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다른 삶의 형태 속에 당신과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시대마다 지역마다 풍속이 다르고 마찬가지로 삶의 형태도 다르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경건하게 지내야 하늘에서 비를 내려준다고 여겼지만 전남 곡성에서는 동악산의 신선바위에는 그와 정반대로 기우제를 지냈다. 넓이가 30여 쯤 되는 이 신선바위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놀면서 바둑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 바위에서 옛 시절에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산의 기우제는 정성껏 제물을 차려놓고 올리는 기우제가 아니고 특이하게도 신을 성나게 하기 위해 아낙네들이 바위에도 똥이나 오줌을 누고 술을 마시며 뛰고 구르면 신이 더럽고 무엄하다며 화를 내면서 뇌성 번개를 내려쳐서 큰비를 내려주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강도 마찬가지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에서 올리는 기우제가 엄숙하고 정갈하게 치러졌는데, 강을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보았던 나라들도 있었다. 터어키의 이나퀴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강이 범람하는 것을 부당한 것으로 여겨 관에다가 소송을 했다. 그 풍습이 1826년까지 실시되었다고 한다. “서류형식에 맞추어 꾸며지고 서명된 청원장에 의해서, 터어키 인들은 재판관에게, 이나퀴스 강이 경계에서 나와, 그들의 밭을 황폐하게 한다는 것을 진술하고, 그 강이 자신의 지역으로 되돌아가게끔 명령해달라고 탄원한다. 재판관은 그들이 바라는 바대로 판결을 내리고, 그 선고宣告는 그대로 잘 지켜진다. 그러나 만약 물이 불어나게 되면, 그때 재판관은 주민들을 데리고, 문제의 그 장소에 가서 강을 향해 물러가라고 명령한다. 강에는 재판관의 권고장의 사본이 던져지며, 주민들은 강을 침략자나 탈취자로 취급하여 돌을 던지는 것이다 ” 이와 비슷한 관습이 아실 밀리앙의 <그리스와 세르비아의 민요>에도 나타난다. 바다에서 죽은 수부의 아내들이 바닷가에 모여 각자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번갈아 물결 위를 채찍으로 때려라. 아, 거품 이는 물결의 심술 굿은 바다야 우리 서방 어디 갔나? 우리 주인 어디 있나?“ 자연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연을 삶의 대상으로 여겨 잘못이 있으면 따지고 소송까지 마다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그것을 보면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극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무수히 흐른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펼치는 삶과 놀이의 현장을 보면 그 당시와는 너무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골프도, 축구도, 야구도, 아니 IT를 비롯한 여러 가지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고 질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옛 시절에 비해, 너무 당당하다고 할까? 아니면 극성맞다고 해야 할까, 내가 한국인인데도 그 한국인이 겁날 때가 더러 있다. 좀 더 세계인들과 보폭을 줄여서 잘 놀고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잘 놀자. 그리고 잘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