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길을 잃은 다음에야 새로운 길을 찾는다.

산중산담 2019. 6. 26. 16:49



저마다 다른 삶의 형태 속에 당신과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저마다 다른 삶의 형태 속에 당신과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시대마다 지역마다 풍속이 다르고 마찬가지로 삶의 형태도 다르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경건하게 지내야 하늘에서

비를 내려준다고 여겼지만 전남 곡성에서는 동악산의 신선바위에는

그와 정반대로 기우제를 지냈다.

넓이가 30여 쯤 되는 이 신선바위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놀면서 바둑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 바위에서 옛 시절에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산의 기우제는 정성껏 제물을 차려놓고 올리는 기우제가 아니고

특이하게도 신을 성나게 하기 위해 아낙네들이 바위에도 똥이나 오줌을 누고

술을 마시며 뛰고 구르면 신이 더럽고 무엄하다며 화를 내면서

뇌성 번개를 내려쳐서 큰비를 내려주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강도 마찬가지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에서 올리는 기우제가

엄숙하고 정갈하게 치러졌는데,

강을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보았던 나라들도 있었다.

터어키의 이나퀴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강이 범람하는 것을 부당한 것으로 여겨 관에다가 소송을 했다.

그 풍습이 1826년까지 실시되었다고 한다.

 

서류형식에 맞추어 꾸며지고 서명된 청원장에 의해서,

터어키 인들은 재판관에게, 이나퀴스 강이 경계에서 나와,

그들의 밭을 황폐하게 한다는 것을 진술하고,

그 강이 자신의 지역으로 되돌아가게끔 명령해달라고 탄원한다.

재판관은 그들이 바라는 바대로 판결을 내리고,

그 선고宣告는 그대로 잘 지켜진다.

그러나 만약 물이 불어나게 되면, 그때 재판관은 주민들을 데리고,

문제의 그 장소에 가서 강을 향해 물러가라고 명령한다.

강에는 재판관의 권고장의 사본이 던져지며,

주민들은 강을 침략자나 탈취자로 취급하여 돌을 던지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관습이 아실 밀리앙의

<그리스와 세르비아의 민요>에도 나타난다.

바다에서 죽은 수부의 아내들이

바닷가에 모여 각자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번갈아 물결 위를 채찍으로 때려라.

, 거품 이는 물결의 심술 굿은 바다야

우리 서방 어디 갔나? 우리 주인 어디 있나?“

 

자연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연을 삶의 대상으로 여겨 잘못이 있으면 따지고

소송까지 마다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그것을 보면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극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무수히 흐른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펼치는 삶과 놀이의 현장을

보면 그 당시와는 너무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골프도, 축구도, 야구도, 아니 IT를 비롯한 여러 가지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고 질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옛 시절에 비해, 너무 당당하다고 할까?

아니면 극성맞다고 해야 할까,

내가 한국인인데도 그 한국인이 겁날 때가 더러 있다.

좀 더 세계인들과 보폭을 줄여서

잘 놀고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잘 놀자. 그리고 잘 살자.




저마다 다른 도덕이 있고, 저마다 져야 하는 책임이 있다.

저마다 다른 도덕이 있고, 저마다 져야 하는 책임이 있다.

 

살아가는데 여러 규범이 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그 규범을 뛰어넘을 때도 있고,

깨뜨릴 때도 있다.

자신이 정한 규범이 더 중요하거나

확신할 수 있는 신념이 있을 때다.

그 규범이 도덕일 수도 있고, 법률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물었다.

도덕은 무엇인가?”

메논이 대답했다.

도덕에는 남자의 도덕, 여자의 도덕,

어린아이의 도덕, 노인들의 도덕이 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소리쳤다.

이것 참 잘 되었군, 우리는 하나의 도덕을 찾았더니

여기 도덕이 떼거리로 나오는군!”

 

도덕이 그러하듯이 길도 마찬가지다.

길은 도처에 있고, 어떤 길을 가건 자유다.

하지만 그 자유는 스스로가 감당해야 한다.

어떻게,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가?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자연의지로 발생하는 것,

그리고 자유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

사건의 원인은 두 종류로 분류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이고.

, 책임은 인간 개개인이 져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아프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것,

아프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것,

 

누구나 몸이 아픈데, 아프다고 말하지 못할 때가 있다.

왜 아픈지, 무엇 때문에 아픈지를 모른 채

여기저기 아파도 내색도 하지 못하고,

일을 하고, 회의를 하고, 살면서 느끼는 생각,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일까?

 

독일의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는

<비망록>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인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답을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이 인간의 과제다.“

 

나 역시 그렇게 살고자 하면서도

가끔씩은 내가 나를 망각하고,

그 본연의 자세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내가 한 없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는 것이다.

 

삶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매일 되돌이표처럼 생각하는 인간이

나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변함없는 풍경일 것이다.

이틀 동안, 그래도 짐짓 생생하다고 과장하며

돌아다니다가 돌아와 느끼는 감정은 쓸쓸하다.

어디 나만 아플까?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산을 오르고, 산을 내려온

많은 사람들에게 하루 이틀 지나면 그 아픔이 멎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픔은 곧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을

의미한다는 그 사실을 강조하면서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나 속의 너’는 ‘바로 ’나‘다.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나 속의 너바로 .

 

비 내리다, 멎고 또 내리는 날이 가고

다시 한 밤중이다.

문득 꺼내든 시집,

오마르 카이얌이 지은 <루바이야트>.

11세기 페르시아 시인의 지은 이 시를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인 피츠제럴드가 번역하여 펴 낸 뒤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시다.

번호로 매겨진 시 한 편 한 편이

쓸쓸하면서도 감칠맛이 나고,

아프면서도 여운이 남는 시들이다.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나 속의 너’ 34,

그것을 밝혀 볼 등잔을 찾아

두 손 들어 어둠 속을 헤매었으나

밖에서 들려오는 그 한 마디는

너 속의 나를 맹신盲信히라.“

 

행여나 삶의 비결 찾을까 하고,

초라한 술 항아리 입술을 찾네.

입술에 입술 맞대고 속삭이는 술항아리.

마셔라. 살아 생 전, 한 번 가면 못 오리라.“ 35

 

흐르는 세월을 헤아릴 수 있음도,

내 수학적 계산의 덕분이라 하나,

별 것 아닐세, 태어나지 않은 내일과

사라질 어제를 달력에서 만드는 일 뿐이니,“ 57,

 

내세가 어떠한지 지례 짐작 해보려고, 66

볼 수 없는 세계 속에 내 영혼을 보냈더니,

이윽고 돌아온 영혼, 이렇게 답을 했네.

내 자신이 바로 천국이요, 지옥이더라.“

 

그래, 인생이 별 것인가?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구나.

비 내리다가 멎고 다시 내리는 것처럼,

그저 그렇고 그런 세월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만들면서 보내는 하루,

내가 바로 천국이고, 지옥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은 아닐까?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나 속의 너

바로 라는 것을,




자기 천성에 부합하여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자기 천성에 부합하여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신은 있는가? 없는가?

알 수 없다.

우리가 죽어보지 않는 한,

천국이나, 지옥, 아니면 무(없음)이건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인간들은

신에게 더 많은 것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신은 그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 줄까?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더 궁핍에 처하면 처할수록

신들은 우리에게 더욱더 많은 것을 준다.

적나라한 신세로,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자들의

진영에 들고자 원한다...

많이 요구하는 자에게 결핍이 많다.“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는데,

 

살아갈수록,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 나에게 올 것이라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베리길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각자는 스스로 만든 운명에 당한다.”,

 

키케로는 운명주의자와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대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에 위배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법칙이 보장되고 나서는,

자기 천성에 부합하도록 살 일이다.”

 

내 천성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이생을 잘 살고 있는가?

알 수 없지만, 잘 살고자 노력 중이다.

다시 호라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신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오비디우스도 시니컬하게 말했다.

인생의 나머지는 운에 맡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말해야할까?

 

나도





조금만 덜 먹으면 되는데,

조금만 덜 먹으면 되는데,

 

내 삶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음식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맛이 좋고 귀한 음식이라도

조금 먹으면 그때부터 별로 당기지를 않는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 물끄러미 바라보아도

달아난 식욕이 다시 오지 않는 것,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예나 지금이나 어떤 현인이라도 맛있는 음식과

귀한 음식을 보면

그렇다면 옛 사람들은 음식에 대해 어떤 말을 남겼을까?

 

북방 사람들은 비교적 푸짐한 것을 좋아하여

음식이 신선하고 깨끗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남방 사람들은 비교적 정갈한 것을 좋아하여

음식이 신선하고 깨끗한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푸짐한 것을 좋아하다보면

위장에 무리가 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청나라 때 사람인 진영의 글이다.

 

호랑이 밥 먹듯 한다.‘는 말은

식사를 많이 하거나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게걸스레 먹는 것을 표현한 말인데,

요즘 방송 매체를 보면 어느 채널이나

허겁지겁 먹는 풍경을 많이 볼 수가 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고자 했을까?

 

밥은 부드럽게 익혀먹고 고기는 문드러지도록 풀 삶아 먹고,

항상 술을 적게 마시고 매일 밤 혼자 자는 것이,

옛 사람들의 양생養生하는 묘법妙法이었다.

내가 일찍이 이 뜻을 풀어서 좌우座右에 다음과 같이 써 두었다.

부드러운 밥으로 위를 보양하고,

푹 익은 고기는 온 몸을 보양하고,

술은 조금 마심으로써 피를 보양하고,

홀로 잠으로써 정신을 보양한다.

이는 일용日用의 묘법이며 집에서 거처하는 자가

천성天性을 온전히 보존하는 법이다.”

허균이 찬한<성소부부고>에 실려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적게 마시는 것이 온 몸을 보양하는 것이라는 것은

잘 알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나 역시 조금 더 먹고 부대낄 때가 어쩌다 있다.

조금만 덜 먹으면 되는데,

조금만 욕심을 덜 부리면 되는데,

 

조금, 그게 어렵다.





단순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단순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좀 더 단순하게, 단순하게 살자,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나에게 다짐하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단순하지 않게 사는 나,

단순하다는 것이 오히려 복잡한 것보다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더 절실하게 깨닫는다.

 

우리말을 들어야 하는 입장에 자기 스스로를 놓아 보야 하며,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적합한가를 알기 위해,

또 듣는 사람이 납득할 수 있게 되리라는 자신을

가질 수 있나를 알기 위해, 자기 말에 주는 표현법을

자기 마음에도 시험해 봐야 한다.

가능한 한 자연스런 단순 속에 파묻혀야 하는 것이다.”

파스칼의 <마음을 납득시킨다.>라는 글이다.

 

가능한 한 자연스런 단순 속에 파묻혀라.

철학자가 말하는 그게 과연 가능할까?

 

나는 단순한 남자가 되려고 결심한다.”

황동규 시인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것이 결심한다고 될 일일까?

수백, 수천, 수만 번을 결심해도,

실현될 것 같지 않다.

 

노새가 여행을 갔다 왔다고 해서 말이 되는 것을 보았는가?“

오죽했으면 이런 말이 만들어졌을까마는

그래도 결심한다.

좀 더 단순해지자고,

 

이것들이야말로 가장 귀한 보물이다.

행동과 생각이 단순하면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노자의 말로 단순해진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내가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다.

단순함과 인내, 연민의 마음.’

 

세상의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그래서 단순해진다는 것과 참는다는 것,

세상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자꾸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

내 마음은 항상 불안하다.

내 불안한 마음에 R. 키플링이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단순한 것들에 대한 기쁨,

원망의 샘이 없는 환희를 가르쳐 달라.”

 

이렇게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사는 삶을

환희에 차서 살아갈 날이 과연 있을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가?

  

세상의 길은 이렇게 저렇게 펼쳐져 있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 길 앞에서 망설이기도 하지만,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 길을 통과한다.

어떤 사람은 과감하게, 어떤 사람은 떠밀리듯, 가는 길, 그 길이 삶이다.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정직한 노동을 통하지 않고 자신을 향상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직한 노동은 어렵고 대가가 너무 적으며,

아름다움으로 이르는 길이 너무 멀어,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마음과 몸이 분쇄된다면,

누군가가 정당한 길을 버리고 경멸받는 길을 통해,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랐다고 해서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드라이저의 <시스터캐리>에 실린 글이다.

 

그렇다. 삶이 그러하고, 세상이 그러하다,

누가 누구에게 당신의 삶이 그르다.’

돌을 던질 수 있고,

누가 누구에게 거짓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견지하고 명심하면서 가야 할 길이 있다.

 

여러분들은 짐승같이 살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지성을 구하고,

덕을 따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말이다.

 

짐승과 인간의 차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언제나 고뇌하고 실천하면서 사는 참사람이 그립다



누군가에게 편지도 쓰지 않는데도 흐르는 세월,

누군가에게 편지도 쓰지 않는데도 흐르는 세월,

 

나는 문장에 대해 온 천하의 기서奇書를 다 보지 못하였고,

온 천하의 기재奇才를 만나보지 못하였네.

그러나 재주로서 이름이 난 사람은 본디 유약하여 정립이 되지 않아

그의 시와 문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른하여 졸음이 오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네.

기이한 것도 내 이미 보지 못하였지만

괴이한 것 또한 어디에 있겠는가?

심계의 재주야말로 신령하고도 괴이한 것이었네.

나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매양 그 재주를 사랑하여 이렇듯 연모하는 바이니

오직 심계는 양양하게.“

이덕무의 <청장광전서>3에서 조카인 심계에게 보낸 글이다.

 

자기의 조카인 심계라는 사람에게 자기를 낮추면서

문장을 잘하는 조카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쓴 편지에서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편지를 받으니 위로가 되는구려.

문사文辭가 너무 드러난다.’ 는 책망은

나의 병통을 너무 적중시켰네.

그러나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닐세.

비유하자면 마치 나무는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고,

얼굴은 눈썹이 있어야 눈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이는 지연일세.

꽃과 눈썹이 열매와 눈보다 앞서지 않겠는가?

열매를 맺고 눈을 뜨는 것은 다음의 일이니, 아직 기다려주게.

치천稚川이 어제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 나니 마음이 매우 섭섭하구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으나 종아이가 급히 가므로 갖추지 못하네.“

<청장관전서> 15아정유고에 실린 글이다.

 

할 말이 많은 데도 더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덕무의

마음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싶다.

 

이렇듯 마음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는 편지,

그 편지가 이메일로, 카톡으로, 문자로 대체 된지 오래다.

 

마음에 숨겨둔 이야기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나타날 기미도 없고, 그 사이 봄 가고, 여름이 오고,

곧 이어 장마가 찾아오고 불볕이 기세를 떨치는 여름이 오고,

그리고 가을, 겨울이 오겠지.

 

가는 세월 붙잡지 못하고, 그저 보내는 이 세월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는 그냥 추억이 되겠지,

오고 가는 세월 속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되는

그 추억 속으로 어둠이 깊어지다가

곧 새벽이 오겠지.




[[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자.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자.  

냉정한 눈으로 남을 보고 냉정한 귀로 말을 들으며,

냉정한 심정으로 감정을 처리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이치를 생각해야 한다.”

<채근담>에 실린 글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오지랖이 넓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이 유하샤도 아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연민 같은

모질지 못한 마음 때문에 냉정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때가 많다.

그것도 살면서 몸에 배인 습관이거나 품성 탓이다.

<신곡>을 지은 단테는 말했지.

사람들의 관습은 나뭇잎과 같아서,

어떤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생긴다.:” ,

그렇다면 내게서 사라진 습관은 무엇이고,

새롭게 생겨난 것은 무엇인가?

 

선생님이 가끔씩 아픈 것은 화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인의 이 말을 곰곰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다, 내가 화를 내는 가장 큰 것은

진정성이 결여된 사람을 만날 때나

그런 행동을 볼 때다.

내 일도 아닌데,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내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 사람이나 그런 현장을 목격하면

제어할 수 없는 화가 치미는 그것이 어느 새 습관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것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몸에 아픔으로 차곡차곡 쌓여서 내 몸이 아픈 것이다.

서울 갔다가 파주를 거쳐 고양에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내가 나에게 약속을 했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덜 보자. 책을 한 줄이라도 더 보고,

가끔씩 내가 나를 더 돌아보고,

중요한 것은 시정잡배들의 놀음 놀아나지 말자,

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가?

나는 어디 쯤 있고,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가끔 프랭클린의 말을 기억하자.

 

네가 남에게 말할 때는 그의 눈을 보고,

남이 네게 말할 때는 그의 입을 보라.”

 

<회남자>에도 실려 있지 않은가?

사람의 입은 불행과 행복이 드나드는 문턱이다.(人之有口 禍福樞紐),

그렇다면 눈은 무엇일까?

눈은 정신의 창문이다.”

너무 세상에 얽매이지 말고, 내가 나 자신을 찾아서

그 화에서 벗어나자,

너무 늦기 전에,






노래가 길이 되고, 강이 된 그 세월,

노래가 길이 되고, 강이 된 그 세월,

 

오래 전, 너무 오래 전부터 나는

길에서 노래를 불렀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냥, 그렇다. 그냥 불렀고, 불었다.

누가 듣지 않아도 부르던 노래,

누가 청하지 않아도 불던 휘파람,

그 소리 결에 따라서 지나온 세월,

문득 길에서 깨달았네.

그 소리가 세월이 지나간 소리라는 것을.

 

그 노래를 불렀네.

 

노래를 불렀네.

어둠이 내리는 길에서

힘겹게 오른 고개를 휘적휘적 내려가며

강물이 여울져 흐르는 그 길에서

푸른 파도 철썩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철없이 피어난 진달래꽃을 보며

부르던 그 노래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좋은 게 노래지만

누군가 불러 달라고 할 때

쑥스러워 하면서 부르던 노래

 

노래를 불렀네.

그 노래

어느 사이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그 노래가

지금 저렇게 밤하늘의 은하수가 되어

가랑비처럼 내리고 있네.

노래 그리움을 담은 노래,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노래,

모든 것을 잊게 만들고

모든 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노래,

그 노래를 불렀고

지금 저렇게 그 노래 소리 들리네.

심연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단말마의 비명처럼,

그렇게,“

 

언젠가 서툴게 내 보였던

그 노래,

먼 길 돌아와서

다시 들리네.

노래가 길이 되고,

노래가 강이 되어 흐르고 흘렀던 그 세월이

아득한 그리움이라는 것을.




자연의 노래 소리에 취해 변산을 걷다.

자연의 노래 소리에 취해 변산을 걷다.

 

불볕더위 속의 변산,

그 변산을 노래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새가 노래하고, 풀 벌레가 우는 내 변산 초입에 실상사가 있었다.

신라 때의 절이 여러 차례 흥망성쇠를 겪다가

폐사가 되었다가 새롭게 창건된 대웅보전이

햇살이 기울면서 그림자를 남겼고, 나는 난생 처음

땅 위에 그늘 드리운 추녀를 밟으며 그림자놀이를 했다.

행여 떨어질세라 마음을 다 잡고 걷는 추녀 끝이

자꾸만 땅 속으로 들어가던 길,

그 길을 한 번 두 번 세 번 걷고 있을 때

황진이의 스승 서경덕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존재하는 만물은 오고 또 와도 다 오지 못하고,

다 왔는가 하면 또 온다. 오고 또 오는 것은

시작이 없는 것에서부터 오는 것인데 그대에게 묻노니

처음에 어디서부터 오는가? 존재하는 만물은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다 돌아가지 못하며, 다 돌아갔는가 하고 보면

아직 다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계속 해도 돌아감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그대에게 묻나니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그렇다. 화담의 물음처럼 또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가?

그 때 들리던 풍경소리, 아니 노래 소리,

그렇지, 셰익스피어도 말했지.

대지는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만 노래를 들려준다.”,

내가 마냥 어린아이처럼 그림자에 취해 노닐고 있으니,

풍경소리가 나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구나.

 

들을 가도 숲을 가도 나의 노래는 온종일

솟아나듯이 입술에 머문다.“

괴테의 노래와 같던, 물의 노래 소리 사라졌던

변산, 그 산길이 지금도 내 마음 속에 남아

먼 길 마다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 산길,




길을 잃은 다음에야 새로운 길을 찾는다.

길을 잃은 다음에야 새로운 길을 찾는다.

 

오전에는 완주를 거쳐 정읍에 있었고,

오후에는 전북대학교의 강의실에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다른 곳이 아니라

하늘아래다.

나라도, 고장도 그 무엇이 아닌

하늘 아래 땅에서 잠시 살다가 가는 우리,

그 땅에서 새들이 그들의 삶터를 조금씩 옮겨가며 살아가듯,

아니면 작은 곤충이나 땅 속의 두더지들이

그 장소를 옮기는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으면서 옮겨가며 살 듯,

그렇게 이동하고서 다시 돌아오는 그 반복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잠시 앉아 있을 때

푸르른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떠올랐던 시 한편이 지금 내 마음의 행로에 나타나

마치 호롱불에 심지에 불을 지피듯 떠올랐다.

 

가만히 있어라.

네 앞의 나무와 네 뒤의 관목들은 길을 잃지 않았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든 그곳의 이름은 여기이니,

너는 그것을 힘센 이방인 대하듯 해야 하고,

그에게 너를 소개해도 되는지,

네게도 자신에 대해 소개해 줄 수 있는지,

그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숲은 숨을 쉰다. 들어보아라.

숲이 대답하느니. 내가 네 주위에 이곳을 만들어 놓았다.

네가 이곳을 떠나면 너는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 하고,

여기가 말한다. 갈까마귀에게 똑같은 나무는 하나도 없으며,

굴뚝새에게 똑 같은 가지는 하나도 없다.

나무나 관목들이 너를 잃어버리면, 그땐 너는 정말로 길을 잃는다.

가만히 있어라. 숲은 아느니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숲이 너를 찾게 그대로 있어라.“

데이비드 와그너의 <길을 잃으면>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그래, 인생의 긴 노정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내가 나를 잃고, 내가 나를 찾아 헤매고 헤맨 그 세월,

그 세월이 여기저기 꽃인 책갈피 사이에 숨어 있다.

길을 잃었기 때문에,

길을 찾았고 그래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길을 잃기가 싫고,

아니 두렵고, 두렵다.

 

그렇다고 환하게 뚫린 그 길을 가는 것은

나의 본래 심성에는 맞지 않은 일,

가다가 다시 헤매고 다시 길을 찾다가 다시 헤매는

그것이 나의 삶의 길이겠지,

 

지금도 저 멀리 은하수 사이로 보이는 저 길,

저 길은 과연 나의 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