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김천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2. 9. 9. 20:59

김천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9월 두 번 째 주에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에 속하는 김천 청암사와 신비한 기운이 가득 서린 수도암을 찾아갑니다.

토요일에는 영동의 황간변에 자리잡은 초강일대를 걷습니다, 가학루와 월류봉 일대의 초강을 걷고, 오후에는 그 이름이 드높았던 추풍령을 넘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일요일. 김천에 자리 잡은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이르는 길과 갈항사터 일대를 걸을 예정입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그윽한 곳에 자리 잡은 청암사와 길지吉地중의 길지인 수도암과 추풍령 일대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구름도 자고 가며 바람은 쉬어 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이라는 노랫말에 나오는 추풍령 못미쳐 위치한 황간은 경부선 철도와 경부 고속도로가 나란히 지나는 곳이다. 경상도 일대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옥천의 적등진 나루는 건너가기 전 숨을 고르던 곳이고 추풍령을 넘어가지 전에 나그네들이 하룻밤 유숙하며 쉬어갔던 황간은 골은 깊지만 교통의 요충지였다. 본래 신라의 소하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인 황간으로 고쳐졌으며 고려 때에는 경상도 상주 땅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뒤 조선 태종 때에 이르러서 충청도 땅으로 되돌아왔고 옥천군 청산면을 합하면서 황천현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일제의 부군 통폐합 당시에 영동군이 통합되면서 면이 되고 말았다.

 

황간의 초강 변에서 밤을 지새고 아침 안개를 보리라던 기대는 기대로만 끝나고 매곡면 수원리의 모텔에 여장을 푼다. 길손들의 잘 곳이 어디 정한 곳이 있는가. 아침은 안개와 함께 다시 열린다. 내린 눈이 얼지 않고 천천히 녹는 아침녘 매곡면 수원리 모른대(수동) 마을 길가의 당산나무에는 노랗고 하얗고 파란 천들이 일곱 개가 늘어뜨려져 있고 그 안에는 검으스레한 돌맹이들이 예닐곱개씩 담겨져 있으며 그 앞에는 시멘트로 만든 도깨비들이 둥근 통을 두르고 있다. 하룻밤을 묻은 식당 주인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서 정월대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는 제주는 며칠동안 부정한 일을 안해야 한다는데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버리고 나이드신 분들만 남아있으니 대보름놀이가 잘 치루어지기나 하는지

 

한편 이곳 영동은 바람이 많기로 소문난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능선이 낮아지며 골짜기들을 만들고 있어서 그 골짜기로 바람이 몰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너무 늦기 전에 나는 수도산의 청암사靑巖寺 와 수도암修道巖을 만나기 위해 여정을 꾸렸지만 그것 역시 사람의 일이라 예정과는 다르다. 단풍이 고운 수도산에서 가야산 자락을 보리라 마음먹었었는데 이미 단풍은 지고 만 뒤라 단풍의 잔해만을 보고 올 듯싶지만 어쩌겠는가. 그 역시 우리 생의 단 한번뿐인 만남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며 무주 설천리 나제통문을 넘어 경상북도 땅에 접어들었다.

대덕 지나 가리재를 넘어 평촌리에 도착한 것은 10시쯤이었다. 평촌리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청암사가는 길과 수도암 가는 길 우리들은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청암사 가는 길을 택한다.

곧바로 절 입구까지 가고자 했던 우리들의 생각은 입산통제라고 쓰여 진 표지판에 주저하게 되고 결국은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날은 차다. 배낭을 꾸리고 입고 온 옷들을 모두 다 껴입는데 그런데 내가 가자고 해서 함께 온 권은정씨는 가을 옷차림새에 신까지 불편한 신발이다.

어쩔 수 없지 내 신발을 빌려줄 수도 없으니..... 청암사 가는 길은 소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참나무 숲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떨어진 나뭇잎들은 저희들끼리 외롭다.

 

불영산 청암사라고 쓰여진 일주문을 지닌다. 1686년 가을 청암사에 왔던 우담 정시한(愚潭 丁時翰, 1635~1707)은 이 절에서 한 편의 일기를 썼다.

 

“저녁을 들고 나서 혜원․승헌 노스님 그리고 효선스님과 함께 쌍계사로 걸어 내려오노라니 양쪽 골짜기 사이로 계곡을 따라 붉게 물든 나뭇잎과 푸른 소나무가 길을 에워싸고 물은 쟁쟁거리며 음악을 들려준다. 고승 두어 분과 소매를 나란히 해 천천히 걸으며 걸음마다 (경치를)즐기니 사뭇 흥취가 깊다”

 

정시한의 일기 속에서 나오는 쌍계사는 그 당시 청암사를 거느렸던 본사였으나 지금은 증산 면사무소 뒤편에 주춧돌 몇 개와 연꽃 두어 송이를 조각한 비례석만 남은 폐사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나뭇잎 밟는 발자국 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천왕문이 보이고 그 우측에 회당비각과 대운당大雲堂 비각 및 청암사 사적비가 서있다. 화엄학으로 이름을 날렸던 회암 정혜스님의 비각은 영조 때 우의정을 지냈던 귀록歸鹿조현명趙顯命이 지었으며 대운당 비각은 청암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직자사의 말사인 청암사는 858년(헌양왕 2) 도선국사가 창건하였고 혜철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조선중기에 의룡율사가 중창하였고 1647년에 화재로 불타버리자 벽암스님이 허정을 내어 중건하였으며 1782년(정조 6)에 다시 불타자 환우와 대운스님이 20여 년이 지난 후에 중건하였다.

그 뒤 189년 중에 폐사가 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과 화재를 거듭한 후에 1912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고 남아있는 절 건물은 대웅전, 육화전, 진영각, 전법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개울 건너에 극락암과 부속암자로는 수도암이 있다.

 

천왕상이 곱게 그려진 천왕문을 지나면 다리가 나타나고 그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에 형형색색의 단풍잎들이 떨어져 흘러간다.

물은 저리도 맑고 그 흐르는 소리 또한 옥구슬을 굴리는 듯 청아한데 문득 고개를 들면 바위벽마다 새겨진 이름들 속에 최송설당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 절 청암사와 관련이 많은 사람이자 최송설당은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다. 그는 영친왕의 생모였던 엄비와 고종의 비호 아래 수많은 재산을 모았고 대운스님과의 인연으로 두 번에 걸쳐 절을 크게 중수할 수 있었다.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어서 100여 명의 스님이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는 청암사에 도착했을 때에는 제를 올리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대웅전 앞마당까지 서있었다.

우물가에는 한 스님이 무말랭이를 널고 있었고 극락암 쪽에서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두 스님이 부지런히 대웅전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삼층석탑 뒤편에 서있는 이 청암사 대웅전에는 협시보살도 없이 부처님 한분이 앉아있는데 이 불상은 1912년 불사를 끝낸 대운스님이 중국 강소성 창주에서 만들어 온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스님들의 소맷자락 스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수도암 가는 길로 접어드는데 아뿔싸 이 길 역시 ‘입산금지入山禁止’라고 쓰여 져 있다. 어떻게 산 아랫길로 해서 돌아갈 수도 없고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입산금지란 표지판을 거꾸로 읽으면 지금 산에 들어가라는 말일 테지 그리고 그 먼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다가 수도산의 비경들이 숨어있는 이 골짜기를 오르지 않는다면 수도산에 깃들여 있는 신령들이 얼마나 서운해 할까.? 물론 수도암 가는 길이 이 산길로 가는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왔던 길을 내려가 장뜰 마을에서부터 20여리를 오르고 또 오르면 수도암이 나타날 것이고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 길인지 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수도산 자락의 품안에 안겨서 사람들의 자취가 사라진 길을 걷는 즐거움 또한 또 다른 아름다움이 아닐까?(...)

 

이런 자연의 경치에 취해서 이태백李太白은 “청풍명월은 한 푼이라도 돈을 들여 사는 것이 아니다 淸風明月不用一錢買“라고 하였고 소동파蘇東坡는 <적벽부赤壁賦>에서 “저 강위(江上)의 맑은 바람과 산골짜기(山間)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듣노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노니 빛이 되도다. 갖자 해도 금할 사람이 없고 쓰자 해도 다할 날이 없으니 이것은 조물造物의 무진장無盡藏이다“ 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가 하나의 우주宇宙이므로 세상이 그의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여기면서도 그 세상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진정으로 가기의 것으로 여기며 즐길 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바람에 나무들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으로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람에 쓸려간다. 우리들 역시 그 바람에 흔들리고 흔들리는 그 흔들림으로 믿음이나 사랑이 깊어지는 것이 아닌지.

떨어진 나뭇잎들은 움푹 패 인 길을 절반을 넘게 덮고 우리들은 그 위에 앉았다가 몸을 누인다. 나는 일행들에게 그 나뭇잎 위에 누워보라고 말 한 뒤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들을 이불처럼 덮어준다. 바스락거리며 따스하게 온몸을 데워주는 나뭇잎들의 경이도 경이지만 헐벗은 겨울나무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들은 얼마나 가슴을 저미는지, 나뭇잎이 쌓인 길은 어쩌면 푹 쌓인 눈발은 헤쳐 가는 것처럼 팍팍하다.

 

그 팍팍한 길을 걷느라 지친 길벗이 내게 묻는다. “수도암이 어데 있나요” 나는 “수도암이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몰라요, 수도암이 어데 있기나 한가요?” 사그락 사그락 밟히는 낙엽 밟은 발자국 소리에 내 마음은 이다지도 흔들리고 수도암 가는 길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날은 전형적인 초겨울 날씨답게 구름이 잔뜩 끼어 우중충하고 어쩌다 잠시 비추이는 겨울 햇살은 그다지 따뜻하지 않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걸까? 끝없는 길이 끝에 다다르는 시간은 언제쯤일까. 생각하는 사이에 능선에 다다르고 그곳에는 철조망이 처져있다.

 

“이곳은 금년 11월 1일부터 내년 4월 1일까지 출입을 통제합니다.” 여기 까지가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길이고, 여기서부터는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래 가지 말라는 길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사람이 발길이 끊어진 길에는 멧돼지들의 발자국 소리나 산 꿩들의 푸드득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이 길처럼 반질반질한 등산로 길에는 오직 휴지며 캔 맥주병 등 사람의 흔적들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능선에 올라서자 바람은 더욱 드세다. “수도암 너 어디에 있느냐” 마음속으로 물으며 오르는 능선 길에는 서릿발이 어려 있다. 아직 겨울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수도산에서 먼저 만나고 말았구나. 그 서릿발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모닥불이 그리워지고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지고 그 무엇보다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그리워진다. 항상 만나도 가슴이 훈훈해 지는 사람들이 옆에 있는데도 다시 또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것은 이 무슨 심사일까? 그래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라는 말이 있는 것일까?

 

두 개의 봉우리를 넘어서자 드디어 산 바로 아랫자락에 수도암 가는 길이 나타난다. 잠시 우리들은 고민한다. 지금은 점심시간인데 수도산 정상을 향해 올라갈까? 아니면 돌아갈까?

옛말에 “짐이 무겁고 길이 멀면 땅을 가리지 않고 쉬며,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면 녹봉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한다.” 고 하였는데, 언제 닿을지 모르는 이 산 정상을 꼭 가야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장교완 선생이 그냥 올라갔다가 오자고 말한다. 그래 언제 다시 이 산에 오르겠는가. “바로 지금이지 다른 시절은 없다”고 임제 선사는 말하지 않았는가?(중략)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따끈따끈한 밥상을 기다리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기다리고 그 기다리는 기다림 사이로 목탁소리 들린다. 수도암이 겨울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고 ‘수도산 삼봉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을 지나며 수도암에 접어든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국사가 청암사를 창건한 후 수도처를 찾아 수도산 내를 헤매다가 지금의 이 절터를 발견하고 어찌나 마음이 흡족하였던지 칠일 밤낮 동안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전해진다. 그럴 것이다. 명산 중에서도 절이 있는 산은 좋은 산이고 절이 있는 곳이 가장 좋은 터라고 옛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던가. 그 때나 지금이나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이 수도암을 우담 정시한은 이렇게 평했다.

 

“산세를 두루 살펴보니 사방이 빈틈이 없는데다 지세는 높고도 넓다. 또 절터는 평탄하고 바른 것이 마치 가야산으로 책상을 삼은듯하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흰 구름이 왔다 갔다 하여 무궁한 느낌을 주는데,

앞문을 열어 젖혀놓고 종일토록 바라보니 의미가 무궁한 것이 실로 절경이었다. 더 머무르고 싶으나 가야할 길이 있으므로 그렇게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조차 하다.“

 

수도암 터는 풍수지리상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즉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이라 한단다. 이때 멀리 보이는 가야산 상봉은 실을 거는 끌게 돌이 되고, 뜰 앞의 동서 양 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 되며, 대적광전 불상이 놓인 자리는 옥녀가 앉아서 베를 짜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 수도암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한국전쟁 때 공비소탕이라는 이름으로 불타버렸던 것을 최근에야 크게 중창하였다.

절 건물로는 대적광전과 약광전, 나한전, 법전 등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보물 제 296호로 지정된 약광전 석불좌상과 보물 제 297호인삼층석탑 2기 그리고 보물 제 307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남아있다.

약광전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약광전 석불좌상은 적막강산 속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계시고 나는 그 아래 무릎 꿇고 앉는다. 약광전의 석불좌상은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오산「약사암 중수기」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지리산에 세분의 석불이 있어 3형제 부처라 부른다. 그 하나는 금오산 약사암에 모시고 또 하나는 직지사 삼성암에 모시고 다른 하나는 이곳에 모셨다”이 불상의 머리 부분에는 보관을 장식했던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약광보살의 머리에 금속관을 설치했던 것으로 흔하지 않은 예이다.

 

약광전을 나서자 바람이 불고 절 마당에는 떨어지는 나뭇잎들로 스산하기만 했다. 대적광전에는 스님의 독경소리, 목탁소리가 흘러나오고 문 앞 댓돌 밑에는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대적광전은 낮은 축대와 짧은 기둥 때문에 지붕에 눌린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내소사 대웅보전 문살만큼은 아닐지라도 아름다운 문살 때문에 보는 이들의 마음을 진한 감동으로 몰아가게 한다. 문을 열자 대적광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 대적광전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청량사의 석조불상이나 전국 송광사 대웅전의 불상만큼이나 그 크기로 사람을 압도하는 석조비로자나불상이 가야산 자락을 바라보듯 정 중앙에 앉아있었다. 나는 조용히 합장하고 가만히 앉았다.(중략)

 

나는 대적광전 앞 문살 앞에 서서 가야산을 건너다본다. 그 풋풋했던 푸르름도 그 화려했던 단풍의 향연도 끝낸 가야산은 겨울의 초입에서 그렇게 서있었다. 어쩌면 겨울이라 더욱 더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지만 해인사를 품에 안은 육중한 가야산이 그 오랜 기다림으로 한 송이 연꽃을 피워 올리는 듯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수도암에서 보면 가야산 상봉은 계절마다 다른 빛깔의 연꽃을 피운다고 한다. 푸르름이 온 산을 뒤엎는 봄에는 황련을 피우고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푸른 연꽃을 피우며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에는 홍련을 피우고 그리고 눈 내리는 겨울에는 하얀 백련을 피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