나루까지
2018년 정기기행 낙동강 기행이 10월 26(금)일에서 28(일요일)일까지 2박 3일간 실시됩니다.
창녕군 유어면네서 밀양시 수산면 수산나루까지 걸어갈 이번 기행에 참여바랍니다.
“가마실, 가메실 또는 부곡이라 불리는 이곳 말들마을에는 마수원이 있었다. 이곳 마수원장에서 1일 6일 장이 선다는데 나는 저물어 가는 마수원의 강가에 망연히 서서 서산으로 지는 해와 강 건너 의령군 낙서면 일대의 올망졸망한 마들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유어 파출소가 보이는 제방 둑에서 창녕의 진산, 화왕산은 한 폭의 그림처럼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고 나는 이제 피곤한 몸을 누일 영산으로 갈 것이다. 기다리는 버스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조금 늦어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싶고 어둠 내린 창녕에 닿았다.
영산으로 가는 버스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떠나버리고 어쩔 수 없지 저녁을 먹고 영산에 가는 버스에 오른다. 내 성씨의 고향인 영산에서 나는 생애 최초로 하룻밤을 묵을 것이다.(...)
낙동강 변의 서쪽이되므로 낙서면이라 이름지은 내재리는 고개 밑이 되므로 내제라 이름지었고 내제 동쪽에 있는 골짜기는 감실 골짝이고 내게 동북쪽에서 유어면 팔각정으로 가는 나루가 백나리가 나루이다. 강 건너 진항리를 바라보며 제방 둑을 걸어가자 여의리 감마마을이다. 앞에 연꽃이 피는 늪이 있었기 때문에 여늪 또는 여의동이라 이름지은 여의리 지나 정곡리다. 좋은 우물이 있었다는 정곡리에서 강 건너 이목나루로 가는 나루가 오목나루터였다. 두곡 동쪽에 있는 비룡상천이라는 산에는 옛날 경상감사를 지냈다는 사람의 묘가 있고 율산리를 지나며 길은 끊어지고 다시 택시에 실려 창녕군 남지읍 월평리에 이른다.
박진나루엔 빈 배만 매어있다
들부리라고 불리는 월평에서 바라본 강 건너에 모래사장은 은빛으로 빛나고 낙서면 율산리 정곡으로 가는 나룻터인 덜붓나루에는 고깃배 한척만 매어있다.
월하리에서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 박진으로 가는 나루터에는 배 한 척 매어있고 길손들이 쉬어갔을 집은 비어있다. 나루마다 뱃사공은 없고 고깃배 한 척만 매어있는 강을 보며 시 한편을 떠올린다.(...)
마을 큰담실 마을에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고 새로 길을 만드느라 포크레인이 광음소리를 내는 길을 따라 창아지 마을에 이른다. 남쪽 골짜기가 되므로 앞실 또는 납곡마라고 부르는 아지리(阿支里)의 창아지와 양아지 마을에도 가을이 깊어간다. 양아지 마을 입구에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로 건너가는 창마리 나루가 있었다는데,
그러나 나룻배는 보이지 않고 낚시질을 하는 사람에게 가는 길이 있느냐고 묻자 길은 없단다. 양아지 마을로 해서 가는 고갯길이 있으니 그 길을 따라가란다.
마을사람들이 한 이십년 전만 해도 남지장을 보러 다녔다는 산길은 사라지고 어쩔 수 없다. 양아지 마을 뒷길을 따라갈 수밖에 양아지 마을에 도착하여 마을 가운데에서 깨를 터는 할머니에게 창날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자 차로 가면 한 20분 걸릴 것이란다. 걸어가면 두어 시간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이제 방법은 없다. 구부러진 산길을 휘돌아가는 수밖에 가다보면 창날 마을에 닿지 않을까?(...)
하천부지는 예전에 와서 보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비닐하우스의 물결이다. 옥산마을을 지나자 드디어 남지 시내가 보이고 하우스 밭에서 제방 둑으로 자전거를 힘겹게 끌고오는 할머니가 보인다. 바구니에는 오이가 뒤에는 호박 한 덩어리가 묶여져 있다. 그런데 바라보기도 힘겹게 올라온 할머니는 올라서자마자 휘하고 스쳐지나간다. 그래 시골 할머니들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걸어서 걸어서 천삼백리 길을 걸어가다니 이 얼마나 희극적인가. 저 멀리 희망처럼 남지대교가 보인다. 저곳에서 잠시 쉬어가자.
남지읍(南旨邑)은 창령군 2읍, 12면의 하나로서 본래 창령군의 지역으로서 가장 남쪽 골짜기에 있으므로 남곡면이라 하였고 1912년에 남지읍으로 승격되었다.
남지교 아래에 함안읍 칠서면 이룡리로 건너가는 웃개나루 터를 지나 신남지교와 창남 낙동강교를 벗어나며 남지는 저만치 멀어지고 남송교를 지나자 도천면이다.
도천면(都泉面)은 예전에 도천향(都泉鄕이 있었으므로 도천면이라 하였는데 내가 지나고 있는 송진리(松津里)는 본래 영산군 도천면의 지역으로서 쇠나리가 있으므로, 쇠나리, 소나리, 또는 송진이라 하였다.
송진나루는 조선시대에 주로 세곡을 집결시켜 낙동강 하류에 있는 삼랑창으로 실어 날랐고 일제시대에는 양곡을 부산항으로 실어 나르던 큰 나루였다. 이곳 송진리에서 낙동강은 계성천을 받아들인다. 일명 큰내라고 부르는 계성천은 창녕읍 옥천리 북쪽 관룡산 밑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나는 장터에서 아이스크림 한 개를 사먹고 걸어가며 여행에 대해서 생각한다.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는 여행을 “방랑과 변화를 사랑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이다”라고 얘기했고 안데르센은 “내게서 여행은 정신의 젊음을 되돌려주는 샘물이다”고 하였다. 또한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을 하지 않은 사람은 책을 한 페이지 밖에 읽지 않은 것이 된다”라고 했다. 그런 여행을 지금이야 아주 마음 가볍게 여관비에다 식비, 그리고 차비까지 최소한의 여비는 가지고 출발하지만 옛날이야 어쨌겠는가? 오늘 세끼를 어떻게 때우고 어디서 잘 것인가 걸으면서도 걱정했으리라. 거기에다 개나리 봇짐은 얼마나 무거웠겠으며 여분으로 짚신은 몇 켤레 쯤 짊어지고 다녔겠는가.(...)
제 돌아가면서 바라본 그 섬이 본포대교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아침 강변엔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강변에 세워진 낙동강 표지판 위로 본포대교는 푸르게 걸려있으며 멀리 내가 걸어가야할 강 아래 산들에는 구름이 흡사 중국의 산수화처럼 걸려있다. 본포(本浦)리는 창원시 동면 지역으로 낙동강가가 되므로 본개 또는 본포라 불렀다. 강가에 대산변전소가 보이고 본포에서 창령군 부곡면 학포리로 건너가는 나루터에 나룻배는 보이지 않는다. 구적마을을 지나 샘의 물이 맑고 깨끗하다는 옥정마을에 이른다. 노초마을 앞에는 용이 살았다는 용연이 있고 용연 앞 남서쪽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많았다해서 가씨나무등대라고 부른다. 제방뚝이 있지만 쉽지가 않다. 그래서 길을 물으면 강가에 무슨 길이 있겠느냐고 그냥 포장도로로 따라가라고 충고하는데 포장도로로 가는 길이 얼마나 피곤한 지 길 없는 길이 힘들기는 하지만 얼마나 가슴 벅찬 희열을 안겨주는 지 아는 내가 어찌 한눈을 팔았는가. 제방뚝 아래 과수원에서 이슬머금은 단감 하나를 따먹는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저 강건너 밀양군 초동면 검남리 곡강 마을이 그림처럼 보인다. 곡강에서 수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여러 모퉁이를 돌아 넘어간다고 하여 돌곡이라 부르고 돌아가면 하남읍 수산리에 이를 것이다.
조선시대 태산(太山)역이 있었으므로 태안, 또는 대산일동이라 부른 일동리를 지나자 대밭골이고 강 건너 하납읍 수산리는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 산천 편에 밀양의 속현으로 나오는 수산에 대해 “나루는 현청 가까이 있으며, 임강원이 위치하고 있다.” 고 실려 있으며, <해동지도> 밀양부 지도에는 “낙동강을 건너는 뱃길의 거리가 150보요, 창원까지의 경계가 40리이다.‘라고 실려 있다. 수산 나루는 오우진과 함께 밀양 김해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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