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기해년에 떠오르는 해를 삼천포 대교에서 보고, 남해를 걷는다

산중산담 2019. 6. 26. 14:55



기해년에 떠오르는 해를 삼천포 대교에서 보고, 남해를 걷는다.

기해년에 떠오르는 해를 삼천포 대교에서 보고, 남해를 걷는다.

 

기해년 해맞이를 삼천포에서 남해를 잇는 섬찬포 대교에서 보고, 남해 바래길과 상주 해수욕장,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하직한 이락포와 충렬사를 답사합니다.

 

푸른 바다와 수많은 돌들이 섞이고 섞여 조화를 이루는 금산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사천시에 소속된 삼천포에 이른다. 3번 국도가 시작되는 삼천포는 사람들에게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로 더 알려져 있지만, 한번 가본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빠져 다시 가고 또 가는 곳이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개통된 뒤 싱싱한 회를 맛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 이곳 삼천포는 남해를 잇는 다리의 개통으로 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남해 편)

 

하동 동쪽에 자리 잡은 남해는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 때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정이오鄭以吾의 기문에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珍島. 거제巨濟와 함께 솔밭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중략)

이 고을은 하늘 남쪽에 있는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海産의 풍족함과 토산土産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필수必須되는 것이야. 그리고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또한 기대할 수 있다.“ 고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도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모든 물산이 풍부해서, 왜구의 침략만만 없다면 사람들이 살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해로 건너가는 노량바다에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이 벌어진 것은 1598년이었다. 1119일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 나아가 손수 북채를 쥐고 북을 두드려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날 그가 이끌었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함대 150여 척은 왜선 500여 척을 불사르거나 바다 밑에 잠기게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왜구의 유탄에 맞아 쓰러져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이순신의 나이 쉰 넷이었다.

싸움이 끝난 뒤 이순신의 시신은 노량 앞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음포에 며칠 동안 모셔졌다가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갈 때까지 석 달가량 노량나루(지금의 충렬사)에 가매장되었다. 그때부터 관음포는 이충무공의 목숨이 이곳에서 떨어졌다하여 이락포(李落浦)라고 불렀고 그 뒷산도 이락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이 묻혔던 자리에 빈 봉분을 짓고 충렬사(忠烈祠)를 지었으며, 1973년 사적 233호로 지정하였다.

삼천포 대교에서 장엄한 일출을 보고 답사할 남해는 예로부터 그 아름다움이 마치 보석 같은 섬입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남해 바래 길그 길에는 다랭이 논 사이로 포구와 포구가 이어지고, 수많은 문화유산과 이야기들이 산재한 곳입니다. 그 길을 걸으며 남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으신 분의 참여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