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영덕의 해파랑 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다.

산중산담 2012. 9. 9. 20:48

영덕의 해파랑 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다.

 

가을의 초입에 그 아름다운 영덕 불루로드길과 울진 십이령을 찾아갑니다. 동해 해파랑 길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영덕의 해변길, 그리고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 울진 십이령즉 열두 고개 길은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입니다.

특히 소나무가 아름다운 소광리는 눈부신 조선 소나무를 실컷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런 궁벽한 곳까지 광대들이 자주 찾아들었을까. 광대에 얽힌 지명도 많이 남아 있다. 광대가 줄을 타고 재주를 부렸다는 강대줄탄모기 고개, 광대들이 가무를 즐기며 놀았다는 깨뭇개가 있다. 한가하게 물살에 흔들리는 노물항을 지나 다시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기란 힘이 들다. 그것이 물리적인 고개만이 아니라 나이 고개도 또한 그렇다. 서른 고개, 마흔 고개, 오십 고개, 그 고개를 넘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어느 새 숨이 가쁘다. 내 그림자도 숨이 차고 힘이 드는지 구부정하다.

돌이 많아 석리石里라고 이름 지은 석동리 예진芮津마을을 지나며 영덕읍에서 축산면으로 접어든다. 바다를 따라 이어진 바닷가길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하얀 모래밭, 형형색색의 자갈들로 채워진 경정 3리 바닷가 길은 한적하면서도 아름답다.

경정마을에 도착하여 점심으로 매운탕을 먹으며 맥주 한 잔을 곁들인다. 더위에 지쳐서인지 맥주가 마치 구세주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낮술은 취기가 금세 오른다. 취중 걸음이라… 취한 상태에서 걷는 바닷길, 포장도로지만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그리 많이 걷지 않았는데 대게 원조 차유마을이라는 경정 2리에 이른다. <어서 오십시오. 3월의 아름다운 어촌 경정 2리. 해양수산부> 팻말을 바라보며 바다로 향한 길을 내려가자 바다를 바라보고 지어진 정자 근처에 영덕대게 탑이 세워져있다.

 

영덕 대게

영덕 대게는 다리가 대통처럼 길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1960년대만 해도 강구항에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로 잡혔었다. 하지만 마구잡이식으로 포획을 한 결과 한 때는 한 마리에 몇 십 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진귀한 특산물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부족해진 수효를 채우기 위해 러시아 지역에서 잡힌 대게들이 영덕으로 몰려들고 있다.

영덕 대게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게의 크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맛이 뛰어나기 때문인데, 껍질이 얇고 다리 살이 담백하면서 쫄깃하고 독특한 향마저 띠고 있어 뒷맛도 매우 개운하다. 특히 겨울에서 초봄까지 잡힌 대게가 살이 더 많고 맛이 좋다고 하며, 특히 음력 보름날 가까이에 잡힌 것보다 그믐 때에 잡힌 것이 더 살이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달이 밝으면 게가 제 그림자에 놀라 몸이 마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방어. 대구어. 홍어. 청어. 문어. 송어. 광어. 연어. 자해(대게). 고등어. 홍합. 복. 해의(김). 곽(미역. 세모(참가사리)등이 이 지역에서 많이 잡히던 어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종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산출되고 있다.

 

소 형상을 하고 있는 축산

경정 2리에서 아랫염장을 지나 말미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바닷가 길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한 기암괴석이 바다를 향해 돌출되어 있고, 수십여 년 동안 군부대 초소 길로만 사용되어 훼손되지 않은 자연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나라가 분단 된 이래 수많은 장병들이 청춘의 시절을 보냈을 초소 아래 돌계단에 나란히 앉아 먼 산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작은 모래사장에 앉아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며 걷다보니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마주하는 듯, 그렇게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축산도丑山島를 만난다.

생김새가 마치 소와 같아서 축산이라고 부르는 섬, 그 남쪽으로 높은 봉우리는 마치 말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마산馬山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전함이 정박했던 축산포영은 영해부 동쪽 14리에 있었고, 수군만호 1명을 두었던 곳이다.“ 신정일의 <동해 바닷가 길을 걷다.> 중에서

 

 

“울진군 북면 두천 1리는 울진중에서도 가장 궁벽 진 산골이다.

민가 몇 채가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이곳 두천 1리는 열두재를 지나 소천 거쳐 서울로 가던 중요한 길목이라서 서울 나들이길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선질꾼들은 이곳 십이령을 대개 사흘 만에 넘어 소천에 도착했는데, 그들의 출발이 울진이나 흥부에서 출발할지라도 이곳 두천리를 경과하지 않고는 바릿재를 지나서 가는 십이령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연유로 선질꾼들이 한창 많았을 때는 50여명의 행상들이 몰려들어 주막과 마방으로 흥청거렸다.

 

마을 동쪽을 흐르는 외두천 건너에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문화재 자료 제 310호인 이 비는 1890 년 경에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면서 어염해조류를 물물교환하며 상행위를 하던 선질꾼들이 세운 비다. 당시 봉화 내성에 살고 있던 그들의 최고 지위격인 접장인 봉화사람인 정한조鄭韓祚와 반수班首인 안동출신 권재만權在萬이 그들의을 도와준데 대해 그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영세불망비라서 이 비를 이 지역 사람들은 ‘선질꾼비’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이 비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철비鐵碑로 만들었는데 일제의 철재동원령 때에는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해방 이후 골기와로 비각을 세웠다. 그 뒤 1965년 경에 대구에 살고 있다는 후손이 찾아와 양기와로 비각을 보수하였다.

 

무쇠로 주조된 이 비는 2기로, 1기는 부러진 것을 이어 세웠다. 선질꾼들은 2.7장인 울진장과 3.8장인 흥부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 건어물, 미역 등을 구매하여 쪽지게에 지고 ‘열두재’라고도 부르는 12 령嶺을 넘었는데 울진에서 봉화까지 대략 그 길이가 1백 3십리 길이었다. 선질꾼들은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있는 인가에서 머물면서 지게에 지고 가던 솥단지로 밥을 지어먹고 가기도 했다. (...)

이 샛재는 한나무정이 서쪽에서 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마루가 넓다고 한다.그 다음 고개가 큰 넓재다. 꼬채비재는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자마리에서 울진군 서면 광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은 곳에서 낮게 날아가는 형국이라고 한다.

 

멧재를 지나고 낙동강 변의 배나들나루가 있는 배나들재를 넘으면 마지막 고개인 노릇재가에 이르고 그 고개가 열두 고개의 마지막 고개였다.

선질꾼들은 그 무거운 등짐을 지고서 사흘쯤을 뻑 세게 걸어 봉화장으로 가 그 주위에 있는 내성장, 춘양장, 법전장, 장동장, 재산장에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 포목 등을 그들이 가진 것과 교환하여 되돌아왔다고 한다. 다시 되돌아오는 데에는 대체로 열흘이 걸렸다고 한다.

 

십이령 들목인 두천리가 번성했을 때는 5.6십 명의 행상들이 몰려들어 주막과 마방이 흥청댔다고 한다. 울진에서 봉화까지 130리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어쩌다가 눈에 띄는 민가에서 머물면서 지게에 지고 가던 솥단지를 가지고 밥을 해먹고 가야 했는데, 그 때 선질꾼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부르던 노랫말이 <십이령 바지게꾼 노래>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한 평생을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 구나,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 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대마 담배 곡물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 평생에 내 지겐가,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 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나.“

 

선질꾼이나 마상은 다른 지역의 보부상들과 같이 완전한 조직을 갖춘 단체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지역 출신들이 한 곳에 모여서 무리를 지어 출발했다가 무리를 지어 돌아왔던 것이 보부상 즉 선질꾼들의 생활이었다.(...)

소조동과 광천동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인 울진군 서면 소광리召光里이다. 이곳에 나라 안의 이름난 소나무 군락지가 있다. 소광리 소나무 숲, 그 주인공은 바로 금강송이다. 나무 줄기가 붉어서 ‘적송(赤松)’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로 내륙 지방에서 자란다고 ‘육송(陸松)’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여송(女松)’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로부터 나라에서는 왕실 또는 귀족들의 관재로 삼기 위해서 소나무숲을 보호했었다. 굵게 자라서 안쪽의 심재가 황장색을 띈 고급재로 관재棺材로서 유용한 것을 황장목黃腸木이라고 하였다. 1420년 예조禮曹에서 “천자와 제후의 곽槨은 반드시 황장으로 만들며, 황장이란 송심松心이며, 그 황심黃心은 단단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아니합니다.” 백변白邊은 수습에 견디지 못하고 속이 썩습니다.“고 보고 한 것을 보면 소나무의 심재가 관재로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사명당 유정은 소나무를 주제로 청송사靑松辭라는 시를 지었다.

 

“소나무 푸르구나. 초목의 군자로다. 눈서리 이겨내고 비오고 이슬 내린다 해도 웃음을 t숨긴다.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변함이 없구나. 겨울 여름 항상 푸르구나. 소나무에 달이 오르면 잎 사이로 금모래를 체질하고 바람 불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이곳 소나무 숲에 500년 된 소나무가 있다. 조선 성종 때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강산이 50번을 바뀌었는데도 그 푸르디 푸른 솔잎과 그 붉음 자태를 자랑하며 서 있는 금강송 아래에서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작고 가녀린가?

신정일의 <걷고 싶은 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