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천 삼백리 길을 한 발 한 발 걷는다. 첫번째 태백의 검용소에서 삼척시 하장면 갈전리까지 2019년,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정기기행인 <천 삼 백리 한강을 따라 걷는다.> 여정이 2019년 2월 28(목) 목요일부터 3월 1일까지 실시됩니다. 봄이 오는 길목인 3월 초에 시작하여 12월까지 이어질 한강을 따라 걷는 여정에는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와 서울 시민들의 식수원으로 공업용수와 농업용수로 우리민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한강을 따라 걷는 대 장정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우리나라 강 중 가장 발원지가 성스러운 검용소, 수천 년 동안 켜켜이 쌓이고 쌓인 이끼와, 용이 빠져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한강의 검용소이다. “누구의 기원이고 누구의 정성인지도 모를 돌탑이 제단처럼 차려진 바위 위에 수북이 쌓여 있다. 조금 어둡다 했더니 금세 햇살이 비추인다. 김형곤 씨는 종이배를 접어 검용소에다 띄운다. 저 종이배가 푸른 이끼 푸른 물살을 헤치고 무사히 한강의 하구까지 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종이배는 우리들의 염원에 아랑곳없이 굽이쳐 흐르다 말고 난파한다. 그렇다, 이곳 검용소에서 하구까지 그침이 없이 갈 수 있는 것은 한강을 흐르는 물과 걸어가는 우리들 그리고 세월이라고 이름 지은 시간뿐일 것이다. "이곳 검용소는 한강 514.4km의 발원지로 하루 2천여 톤 가량의 수원이 석회암반을 뚫고 나온다. 깊이 1.5m, 넓이 1.2m의 암반 2, 30m를 지나 이루어낸다. 수온은 사계절 내내 9℃이며 암반 주변 풀 이끼는 신비함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강줄기를 거슬러 이 산으로 올라오며 몸부림친 흔적이 지금의 폭포이며, 부근에서 풀을 먹기 위해 온 소를 그 용이 잡아먹기도 해 마을사람들이 내려가버렸다고 한다"라고 적힌 안내판 옆에는 검용정이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 「태백의 광명정기에 솟아 민족의 젖줄 한강을 발원하다」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제당궁샘 1.9km, 두문동재 3.8km, 암수령재 7.7km라고 씌어져 있는 나무팻말들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물은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른다. 고목나무샘에서부터 발원한 한강의 물줄기는 이곳 검용소를 거쳐 하장천을 지나 골지천으로 들어가고 아우라지에서 송천을 합하게 된다. 영월에서 동강 서강을 받아들인 남한강은 남류하면서 평창강·주천강을 합하고 단양을 지나면서 북서로 흘러 달천·섬강·청미천·흑천을 합친 뒤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을 합류한 한강은 계속 북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왕숙천·한천·안양천 등의 작은 지류를 합류하여 김포평야를 지난 뒤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한 후 서해로 들어간다.(...) “푸른 이끼를 헤집고 물은 흐르고 한강의 발원지 아래 첫 마을인 안창죽에 도착한다. 두 채의 집이 서 있는데 다 비어 있으니 뭐라고 물어볼 수도 없다. 두 개의 통나무를 걸치고 작은 나무로 못을 밖아 만든 나무다리를 건너 다가선 집은 문짝마저 다 떨어져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빨간 의자 두 개가 놓여져 있고 금세 고등어를 구워도 될 법한 자세로 석쇠가 나무 찬장에 얹혀져 있다. 안창죽마을에서 성황당을 만난다. 전주 이씨 선조대왕의 14대 자손이라는 이갑용(67세) 씨의 말에 의하면 저 성황당에서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일 년에 두 차례 정월과 단오에 마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때는 70호쯤이 되었는디 화전민들이 다 떠나버리고 지금은 열댓 집 남았는가, 젊은 사람들 다 떠나고 나 많은 사람들만 남았응개." 이갑용 씨의 말처럼 저 가파른 산들을 일구어 씨 뿌리고 살았던 화전민들은 지금쯤 어느 곳에서 살며 이곳 시절을 생각할까.(...) “임계 39km, 하장 11km. 강물은 여울져 소리를 내며 흐르고 강가에 있는 밭들은 온통 자갈투성이다. 내 유년시절에 할머니가 밭을 매다가 "아가 저 돌멩이 주어다 저 밭둑에 놓아라" 하고 성화를 대곤 하셨는데 저 많은 자갈들을 골라내지도 않고 농사를 짓는 강원도 사람들의 심성의 무던함 또는 애로사항을 알 듯도 하다. 골지천에는 복합비료 포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더러는 떠내려간다. 비료를 뿌린 다음에 차곡차곡 포개놓고 그것을 농협에서나 면사무소에서 수거해 가기만 해도 될 텐데 왜 저렇게 포대를 떠내려가게 놔둘까? 옛날 무사가 유숙하였다는 무사동마을 앞에는 옹기점이 있었다는 점촌마을이 있고 점촌마을에서 다시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외딴 집이 한 채 있는데 시멘트 다리를 놓아줄 리는 만무하고 목마른 사람이 시암 판다고 저렇게 나무다리를 놓은 것이리라. 나는 강을 따라 걸으며 이곳이 정말 강원도가 맞는구나 생각한다. 시상에 한강의 발원지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논배미 한 뙈기 못 만났으니 말이다.(,,,) “광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새로 생긴 하장면 소재지의 버스 간이정류장에는 "누구야 사랑해", "누구는 누구를 좋아해" 등의 낙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나무의자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신다. 어디 사시느냐고 묻자 넉골 사는데 태백을 다녀오는 길이시란다. "할머니 고향이 여기에요?" 하고 내가 물으니, "우리 친정은 저그 삼척 미로면이야." "그래요, 그곳에 천은사라는 절이 있는데 언제 시집오셨어요" 하고 말을 받자 "열아홉 살에 시집왔는데 삼 년 살다 신랑은 국방경비대로 끌려가 버리고 그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소식도 몰라." 아들이 있었느냐고 내가 묻자 "아들 하나 났어. 내가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 나이가 서른일곱이었는데 일곱을 낳았었어. 시아버지는 나이를 많이 먹었는디 내가 온 뒤에 넷을 더 낳아 내가 똥오줌 갈아내며 다 키웠지. 난 신랑 얼굴도 몰라"라고 대답한다. 그랬을 것이다. 젊은 시어머니 밑에서 논은 구경도 못하고 강냉이와 감자, 조와 수수만 심는 농사일은 오죽이나 많았겠는가. 나는 안타까워서 "할머니 아드님은 잘 하십니까?" 하고 묻자 "우리 아들이 나한테 참 잘해. 며느리도 손자들도 어찌나 잘 하는지." 그 말을 듣고 내가 "마음이 놓이네요. 아들내미 하나 있으면서 속이나 썩였으면 어떻게 했겠어요"라고 혼잣말처럼 말하자 "속 썩였으면 도망갔지 내가 있었겠어. 요즘 텔레비 보면 팔십이 넘어서도 이혼하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아. 사람들이 날더러 쑥맥이라고 해." 나는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해 줄 수 없고 보상할 길 없는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눈빛이 너무 선하고 고운 우리 어머님보다 한 살 위이신 김석녀 할머님(76세)을 바라보며 별안간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소나무숲 아래로 난 옛길은 마치 고향집을 찾아가는 느낌을 준다. 양지촌마을에 이르러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는 노루목마을 쪽을 바라보며 발길을 옮기는데 먼발치의 무너진 다리 위로 어미염소가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서둘러 뛰어가 사진을 찍었고 그 염소들은 느닷없이 사람들이 나타나니까 놀란 채 강 건너 국도 쪽으로 달려갔다. 걱정이 된 두 부부가 뒤따라오는 것을 본 김현준 기자가 "아줌마 좋은데 사시네요" 하고 말을 건네자 뒤를 돌아보더니 "그렇게 좋으면 와서 살아 보세요"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댄다. 당황한 김현준기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 “우리가 계속 걸어가면서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설레는 것처럼, 아침은 보일 듯 말 듯한 안개와 함께 찾아왔다. 아침 새소리는 강물 소리에 뒤섞여 청아하고 강물에서 노닐고 있던 물오리떼들은 날아오른다. “강의 잔물결 소리를 듣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완전히 절망하지 않는다.”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말했다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아름답고 청아한 강물소리를 듣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하며 바라본 강 건너로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검용소에서부터 이곳에 오는 동안 제일 큰 들판이다. 삼척시 하장면 토산리마을을 지난다. 푸른 보리밭 가운데에 서 있는 빈 집이 애처로운데 갑자기 까마귀 몇 마리가 까악까악 날아오른다. (...) “석유를 배 아플 때 먹는 약이라고 여기던 시절 우여곡절 끝에 휴게소 식당을 찾아 여정을 풀고서 그 집 주인장인 이정모(49세) 씨에게 그 지역의 얘기를 들었다. 석탄공사에 다니다 명예퇴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휴게소 차리고 땅도 얼마간 사서 농사도 짓는다는 이정모 씨의 이야기 속에는 모두 다 가난했던 이야기 그러나 정이 듬뿍 들어 있던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광동댐 만들어지기 전만 해도 고기들이 참 많았어요. 뚜구리, 쉬리, 메기, 민물조개들이 물가를 걸어가면 다리를 쿡쿡 치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대부분 가난하니까 메밀밥, 감자, 조밥, 콩밥이 주식이었고 가을이면 산에 가서 도토리를 따다가 으깬 뒤 사카리 넣어가지고 쪄서 먹고살았어요. 이불이 없어가지고 돗자리 덮고 자고, 너무 추우면 집에서 기르던 개를 품고 잤어요. 그래서 나는 먹고사는 것을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요. 약이 뭐 있어요. 배가 아플 땐 석유를 약이라고 마시고 그랬잖아요. 나 클 때는 150여 호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80호쯤 남았는가. 그래서 이 마을 학교에 올해는 학생이 한 사람만 입학했다든가. 아마 내년에는 폐교가 될 거라고 그래요……." 불과 얼마 전 이야기를, 나도 겪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마음은 얼마나 심란했던가. 전라도에선 아무리 가난해도 이불 한 채쯤은 있어서 이불 한 채에 온 식구들이 발을 디밀고 칼잠을 자곤 했었는데.“ 수많은 이야기와 그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피눈물이 서린 한강길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