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봄의 메일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산중산담 2019. 6. 26. 16:04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저마다 기호식품이 있다.

나는 세 가지 검은 것을 좋아하고 먹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머리숱도 많고, 기억력도 좋고, 눈도 좋다고 말하며,

그 좋아하는 세 가지 검은 것을 맞혀보라고 말한다.

이구동성으로, 검은 깨, 검은 콩, 검은 쌀 등을 이야기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세 가지 검은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첫 번째 것은, 콜라, 두 번째는 커피, 그렇게 말하면,

아하! 그러면서 세 번째 것은 그 누구도 맞추지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서 먹는 기호식품이 아니라,

길을 걷다가 보면 숙명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매연煤煙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매연바다 미세먼지가 더 극성을 부려,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길을 걷다가 그것도 오랜 시간 걷다가 마시는 콜라나 커피는

더 할 수 없는 청량함으로 나그네의 육체와 정신에 보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2007년 관동대로를 따라 걸을 때, 자동차 소음과 매연 때문에 걷기가 힘들다고

하소연 하는 도반에게 소음은 아름다운 소네트나 협주곡으로 여기고,

매연은 보약처럼 여겨야 암이 안 생길 거라고 하면서

니체의 운명애를 들려주었었다.

 

인간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나의 공식은 운명애이다.

필연적은 것은 감내하고 사랑해야 한다.

나는 앞으로 긍정하는 자가 되고자 한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진실로 나는 그랬다. 내 상처와 절망을 이렇게 치유했다.

모든 것이 내 운명이다. 내 탓이다. 하고 모든 것 내려놓고

걸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쓰고, 쓰고서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것이 책이 되고, 나라 사랑이 되어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우리 국토위에 뚜렷이 새겨졌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하다가 보니,

그 좋아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열매를 맺기 시작했고,

그 길을 계속 걷고 또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말을 이미 오래 전에 버트란트 러셀이 했다.

 

나는 좋아하는 담배를 피우고, 좋아하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것을 마신다. 나와 같이 타고 난 건강한 사람에게는

자기를 망각하는 것이 최상의 건강법이다.

이것이 나의 평생의 체험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담배는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들었다.

그러나 60년 동안 담배를 피웠지만, 수명을 그렇게 단축시킨 것 같지 않다.

노망해서 수년 간 더 사는 것 보다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즐거움을 준다.

나는 쉬지 않고 담배를 피운다.

잠 잘 때와 식사 할 때만 파이프를 놓는다.”

 

저마다 다른 체질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담배가 해롭고, 어떤 사람에게는 담배가 이롭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게는 콜라가 해롭지만

나에게는 콜라가 보약처럼 내 몸 안에서 작용해서 이렇게 건강하게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명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건강도 역시 그렇다.

그 오랜 인류가 연구한 의술로도 생로병사는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단지 조금씩 조심하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면서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연애하듯 하면서 살다가,

그 생이 다하는 날, 소풍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듯

돌아가면 잘 산 삶이 아닐까?





미리 넘는 굴목이재에 대한 회상,

미리 넘는 굴목이재에 대한 회상,

 

순천 선암사에서 절집이 아름다운 송광사로 가는 고개가

굴목이 재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고개라고 소문난 그 고개는

마음을 내려놓고 산에 취해, 자연에 취해 걷기에 가장 알맞은 고개 길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고개 중간에 자리 잡은 보리밥집에서

보리밥 한 그릇에 동동주 한 잔 마시고, 천천히 걷기에 좋은 고개 길에서

<취고당검소>의 한 소절을 읊어도 좋으리라.

 

흐르는 물은 속세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비방을 지니고 있고,

좋은 산은 약처럼 몸을 가볍게 해준다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바람결에 실려서 온 산에 안개처럼 드리운

그 길에 앞 다투어 피는 봄꽃들이 길손의 발길을 자꾸 붙잡을 것인데,

나는 또 어떤 사념에 빠져서 그 길을 걸을 것인가?

 

알 수 없다. 겨울을 견딘 나무들이 봄의 기운에 물이 오르고,

잎 새들이 늦을 세라 서둘러 피어나는 그 길에서

나는 또 어딘가에 팔려서 해찰을 하며 걷다가

시간이 금세 흘러간 것을 깨닫고

부산히 발길을 옮기겠지만,

조금 일찍 간다고 해서, 또는 조금 일찍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나고 나면 다 별 것도 아니고, 다 부질 없는 허무에 허무일 것이고,

결국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인데,

나는 사람과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찾겠다고 그리 바쁘게 헤매고 있는가?

그런 나에게 양자가 한마디 말을 건넬지도 모른다.

 

삶이 있으니까 그대로 따라가며 가는 대로의 방향으로 따라가라.

그리고 욕망의 만족을 추구하며 죽음의 오는 것을 기다려라.

죽음도 어차피 가까이 오니까, 오는 대로 오도록 하라.

그리하여 쾌락을 찾고 죽음을 최대한 반가이 맞이하라.

죽음이 늦게 오건, 빨리 오건 걱정할 것 없지 않은가?“

 

어차피 정해진 것이 인생이다.

이미 정해진 운명을 거역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

순응하면서 그냥 살다가 가자.

이 지상에서 이루어진 모든 인연도 생이 다하는 날 끝날 것이고,

불경에도 쓰여 있지 않은가?

 

인연으로 이루어진 온갖 것은 다 무상이다.“

 

인연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먼 산 바라보듯 살자,

그리고 지금, 이 현재에 충실하자.

봄꽃 피는 소리, 먼데서 들리는데,

그 소리가 내 꿈에서도 들리기를 기원하자,

그리고 그 꽃향기에 취해서

죽음 같은 잠이 찾아오길 기원하자.




내년에도 피고 지는 그 꽃들을 같이 바라볼 수 있을까?

내년에도 피고 지는 그 꽃들을 같이 바라볼 수 있을까?

 

집에 돌아와서 짐을 풀고

어제와 오늘을 회상해보니,

내 마음 가득, 꽃향기가 차곡차곡 쌓였다가

안개가 풀리듯 방안을 가득 채우고,

빗방울 떨어지던 꽃송이 송이마다

서리고 서린 이야기들이

실마리가 풀리듯 풀려 나온다.

 

백매, 홍매, 그 노랗던 산수유 꽃,

그 하늘거리던 히어리꽃과 진달래꽃들이

내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서

잠든 내 정신을 눈뜨게 만든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온다.’는 그 봄이

남녘의 산과 강에 서리서리 내리고,

그 봄 속을 마음 내려놓고 어정거리다가 돌아온 나에게

언제 다시 올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은

아직도 자연이 나를 허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온통 꽃 대궐이던 매화농장의 바위들에

매화꽃이 우수수 떨어져 은하수처럼 빛나고 있었고,

옥룡사터에 동백꽃들은 뚝뚝 떨어져서

가끔씩 찾아오는 길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바위를 쓸다가 보니 빗자루에 달빛이 가득!

샘물을 거르다가 보니 체에 꽃송이 가득!“

(流水有方能出世 名山如藥可輕身)

<취고당검소>에 실린 글과 같이

흐르는 물속에 떠가던 꽃잎,

그 꽃잎들이 이 한 밤에 다시 문득 그리워지는 것은

그 무슨 심사인가?

 

올해 핀 꽃 작년에도 붉었는데,

내년에 피는 꽃은 더더욱 붉으련만,

애석타 누구와 함께 꽃구경할까

송나라 구양수의 <랑도사浪淘沙>라는 시를 떠올리자

문득 다시 그리운 사람들,

 

내년에도 피고 지는 그 꽃들을 같이 바라볼 수 있을까?

 



운명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잘 사는 것은

그가 잘하는 것을 잘하면 된다.

하지만 누구나 못 하는 것을 잘 하고자 하지만 잘 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

그것이 항상 세상과 사람 사이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어나는 모든 일이거나, 만나고 헤어지는 것,

그 모든 것이 결국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던 철인들의 말이 가끔씩

가슴에 가득 안긴다.

 

이 우주는 한 몸과 같다. 우주 안에서 작용하는

이성의 엄밀한 계획에 따라 우리는 살아간다.

황제이든 노예이든 그런 거대한 우주의 이성의 작은 부분들이다.

우주의 이성과 나의 이성이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우주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우주의 이성과 하나가 되는 것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운명을 개척한다고들 말하지만, 그렇게 개척한 운명이라는 것은

우주의 이성을 거부한 뒤에 남는 공허하고,

흐린 영혼의 가난함일 뿐이다.”

에픽테토스의 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도 운명을 거부할 사람은 없다.

단지 내가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고 큰 소리를 칠뿐이지,

운명에 굴복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인 왕발王勃의 글은

그런 의미에서 울림이 크다.

 

흥이 진하면 슬픔이 닥치거니,

성공과 실패는

다 운명에 달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운명에 순응한다.

내게 다가온 운명을 감내하고 사랑한다.

말은 쉽지만 순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감내하고 사랑해야 할, 내 운명,

내 운명을 사랑하자,

이 한 밤에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거두어들이는 인연과 버리는 인연

거두어들이는 인연과 버리는 인연

 

백아伯牙는 거문고의 명인이었고, 종자기鍾子期는 그 좋은 이해자였다. 백아가 높은 산을 악상으로 하여 거문고를 뜯으면 종자기는 말했다.

좋다, 아아峨峨하여 태산泰山과 같구나.!”

이같이 백아의 생각을, 종자기는 꼭 맞추었다.

백아가 태산 북쪽에 놀러간 일이 있었다. 갑자기 폭우를 만나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하면서 슬픈 마음이 일어 거문고를 당겨 한 곡조를 뜯었다. 처음에는 임우箖雨의 곡을 연주하고, 계속해서 붕산鵬山의 곡을 뜯었다. 그런데 곡이 연주될 때마다 종자기는 그 취지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 당신의 음악 감상력은 정말 훌륭하십니다. 곡조를 들을 때마다 당신의 상상은 마치 내 마음이기나 한 듯이 정확하게 작용했습니다. 어디에 내 악상을 숨길 수 있단 말입니까?”

<열자>에 실린 글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듯, 아니 들여다보듯

그 사람의 마음에 전달한다. 신기한 일이리라.

사람이 홀로 태어나서 한 세상을 살다가 이런 사람을 만나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복 받은 삶일까?

천태만상이라는 사람의 마음이 지극한 인연으로 맺어졌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이 생에 살면서

맺어지는 인연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천금千金의 보석寶石은 이익利益으로 인연이 맺어졌고,

어린 자식은 자연自然의 힘으로 맺어졌다.

이익으로 맺어진 것은 위급하면 버리지만,

자연의 힘으로 맺어진 것은 위급하면 거두어들인다.

이로써 보면 대저 거두어들이는 것과 버리는 것의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가?

<장자> <외편 제 2> ‘산수에 실린 글이다.

 

 

자연으로 맺어진 인연과 이익으로 맺어진 것의 차이를 말한 것으로

거두어들이는 인연과 버리는 인연.’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오는 인연 막을 수 없듯이

가는 인연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깨닫는다.

<수호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 밖에서 찾아오고,

인연이 없으면 코를 맞대고도 사귀지 못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이생에서의 인연이 깊고도 깊어

이렇게 만나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인연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은 어떻게 남기를 바라는가?

 

사람의 죽음은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인연이 닿는 사람의 가슴에 우뚝 선 나무가 되는 일이다.“

신준환의 <다시 나무가 되다>에 실린 글이다.

 

우리들의 갸륵한 인연들이 모이고 모여,

푸르고 푸른 나무가 되어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당신 자신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당신 자신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개폼을 잡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도 많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기원 전 5세기를 살았던 에픽테토스가 <엥케이리디온>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넨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모든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므로

자기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라는 말이다.

돈이 있다고 자신만만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돈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 일부는( 나와 같은 사람이 그런 경우다.) 그 돈을

경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애써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러셀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보낸다.

 

재물을 업신여기는 자를 크게 믿지 말아라.

재물을 노리다가 절망한 사람이 재물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이들은 일단 재산을 얻으면 어느 누구보다도 더 고약해진다.

사소한 일에 인색하지 말아라.

재물은 날개를 달고 있어서 때로는 홀연히 날아가 버린다.“

 

많아도 흠, 적어도 흠인 게 돈인데, 그 돈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많으면 많은 대로 걱정과 근심이 많은 것이 지식이고,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불편하고,

사람을 고달프게 하는 것이 돈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만물은 변화하고 있다. 당신 자신도 끊임없는 변화,

끊임없는 파괴 속에 있다, 전 우주도 마찬가지다.”

아우렐리우스는 자꾸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이 삶이기 때문에

매 순간 변화하라고 다그치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어떤 변화의 흐름을 타고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알 수 없고 어려운 것이 세상이고, 삶이다.





어찌하여 태어났나, 어디서 왔나,

어찌하여 태어났나, 어디서 왔나,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인 피츠제럴드가 그의 나이 41세에

번역하여 익명으로 출판한 책이 11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란 시집이다.

오마르 카이얌의 시선집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피츠제럴드의 뛰어난 번역에 힘입어서다.

인간은 어차피 나고 죽는다는 숙명론과 허무주의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값싼 감상이나 비관에 빠지지 않는 시가

11세기에 쓰여 졌으면서도 오늘의 시대에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한 줌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

인생의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불변의 진리를

한 편 한 편의 시가 일깨워주기 때문일 것이다.

 

태초에 진흙으로 마지막 인간을 빚었으니,

마침내 거둘 곡식, 씨앗은 이미 뿌려진 것,

손을 들어 하늘에 구원을 찾지 말라.

하늘인들 어차피 아무 힘이 없는 것을

 

오늘만을 위해서 사는 이 있고,

내일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지만

암흑의 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어리석은 자여, 그대의 보답은 어디에도 없으리

 

어찌하여 태어났나, 어디서 왔나,

세상에 나타난 인생, 물처럼 절로 흐르다

사막의 바람처럼 세상을 하직하고

어디론지 속절없이 가고만 있네.

 

아무리 높은 권력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고,

아무리 많은 돈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세상을 녹일 것 같은 사랑이나 분노도

어느 순간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인생,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욕심 부리지 말고, 현재를 잘 살 것,

스스로의 힘으로 살면서 남에게 원한이나 미움을 받지 않고,

하루하루를 허허실실 살다가 보면 어느 순간

삶에서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봄 날씨는 하루에 몇 번이나 변하는 가,

봄 날씨는 하루에 몇 번이나 변하는 가,

 

눈앞에 온 봄을 시새움해서 그런가,

날씨가 한 시간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하다.

그렇게 화창하다가 금세 흐려져 뇌성벽력을 치며 비가 내리고,

바람 부는가 싶더니 햇살이 쏟아지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어제 오늘의 날씨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기분 좋은 일이 오는가 싶더니 점심때도 안 되어,

슬픈 일이 닥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게 인생이라고 생각하기엔 세상의 이치가

너무도 변화무쌍해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봄날,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마크 트웨인은 <뉴잉글랜드의 기후>에서

봄 날씨가 하루에 몇 번이나 변하는 가

세어 보았더니 136번이나 되었다.” 라고 하였다는데,

지금도 어둠속에서 들리는 저 바람소리,

섬진강변에선 어떨까 알 수 없지만, 미리 걱정할 것은 없고,

변덕스런 봄날의 날씨 속을 거니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자위한다.

봄날의 날씨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의 마음을 두고

아미엘은 <아미일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세계는 너무나도 변화무쌍하고, 인간은 기묘하다.

변화하는 경치를 바라보는 변해가는 사람이

자기는 똑같은 것을 보았다고 믿고 있다.“

 

변하고 또 변하는 날씨에도 꽃은 피고 지고,

강물은 바다를 향해 흐르고 흘러갈 것이다.

 

내 말을 잘 듣게, 여보게들,

태어난다는 것은 괴로운 일,

죽는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지,

그러니 꽉 붙잡아야 하네.

사랑한다는 일을 말일세.

태어남과 죽음의 사이에 있는 시간 동안,‘

휴스의 <도움말>이라는 시와 같이

내일, 내일은, 매화와 산수유, 그리고

여기저기 피어난 제비꽃들을

더 사랑스런 눈으로,

기적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봄 풍경을 보면서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를 부르다.

봄 풍경을 보면서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를 부르다.

 

연푸른 나뭇잎이 하늘거리는

이른 봄 강변의 버드나무는 찬란하다.

어린아이의 재잘거림 같이

소살 소살 대며 흘러가는 강물은 눈이 부시다.

 

산수유 꽃이 피고, 백매, 청매, 홍매가

온 천지를 수놓은 강변길은

이 생의 길이 아니고, 전생의 길과 같이 아름답다.

그것은 긴 겨울을 견딘 나무며 풀들이

생명의 꽃을 피우기 때문인데,

오래 전에, 아니, 지금의 생이 아닌 전생에서

보았을 법 한 길이고, 강인 섬진강을 걸으며,

나는 보들레르의 시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

떠올렸다.

 

그대 무한한 하늘에서 왔는가, 구렁에서 솟았는가,

, ‘아름다움이여! 지옥 같으면서도 하늘같은 그대 눈길은

선과 악을 뒤섞여 쏟아 부으니,

그대를 가히 술에 비할 만 하다.

 

(....)

 

그대 하늘에서 왔건, 지옥에서 왔건 무슨 상관이랴.

(...)

내가 갈망하나 만나보지 못한, ‘무한을 열어줄 수만 있다면,

(...)

세계를 덜 추악하게 하고, 시간의 무게를 덜어줄 수만 있다면,“

 

그래, 삶이란 것이 다 허무하고, 무익한 것에 불과 하다고

투덜대다가도, 봄날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가을의 풍경 앞에서,

무너지고 무너져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희열을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깨닫는다.

보들레르가 말한 갈망했지만 만나보지 못한 무한

힘든 시간의 무게를 덜어 줄 수 있는.

그런 시간 속에 잠시나마 머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봄날, 자연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리라.

 

꽃 피고, 지던 섬진강과 지리산,

그 풍경과 같은 아름다움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요즘 잘 살고 있어?

요즘 잘 살고 있어?


오랜 만에 만나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하는 말,

요즘 잘 살고 있어?”

그냥 하는 말이면서도, 그 말 속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못사는 것인가?

세상의 어떤 현자라도 그 답을 명쾌히 내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인생을 한 가지도 후회없이 살았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후회가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도 아니며,

열 개 스무 가지가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인간이 죽기 직전에 제일 많이 하는 후회

열 가지를 열거한 글이 있다.

 

수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온 것,

어떤 하나에 몰두하지 않은 것,

좀 더 도전적으로 살지 못한 것,

내 감정을 솔직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표현하지 못한 것,

나의 삶이 아닌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온 것,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것,

친구들에게 자주 연락하지 못한 것,

자신감 있게 살지 못한 것,

세상의 많은 나라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

결국 내 행복은 내 선택이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는 것,“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글인데,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맞는 말이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면서도, 누구나 원하는 것,

잘 살다가 가는 것,

그런데 그 잘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데카르트는 그가 지은 <정념론情念論>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기본 감정을 여섯 가지로 보았다.

놀라움, 사랑, 미움, 욕망, 기쁨, 슬픔이 그것들이다.

감정심리학을 집대성한 톰킨스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즐겁고 기쁜 쾌감정快感情과 블쾌한 감정으로 분류했다.

즐겁고 기쁜 감정은 첫째, 흥미, 흥분(interest excitement),

둘째, 즐거움과 기쁨(enjoyment)이고

셋째는 놀라움과 깜짝(surprise startle)을 들었다.

불쾌한 감정은, 첫째가 고민과 불안(distress anguish)이고,

둘째는, 혐오와 모욕(dis_contempt))이며,

셋째는, 노여움과 격노(anger rage)이다.

넷째는 치욕과 굴욕(shame humiliation)이고,

다섯째는, 두려움과 공포(fear.ter_ror)를 들었다.

 

이러한 모든 감정이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 내내

사람을 얽어매기도 하고, 자유롭게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이러한 감정의 쇠사슬에서 한 시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고,

그 감정 때문에 산다.

오늘, 이 감정이 내일은 또 어떤 감정으로 전이해갈 것인가?



살아가면서 깨닫는 것들,

살아가면서 깨닫는 것들,

 

살만큼 살고서

살아온 세월을 회고해보면

인생이 하나의 긴 강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 사람의 생애生涯라는 것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눈 내리고 햇살이 비치는

그 변화무쌍한 세상의 강 위에

일엽편주 작은 배가 되어

한 세상 살았다는 것을 압니다.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살아온 세월,

그 세월 속에 내가 있고,

그대가 있고,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습니다.

그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지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떠내려 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 번째 소리치는데,

그 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게 마련,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롭게 하겠습니까?

<장자>산목山木이라는 글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웠는가 싶으면 차고,

채웠는가 싶으면 어느 사이

비워지는 것,

 

훗날에야

채울 것도, 비울 것도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압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아무 가진 것 없이 혼자서 왔다가

아무 가진 것 없이 혼자서 가는 것,

이 단순하면서도 지고至高의 진리,

이 진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

그 먼 길을 걷고 또 걷는 것은 아닐까요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자세,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자세,

 

푸른 하늘, 푸른 강물,

그리고 봄 물드는 강가의 나무들,

봄은 그렇게 생성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고,

느닷없이 퍼붓는 눈보라, 겨울의 한 복판 같은 추위

그렇게 온다.

하지만 봄은 이미 마음속에까지 가득 채워져서

온 산천이 아름다움으로 넘실댄다.

내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동행했던 도반들의 마음에도 행복이 넘실거리고,

그래 사소한 슬픔이나 비애도 묻어버리는 것이

봄날의 아름다움이다.

무언가를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은 아니고,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사람의 인식이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말 한 것과 같이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마음 내려놓고,

한 발 한 발 걸으며 바라보는 산천,

노랗게 꽃망울을 터트리는 생강나무도,

푸릇푸릇 돋아난 쑥들,

그리고 연둣빛 물이 오르던 버드나무,

그 모든 사물들이 저마다 자연이라는 사실,

그것을 바라보는 나 역시 자연이라는 것을 알면서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진실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다시 칸트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지.

 

숭고한 것,

그것은 우정과 상념이 가득한 침묵,

그리고 진실,

아름다운 것,

그리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것,“

 

살면서 이런 순간들 속에서

이렇게 모든 것을 허여許與하면서 살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축복이리라.

그래서 오랜 시간 같이 걷고 돌아와 느끼는

감회는 항상 새롭고

그래서 떠나기 전부터 설레고

또 설렌다.

언제까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여정이 이어질 것인지,

 

이 한 밤에 다시 떠남을 준비하는 마음,

그것이 나의 변하지 않을 삶의 자세다.





지나치게 완고한 마음이 가장 쉽게 꺾인다.

지나치게 완고한 마음이 가장 쉽게 꺾인다.

 

강물은 아래로만 흐른다.

산과 산 사이를 비집고,

평야와 평야 사이를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강,

강은 세세천년 겸손하게 낮은 곳으로만 흐르며

모든 살아 있는 사물들에게 이로움을 준다.

강의 미덕은 부드러움이다.

부드럽게, 흐르면서 모든 사물들에게

보시普施를 베푸는 강,

그 강의 품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어떤가?

강의 흐름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간다.

낮은 곳으로가 아닌 높은 곳에 대한 열망,‘

그 열망 하나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모든 것들과의 불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불행한 것이 사람들의 생이다.

 

잘 알아두어라. 지나치게 완고한 마음이

가장 쉽게 꺾인다는 것을, 불에 지나치게 달군

가장 단단한 쇠가 가장 쉽게

부러지거나 부서지는 것을 너는 보지 못했느냐.“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실린 글이다.

인간은 가장 연약하면서도

가장 강한 생명체인데,

그 생명체가 가장 강하다고 여기는 순간,

부스러지기도 쉽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가 <안티고네>에서 덧붙여 말한다.

 

가깝고 먼 미래에도

그리고 과거에도 이 법은 적용되리라.

인간들의 생활에 있어,

과도한 것은 어떤 것도 재앙을 면치 못하리라.“

 

조심하고 조심하면서 살아갈 일이다.

다산 정약용은 선생은

여유당與猶堂,(겨울 냇물을 건너듯 네 이웃을 두려워하라.)

라는 자호를 짓고 경계했음에도

힘든 생을 살았지 않은가?

 

잠시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다.

잠시사이에서

욕심 낼 일이 뭐가 있겠는가?

조심하고 조심하면서 살아갈 일이다.

그냥 허허실실 웃으면서,

마음을 세상 이곳저곳에 내려놓고서

휘적휘적 걸으면서 사는 것,

그것이 인간 세상 최상의 행복이라 믿으면서,





모든 것이 나로부터 비롯되는데

모든 것이 나로부터 비롯되는데

 

태양이 있음으로 해서 달이 있고,

달이 있음으로 해서 태양이 있다.

음과 양이 만나서 한 세상을 이루는 것, 그래서,

내가 있음으로 해서 그대가 있고,

그대가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되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고,

우주宇宙는 결국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존하는 나라고 볼 때

나는 이 우주의 절대자요, 고독한 작은 행성이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 고독 속을 개별적으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전제하에서 인생은 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는 .

멀리 구하지 말고 나를 닦으라.’ 한 것도 나요,

내 마음을 그 땅에 보내라.’ 한 것도 나요,

내 마음의 밝고 밝음을 보라.’ 한 것도 나요,

내 마음의 화생한 것을 헤아리라.’ 한 것도 나요,

말하고자 하나 넓어서 말하기 어렵다.’ 한 것도 나요,

이치가 주고받는데 아득하다,’ 한 것도 나요,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요, 다른 것이 아니다,’ 한 것도 나요,

나의 믿음이 한결 같은가 헤아리라.’ 한 것도 나니,

나 밖에 어디 한울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한울사람이라 하신 것이니라.”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말이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비롯되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 ‘때문이야만 외치는 이 시대,

이 시대가 과연 제 갈 길을 가서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나 할 것인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답답하기만 한 것은

비단 나뿐일까?

 

아망오我忘吾,‘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어느 순간 내가 나를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인간은 최고의 감격과 기쁨을 느끼게 되는 순간 자기를 잊어버리고,

그것을 일컬어 무아지경이라고 부른다는데,

그런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를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오늘의 이 시대 같다고 느끼는 이 모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익에 좇아 행동하면 원망을 많이 사게 된다.”

<논어> 4이인里仁에 실린 이 글이

새삼 가슴을 툭 치면서 지나간다.

 

한 번 사는 삶, 좀 더 넓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꽃 그리운 마음 꽃 보는 마음 보다 깊으니

꽃 그리운 마음 꽃 보는 마음 보다 깊으니

 

삼월이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세상은 온통 꽃 세상이다.

매화 지나간 자리, 살구꽃이 피고,

야산에 피어난 진달래꽃,

곧이어 이 땅에 복사꽃이 만발하겠지,

꽃 중의 꽃 복사꽃, 그래서 그런지

옛 사람들의 글에 단골로 등장하는 꽃이 복사꽃이다.

 

초목의 제 빛깔과 만발한 꽃의 향기,

유람하는 사람들은 그 정취를 감상한다.

복사꽃 피면 지는 매화,

세상사 달관한 선비는 그 무상함을 깨닫는다.“

<취고당검소>에 실린 글과 같이

꽃은 무한한 생명력이면서, 금세 지기 때문에, 생과 사가

바로 근거리에 있으므로 피고 지는 꽃들을 바라보는 심사는

마냥 쓸쓸함이다.

 

화사하게 피어난 복사꽃에 얼굴을 묻고,

봄이 오가가는 것을 바람결에 바라보는 것,

얼마나 아련한 그리움인지,

그래서 그랬을까?

청나라 때의 시인 원매袁枚의 시는

애달프다 못해 구슬프다.

 

복사꽃 휘날려 찾기 어려우니,

뒤늦게 온 사람들 애석해 하네.

나는 늦게 오는 게 낫다고 말하지,

꽃 그리운 마음 꽃 보는 마음 보다 깊으니,“

 

그래, 이렇게 봄이 오고, 이렇게 밤이 가는구나.

 

인생이 봄날의 하룻밤 꿈과 같다는데,

곧 이어 봄 가고, 여름이 오겠지,

아쉬움 가득한 마음속에 꽃이 피고 지는 봄밤,



꽃이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은

꽃이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은

 

통영의 작은 섬

만지도와 연대도에서

하룻밤 머물고

통영의 땅 이곳저곳을 노닐다가 돌아와

이런저런 밀린 일을 하다가 보니,

어느 새 한 밤중이다.

왜 그렇게 시간이 금세 가는지,

그 시간의 바다에서

나의 하루는 왜 그리 빠르게 지나가는지,

그 시간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미루는 것들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나도 모르는 내 삶을 알아서 그러는지

삶의 방향을 바꾸어서 살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과 얘기할 시간이 있으면 책을 읽으라.

책 읽을 시간이 있으면

산과 바다와 사막을 걸으라.

걸어 다닐 시간이 있으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라.

춤출 시간이 있으면

조용히 앉으라.

이 행복한 바보여.“

나나오 사키키라는 사람의 글이다.

 

그는 어떻게 내가 바보라는 것을 알았을까?

내가 바보처럼 한 생애를 살았다는 것을,

그래서 가꿈씩 후회가 산처럼, 아니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좀 더 내가 나 자신을 잘 알았더라면

내가 살아온 삶을 수정하면서 살았을 것인데,

고지식하고, 바보라서 그렇게 밖에는

살수가 없었을 것이다.

 

때늦은 후회는 그냥 후회일 뿐이다.

그냥 내 삶을 인정하면서 살아갈 수밖에는 없다.

그냥 체념하고, 긍정하면서

살아가자,

그렇게 마음먹으며 바라본 봄 산천에

무수히 피어있던 꽃들,

그 꽃들을 보면서

하나의 긍정, 하나의 기쁨을 깨닫는다.

 

꽃이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은

온갖 시련이 지나간 뒤라는 것을,

그래서 떠올리는 아름다운 시어詩語,

 

대지는

꽃을 통해

웃는다.“

꽃 라첼 카슨의 글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통해 웃을까?

 

사람은

사람을 통해

웃는다.“





어리석은 체하고, 덤비지 말고, 말조심하고

어리석은 체하고, 덤비지 말고, 말조심하고,

 

J TV 전주방송과

<천년의 길> 전봉준의 길,’

촬영을 위해 동학의 현장을 답 사했다.

고부에서 백산으로 백산에서 만석보로,

만석보에서 황토현으로,

그리고 전봉준이 관군에게 체포된 순창의 피노리까지,

동학과 전봉준의 발자취를 찾으며 돌아다닌 그 길목에서

내 마음에 가끔씩 찾아오던 사람이 최시형이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강원도에서 체포되자

재판을 했던 사람이 1898년에 4품 법무민사국장에 임명된

전 고부군수 조병갑이었다.

그는 만석보를 만들어 동학농민혁명을 유발케 한 사람으로

그 몇 달 뒤에 고등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판사직을 맡은 지 한 달 뒤인 1898530

해월 최시형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한 평생을 최제우의 뜻을 이어받아 동하그이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최시형은 동학의 유발케 한 조병갑에 의해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事人如天).

내 제군들은 보니 스스로 잘난 체 하는 자가 많으니,

한심한 일이요, 에서 일탈되는 사람도 이래서 생기는 것이니

슬픈 일이로다.

나도 이 마음이 생기면 생길 수 있으나,

이런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은 한울님을 내 마음에 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해월 최시형 선생의 말이다.

이 세상 어디나 있는 잘 난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최시형은 특히 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 의지하였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한 그릇을 아는데 있느니,

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살고, 성장하는 자료로 하며,

한울은 사람을 의지하여 그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니라.”

해월선생 법설法說에 실린 글이다.

한 그릇이 밥이 한 사람의 육체를 통과하면서

거름도 되고, 생활의 활력도 되므로

한 그릇의 밥이 어쩌면 한울이 되는 것이다.

 

무릇 때와 일에 임하여 어리석은 체하고,

덤비지 말고, 말조심하고, 이 세 글자를 마음속에 새기고서 살아라.

만약 경솔하게 남의 말을 듣든지,

내가 말을 경솔히 하면 반드시 나쁜 사람의 속임수에 빠지느니라.

이로써 공부하여 나아가면 공은 반드시 닦은데 돌아가고.

일은 반드시 바른데 돌아갈 것이다.”

최시형의 <대인접물>에 실린 글이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말이 없고, 어리숙하고, 서툴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이 많고, 똑똑하고, 능숙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보니 삶이 매우 부산해졌고,

여기저기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아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녀린 사람처럼 살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최시형 선생의 말씀이

문득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밤이다.

 

내일, 내을은 또 어떤 사람이 내 마음을 열고 들어올까?






당신에게는 어떤 콤플렉스가 있는가?

당신에게는 어떤 콤플렉스가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콤플렉스가 있다. ‘온전히 아름다운 땅이란 없다.“라는 풍수의 명제를 빌리지 않더라도 저마다 한두 가지씩의 결점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몇 가지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다가 어느 사이 그것을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극복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련하다.

나는 왜소했다. 나는 인내심은 있었으나 육체적인 힘은 거의 없었다. 나는 말을 더듬었고, 부끄럼을 탔으며, 나는 영국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는 이러한 이유 가운데 어느 것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본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나의 동료들로부터 움츠러들었다....나는 개개인을 사랑했다. 나는 집단 속에 있는 사람들을 결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내가 첫 눈에 좋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상대방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 한, 기차 객실이나 선실에서 모르는 승객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내 자신이 호감 가는 소년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달과 6펜스>의 저자인 서머세트 모음의 <요약>이라는 글인데, 그는 말 더듬는 버릇 때문에 평생토록 괴로워했지만 말더듬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서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손자병법>의 저자 손자孫子는 단근형斷筋形을 받아서 절름발이가 된 콤플렉스를 승화시켜 그 장대한 책을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실명을 한 뒤에 <좌전左傳>을 지었다.

<한비자>를 지은 한비자韓非子 역시 말더듬이었고, 희랍의 대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는 반 벙어리였다, 그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갈을 물고 해변에 서서 파도 소리를 이기는 발성연습으로 목을 터서 대 웅변가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콤플렉스 없이 탄생한 위대한 천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하나의 큰 이정표를 세웠다고 할까.

 

콤플렉스는 부정적으로 발전할 뿐 아니라 긍정적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현상이다. 정신생활에 필요한 요소로서 극복하거나 떨쳐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그것을 끌어안고 사랑해야 한다. 콤플렉스를 사랑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수치스러워 하고 숨기려 했던 그것이 의식 안으로 통합되는 순간, 좀 더 다양하고 풍성한 인격이 나오게 된다. 콤플렉스가 내 것이 되면서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운명애와 같이 자신의 결점, 그 콤플렉스를 내 안에 끌어 안고 남들의 평가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다가 보면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을, 너무 남들의 눈치만 살피다가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말했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인간애의 결과다. 인간은 모두 연약하고 결점 투성이다.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줄 것, 이것이 자연의 제일법칙이다.”

호라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결점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결점이 가장 적은 사람이 가장 훌륭한 것이다.”

 

당신에게는 어떤 콤플렉스가 있고, 그 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해나가면서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사람들이 마음의 창을 활짝 열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마음의 창을 활짝 열기만 한다면

 

여기저기서 말과 말이 부딪친다.

그것은 바람직한 일인가?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분명한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말과 말이

곱지를 않고, 겨울바람과 같이 사나운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마음의 창을 활짝 열기만 한다면 모두 건강할 수 있으며,

며느리와 시 어머니는 단지 그들이 좁은 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투는 것이다.“

열자는 이렇게 말했는데,

우리가 사는 집이 너무 비좁고,

그래서 서로 작은 이익에도 다투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 가볍고, 가벼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때문에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가 잠시 궤도 이탈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체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창작을 하는 사람이 있으나,

나는 그렇게 한 일이 없다. 많이 듣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고, 많이 보고 그 가운데 옳은 것을 기억해 둔다.

이것은 나면서부터 아는 것의 버금가는 일이다.

<술이(述而)> 27편에 실린 글이다.

 

학문하는 사람이 따라야 할 배움의 자세다.

학문만 그렇게 연구할 것이 아니라

삶조차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삶을 너무 희화戱畵화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닐까?

 

생이지지生而知之(나면서부터 앎) 학이지지學而知之(배워서 앎)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이를 재빨리 찾아 배워 아는 사람이다.”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술이> 19에 실린 글이다.

 

고전 속에 길이 있는데, 고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시대에 살다가 보니

여기저기 뒤죽박죽이다.

그것 역시 긍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살다가 보면,

다시 돌고 돌아 고전 속으로 되돌아오는 그런 시절이

돌아오기는 할까?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런 시대,

옛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시대가?





백만장자의 삶과 가난한 자의 삶, 어느 것이 좋은가?

백만장자의 삶과 가난한 자의 삶, 어느 것이 좋은가?

 

불행한 백만장자들은 기업을 물려받아야 할 책임이 있지만, 인생을 즐기는 데는 평범한 사람만도 못하다. 실로 여러 방면에서 백만장자는 가난뱅이보다 훨씬 더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 군악대 지휘자가 백만장자보다 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어리 마부가 백만장자보다 더 빠른 말을 타고 달린다. (...) 공작새 머리 고기를 넣은 비싼 샌드위치를 먹는 백만장자는 햄이나 소고기를 넣은 보통 샌드위치의 말을 느낄 수 없다.(...)

백만장자는 결국 부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백만장자는 도대체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쓰는 것일까? 호화 유람선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한 대대쯤의 시중드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일까? 도시의 집을 다 사들이고 싶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대륙 전체를 자기만의 사냥터로 삼을 것인가? 설마 하룻밤에 수십 개의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혼자서 몇 벌의 옷을 껴입을 생각인 걸까? 백만장자는 한 끼에 몇 십키로그램이나 되는 음식을 먹어치울 수 있는 걸까?

백만장자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낸 돈 꿔달라는 편지도 받아야 하고, 많은 재산을 관리하는데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도대체 그런 일들이 뭐가 그리 즐겁단 말인가?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꿈을 꿀 수 있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먼 친척이 막대한 유산을 남겨 주지는 않을지, 그런 일이 생기면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이다, 행복한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아울러 이런 꿈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횡재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백만장자는 이런 꿈조차도 꿀 수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영국의 작가인 버나드 쇼의 <백만장자를 동정하다.>의 일부분이다.

부자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이 괜히 부러움이나 시새움으로 쓰는 것만은 아니지만, 대체로 맞고도 의미심장한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매일 한 장씩 오천 원짜리 복권을 산다. 사는 순간 즐거워지는 것이다. 이번 주 로또가 되면 뭐를 하지, 그 돈으로 뭐부터 하지,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야 할까. 아니면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고, 마지막 날에 가서 타는 게 나을까. 외국여행을 하고, 집부터 큰 집을 사고, 차는?

떡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치국 부터 마신다.‘는 옛 속담도 있지만, 일주일이 즐겁고, 혹여 당첨이 되지 않으면 다시 한 장 사면 일주일간이 행복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너무 가난하지만 않으면 어디든 갈 수가 있고, 그래서 백만장자들은 꿈도 못 꾸는 아름답지만 험한 산을 가도 되고, 예전에 아랫것들이나 하던 먼 길을 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백만장자는 제약이 너무 많다. 자기 돈이라고 마음 놓고 써도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하고, 조금만 눈에 나면 여기저기서 벌집을 쑤신 듯이 나라가 시끄럽다.

가난하게 사는 것도 어렵지만, 부자로 사는 것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부자로 살면서 불편한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부자로 사나, 가난하게 사나 인생 별것 아닙니다. 온갖 것 다 보러 태어났으니,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하고 싶은 곳 하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보고 싶은 사람 다 보고,’ 살다가 가는 것이 최상의 행복입니다.


지난 일들은 다 덮고, 우리나라 항공 산업을 크게 일으키시고 먼저 가신 조양호님, 좋은 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세에서는 좀 더 편히 자유롭게 사시길 기원합니다






자화자찬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

자화자찬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

 

어떤 일이든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이것은 악하고, 저것은 선하다.‘ 가 아니라 절대적인 악도, 절대적인 선도 없다는 말이다.

나는 공정하다. 너는 불공정하다.’ 이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할 때 세상은 단 한 시도 편안치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인간은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갈라놓고 있는가, 가장 확실한 것은 자신의 이기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세상을 그토록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내 탓은 없고, 네 탓만 있는 이 시대에 마음 놓고 들어갈 곳은 책 뿐이고, 그것도 오랜 세월에 걸쳐 입증된 고전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만약 당신이 카이사르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대담하게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 중에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지나치게 체면에만 관심을 둔다. 체면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해 사물의 본래 면모를 보지 못하게 하는데도 말이다. 체면 때문에 우리는 종종 쓸모없는 큰 나무 줄기는 버리고 쓸모가 적은 곁가지를 붙잡는 실수를 범한다. 하지만 체면을 따지는 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체면은 남의 눈에 띄는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성 역시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성을 따르기보다 체면을 따른다. 이렇게 체면은 우리의 손과 발을 묶는다. 사람들은 체면 때문에 자신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 남의 눈 때문에 자신을 칭찬하지도 욕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몽테뉴의 <자화자찬>이라는 글이다.

 

체면이 밥 먹여주나.“ 이런 말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이 체면 저 체면 다 따지다가 보면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체면을 따지지 않고 이것저것 다 하다가 보면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경우에 이르기도 하니, 체면을 안 따질 도리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의 삶도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이고, 한 번 밖에 못사는 삶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잘 사는 것이다.

남들의 평가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만 할 필요가 있어,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거든,“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에 나오는 구절 같이 행복은 스스로가 찾아내야 할 절대 적 명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좋은 운명을 타고나 어려서부터 부유한 생활을 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아도취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애초부터 가난한 운명을 타고 난다.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떠벌리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렇게 각자 정해진 운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지화자찬을 막을 수도 없고, 강제로 타인을 자만에 빠지게 할 수도 없으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나 과소평가하는 것 역기 막기 어렵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몽테뉴의 말이다.

 

자화자찬은 무엇인가? 모두가 땅을 딛고 사는 세상에서 저기 혼자만 구름을 타고 높은 곳에 떠 있다고 착각하는 감정, 자기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계층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사회의 도처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우선 국회의원만 되어도 되는 순간, 자기들은 다른 계층으로 이동해서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진다.

우선 목에 깁스부터 하고, 무게를 잡은 다음, 겉으로만 사람들을 섬긴다고 하고, 아랫것들이나 상것들 보듯 바라보는 것이다.

네 눈에 미치는 곳에 네 보물도 있느니라.“ 라는 성경구절과 같이 눈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간다고,

어디 정치가만 그럴까, 돈이 많은 재벌, 인기가 높은 연예인들, 예술가들, 일부 교수들까지, 그러다가 보니 세상사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세상이 너무 재미가 있다고 한다.

어차피 인생은 한 번 사는 것, 어떻게 잘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 저마다의 해법이 다 다르다. 당신은 어떤 삶을 원하는가?




봄이 오고 가는 그 길목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다.

봄이 오고 가는 그 길목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다.

 

봄이다. 꽃피고 지는 봄, 벚꽃, 살구꽃, 앵두꽃, 조팝꽃이

여기저기 피어나는 봄, 목련도 행여 질세라 하얗게 천지를 수놓는 봄,

봄을 시샘하는 비가 바람 속에 내리더니, 여기저기 떨어진 꽃잎,

낙화洛花로다. 낙화로다.

가만히 앉아서 떨어져 쌓인 꽃잎을 만지니 아직은 부드러운 것이

마치 살아서 내 영혼을 꿰뚫는 듯 하다.

산 것과 죽은 것이 아주 가까운 것이라서

어제 살았던 것이 오늘 이렇게 죽은 시체가 되어

내 손바닥 안에서 영혼도 없이 누워 있으니,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이 하도 시끄러워서 꽃이 피는가, 지는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강물은 흐르면서 생명을 예찬한다.

 

생명은 따스한 봄날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과 비슷하다. 겨울 산의 눈과 얼음이 봄 햇살에 녹아 흘러 내려간다. 도중에 여러 갈래의 물줄기를 만나 큰 강이 되고, 큰 파도를 삼키며 아래로, 아래로 세차게 흘러간다. 때로는 구불구불 천천히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통과하기도 하면서 물은 모래먼지와 작은 돌을 품고 용맹하게 흘러간다. 물은 도중에 마나는 모든 상황을 신나게 즐긴다. 낭떠러지를 만나 흥분하기도 하고, 포효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이미 지나간 길을 배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다시 길을 재촉한다. 높은 절벽에 부딪히더라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천 리를 흘러간다, 작은 평야를 지나면서 꽃밭도 구경하고, 바위틈을 뚫고 나온 빨간 꽃도 바라본다. 그러면서 조용히 노래를 부르며 낭만적인 여행을 계속한다.

그러다 다시 천둥번개와 폭풍우를 만나 깜짝 놀라기도 하낟, 거센 비바람 때문에 어지럽고 혼란스럽지만 비가 그치고 날씨가 개면 다시 활력을 찾는다. 저녁놀과 초승달을 보면서 편안하게 잠들고 싶지만, 결코 멈출 수는 없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힘이 다시 그에게 나아가라고 재촉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강물은 바다를 만난다. ! 길고 긴 여행이 끝났다. 강물은 바다를 보며 숨을 죽인다. 바다는 광활하고 위대하다. 바다는 눈부시게 환하면서 칠흑같이 어둡다. 바다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강물을 가슴에 품는다. 강물이 바다와 한 몸이 된다.

그러나 강물은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다. 언젠가 강물은 다시 세찬 빗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 비가 되어 혹 담에 떨어지고 바위를 뚫고 나온 꽃을 만날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감히 생명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다. 삶은 변화무쌍하니까 말이다.“

중국의 문장가인 빙신(氷心)<생명은 한 방울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과정이다.> 라는 글이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강물은 흐르고, 흘러 바다로 가고,

그 강물은 다시 수중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이 지상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멀지 않고 가깝기 때문에,

나도 당신도 어느 날 문득 돌아갈 것이다.

나는 믿는다. 죽음도 아닌 삶도 아닌 것,

그 속으로 들어가는 그날,

내 마음이 평화롭듯이 당신의 마음 역시 평안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매 순간 삶이란 죽음을 위한 연습이라는 것을 자각하며

또 화루를 시작하고, 그리고 다시 하루를 마감할 것이다.

그 동안에 내 삶은 이런 저런 삶의 여정에서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할 것이고,





꿈이 꽃처럼 펼쳐진 그 길,

꿈이 꽃처럼 펼쳐진 그 길,

 

가장 아름다운 비,

꽃비!

가장 아름다운 방석,

꽃방석,

가장 아름다운 이불,

낙엽이불,

가장 아름다운 비단,

하얗게 내린 눈,

가장 아름다운 소리,

댓잎 스치는 바람 소리,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가능하지 않은 꿈을 꾸는 것,

 

꽃 피고 지는 봄,

여기도 저기도 꽃방석입니다.

흔들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는 꽃잎,

그 진달래 꽃잎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서서

라고 소월은 노래했는데,

예이츠는

<갈대밭의 바람>에서 하늘의 천

이라는 시에서 그 보다 더 감미로운 사랑을

시어로 표현했습니다.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의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밑에 깔아 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꿈으로 된 천,

꿈으로 된 사랑,

꿈으로 된 소망,

꿈으로 된 그리움이

이 나라 산천과

무한대로 펼쳐진 길 위에

봄날의 따스한 햇살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작지만 커다란

꿈을 꾸는 모든 사람들이

그 꿈으로 만든 비단을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가도록,






숨어서 기다리는 풍경

숨어서 기다리는 풍경


무어래요,

정지용


한길로만 오시다
한고개 넘어 우리 집.
앞문으로 오시지는 말고
뒷ㅅ동산 새이ㅅ길로 오십쇼.
늦은 봄날
복사꽃 연분홍 이슬비가 나리시거든
뒤ㅅ동산 새이ㅅ길로 오십쇼.
바람 피해 오시는이 처럼 들레시면
누가 무어래요?


수줍어서 보이기가 아까우ㅠㅓ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풍경이 있고,

그곳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