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룡산 선국사의 은적암에서
교룡산 선국사의 은적암에서
풍경은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무도 집도 그리고 켜켜이 역사의 이끼가 덮인 성벽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내가 지나는 길은 말해 무엇하랴.
교룡산성의 무지개문을 지나 선국사 가는 길,
돌계단 위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들,
1862년에 수운 최제우 선생이 신고 걸어가던 짚신에도
이 나뭇잎 부수러지던 소리 들렸을까?
1999년 가을, 김지하 선생님과의 추억이 서려 있던 보제루는
해체되어 새롭게 단장 중이었고,
수운 선생이 숨어 지냈던 은적암 가는 길에는 더 많은 나뭇잎들이
길을 덮고, 바위를 덮고, 대나무 잎만 바람결에 사각거렸다.
흐르는 세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그 흐름을 자의든 타의든 받아들이며
그래서 하나라도 더 보고자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이것도 사실 지나고 나면 부질없는 것이리라.
하면서도 이런 저런 쓸데없는 욕심들이 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데,
문득 떠오르는 글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소절이다.
“새로운 풍경을 찾는 대신 다른 눈을 가진다면,
다른 사람의 눈으로 우주를 바라본다면,
100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100가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여행이자 유일한 활력의 원천이 될 것이다.
때로는 엘스티르의 눈으로, 때로는 뱅테이유의 눈으로,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마음대로 이 별에서 저 별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100명의 눈으로
백 가지를 본다.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 손오공도, 그렇다고 홍길동도 아닌데,
문득 부질없는 생각에 내가 나를 책망하는 시간,
남원에서의 하루를 보내며 나는 지나간 시절, 지금은 가고
내 곁에 없는 그 사람들을 회상하는 나,
낙엽을 밟고 내려오다가 행여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내려오는 내 마음에
아련한 슬픔이 안개처럼 휘몰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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