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월의 초입 6월의 초입 차령이 있는 천안과 공주일대를 찾아갑니다. | |
| | | 6월의 초입 차령이 있는 천안과 공주일대를 찾아갑니다. 유월이 예정된 지리산 둘레 길을 후일로 미루고 천안 일대 차령고개와 쌍령 고개, 김옥군 생가와 천안호도의 자생지로 알려진 광덕사와 천암삼거리를 찾아갑니다.
천안삼거리에 얽힌 이야기들이 여럿 있다. 전라도 고부에서 과거를 보러 올라가던 박현수라는 선비가 삼거리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밤이 되어 잠 을 청하는데 어디선가 청아한 가야금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서 가보니 능 소라는 어여쁜 기생이 가야금을 타고 있었다. 하룻밤에 그녀와 백년가약을 맺은 박현수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돌아왔고, 흥이 난 능소는 가야금을 타며 “천안 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아 흥, 제멋에 겨워서 축 늘어졌구나” 하며 흥타령을 읊 조렸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충청도 땅에 유봉서라는 홀아비와 어린 딸이 살고 있었는데, 아비가 변방에 수자리를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어린 능소를 삼거리 주막에 맡기고 가면서 버들가지를 하나 꽂고 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 돌아와 보니 버드나무가 자라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있고 그 아래 아리따운 처녀가 된 능소가 기다리고 있어 부녀는 감격의 상봉을 하였다. 그때부터 ‘능수버들’ 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천안은 또한 호두과자와 성환읍의 명물 성환 개구리참외의 본고장이다. 호두과자는 지금도 원조 싸움이 치열한데, 과자에 들어가는 호두는 대개 광덕면의 광덕산을 중심으로 많이 재배되고 있다. 광덕산이 바람을 막아주고 물이 잘 빠질 뿐만 아니라 골짜기가 깊고 일조량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호두를 재배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의 중신인 유청신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가져온 씨앗을 심으면서부터라고 한다. 성환읍의 개구리참외는 그 껍질이 개구리 등을 닮아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참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들여와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원래 이곳의 특산물이라고도 하여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개구리참외가 나라 안에 이름이 높아 일제강점기에는 비행기로 일본에까지 실어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북 성주의 참외가 온 나라를 제패한 것과 달리 성환의 개구리참외는 그 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편 고추장이 천안의 명물이었던 적도 있었다. 19세기 전반에 이규경이 지은《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고추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히 순창의 고추장과 천안의 고추장이 전국에서 이름났다고 한다. 지금은 천안 고추장은 이름이 없고 오로지 순창 고추장만 명성이 자자하다.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무학리의 쌍령(雙嶺) 고개는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인풍리와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다. 쌍령 고개는 높은 능선에 고개가 두 길로 되어 있으므로 쌍령이라 부르는데, 조선 시대에 공주이남 여러 고을의 조세와 진상품이 모두 경유하여 서울과 아산 공세포로 운송되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쌍령 고개 아래에 있는 안수성은 성안 마을이라고도 부르는데, 사방이 절벽 같고 그 안에 작은 들이 열려 있다. 「안수와 여계」는 조선 선조(宣祖)[1552~1608] 때 의적(義賊) 안수(安壽)가 안수성에 산채를 짓고 봉물을 털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다가 추포되어 참수되고 안수의 아내 여계도 늪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시대 명종 때 안수 남매는 상민의 자녀로 기개가 남다르고 힘이 억셌다. 양반들의 횡포에 맞서다가 달아난 안수의 가족은 지금의 무학리 쌍령 일대에 무리를 모아 주둔하였다. 그리고 쌍령 고개를 지나는 진상품과 조세를 빼앗아 빈민을 구제하여 의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무리가 늘어나고 소란이 커지자 광덕 출신 무관 유의신(柳義臣)에게 추포되어 참형을 받았다. 쌍령 인근의 보산원리 사기소 뒷산의 ‘도적놈 수레길’은 안수가 도적질한 물품을 수레에 싣고 성안으로 오르내린 흔적이라고 한다. 대덕리 여계소(麗桂沼)는 안수의 첩인 여계가 남편이 잡히자 빠져 죽은 소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수가 오줌을 누었던 바위가 크게 패였다는 광덕면 일대에는 지금도 안수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울바우 옆에는 큰 발자국이 있는데, 안수가 오줌을 눈 곳이라고 하여 ‘장수 발자국 바위’, 장수발자국 옆에 있는 바위는 바위가 오줌 자국처럼 패어서 ‘장수 오줌 눈 자국’ 장수 오줌 눈 자국 옆의 길은 산이 위에서 아래까지 패어서 수레자국처럼 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도적 안수가 관곡을 빼앗아서 수레에 실어 거지고 성안에 까지 갔다고 하여 ‘수레 끈 자리(길)’라고 부른다. 비롯하여 그의 발자국이 바위에 찍혔다는 안수의 부하들이 숨어서 신호를 보냈다는 울바위 등이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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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갑니다 . 유월이 예정된 지리산 둘레 길을 후일로 미루고 천안 일대 차령고개와 쌍령 고개, 김옥군 생가와 천안호도의 자생지로 알려진 광덕사와 천암삼거리를 찾아갑니다.
천안삼거리에 얽힌 이야기들이 여럿 있다. 전라도 고부에서 과거를 보러 올라가던 박현수라는 선비가 삼거리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밤이 되어 잠 을 청하는데 어디선가 청아한 가야금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서 가보니 능 소라는 어여쁜 기생이 가야금을 타고 있었다. 하룻밤에 그녀와 백년가약을 맺은 박현수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돌아왔고, 흥이 난 능소는 가야금을 타며 “천안 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아 흥, 제멋에 겨워서 축 늘어졌구나” 하며 흥타령을 읊 조렸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충청도 땅에 유봉서라는 홀아비와 어린 딸이 살고 있었는데, 아비가 변방에 수자리를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어린 능소를 삼거리 주막에 맡기고 가면서 버들가지를 하나 꽂고 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 돌아와 보니 버드나무가 자라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있고 그 아래 아리따운 처녀가 된 능소가 기다리고 있어 부녀는 감격의 상봉을 하였다. 그때부터 ‘능수버들’ 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천안은 또한 호두과자와 성환읍의 명물 성환 개구리참외의 본고장이다. 호두과자는 지금도 원조 싸움이 치열한데, 과자에 들어가는 호두는 대개 광덕면의 광덕산을 중심으로 많이 재배되고 있다. 광덕산이 바람을 막아주고 물이 잘 빠질 뿐만 아니라 골짜기가 깊고 일조량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호두를 재배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의 중신인 유청신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가져온 씨앗을 심으면서부터라고 한다. 성환읍의 개구리참외는 그 껍질이 개구리 등을 닮아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참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들여와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원래 이곳의 특산물이라고도 하여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개구리참외가 나라 안에 이름이 높아 일제강점기에는 비행기로 일본에까지 실어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북 성주의 참외가 온 나라를 제패한 것과 달리 성환의 개구리참외는 그 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편 고추장이 천안의 명물이었던 적도 있었다. 19세기 전반에 이규경이 지은《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고추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히 순창의 고추장과 천안의 고추장이 전국에서 이름났다고 한다. 지금은 천안 고추장은 이름이 없고 오로지 순창 고추장만 명성이 자자하다.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무학리의 쌍령(雙嶺) 고개는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인풍리와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다. 쌍령 고개는 높은 능선에 고개가 두 길로 되어 있으므로 쌍령이라 부르는데, 조선 시대에 공주이남 여러 고을의 조세와 진상품이 모두 경유하여 서울과 아산 공세포로 운송되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쌍령 고개 아래에 있는 안수성은 성안 마을이라고도 부르는데, 사방이 절벽 같고 그 안에 작은 들이 열려 있다. 「안수와 여계」는 조선 선조(宣祖)[1552~1608] 때 의적(義賊) 안수(安壽)가 안수성에 산채를 짓고 봉물을 털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다가 추포되어 참수되고 안수의 아내 여계도 늪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시대 명종 때 안수 남매는 상민의 자녀로 기개가 남다르고 힘이 억셌다. 양반들의 횡포에 맞서다가 달아난 안수의 가족은 지금의 무학리 쌍령 일대에 무리를 모아 주둔하였다. 그리고 쌍령 고개를 지나는 진상품과 조세를 빼앗아 빈민을 구제하여 의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무리가 늘어나고 소란이 커지자 광덕 출신 무관 유의신(柳義臣)에게 추포되어 참형을 받았다. 쌍령 인근의 보산원리 사기소 뒷산의 ‘도적놈 수레길’은 안수가 도적질한 물품을 수레에 싣고 성안으로 오르내린 흔적이라고 한다. 대덕리 여계소(麗桂沼)는 안수의 첩인 여계가 남편이 잡히자 빠져 죽은 소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수가 오줌을 누었던 바위가 크게 패였다는 광덕면 일대에는 지금도 안수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울바우 옆에는 큰 발자국이 있는데, 안수가 오줌을 눈 곳이라고 하여 ‘장수 발자국 바위’, 장수발자국 옆에 있는 바위는 바위가 오줌 자국처럼 패어서 ‘장수 오줌 눈 자국’ 장수 오줌 눈 자국 옆의 길은 산이 위에서 아래까지 패어서 수레자국처럼 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도적 안수가 관곡을 빼앗아서 수레에 실어 거지고 성안에 까지 갔다고 하여 ‘수레 끈 자리(길)’라고 부른다. 비롯하여 그의 발자국이 바위에 찍혔다는 안수의 부하들이 숨어서 신호를 보냈다는 울바위 등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