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임진년 만추에 만나는 제주도

산중산담 2012. 9. 11. 00:37

임진년 만추에 만나는 제주도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임진년(2012) 11월(11월 8일(목)에서 11일(일요일까지)에 제주를 갑니다. 원래 2005년부터 실시해온 <길 문화 축제>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한 달 앞당겨 지는 바람에 만추晩秋에 제주도를 답사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제주의 억새가 하얗게 나풀거리고, 노란 감귤이 올래(올레) 길과 돌담을 수놓는 계절에 제주의 길과 제주의 역사를 만날 분들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에 대하고

“한라산 북쪽은 제주읍이다. 이곳은 옛 탐라국으로 신라 때 부속국이 되었다. 원나라에서 방성에 해당하는 지역이라 하여 말과 소를 놓아 먹여서 목장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좋은 말이 생산된다.

제주읍 동쪽과 서쪽에 있는 정의旌義․대정大靜 두 고을은 풍속이 제주와 대략 비슷하다. 목사와 두 고을 수령이 예부터 본토에서 왕래하였으나 풍파에 표류하거나 빠져 죽은 일이 없고, 또 조정에 벼슬하던 사람이 여기에 많이 귀양 왔으나 역시 풍파에 떠밀리거나 빠진 일이 없었다. 이것은 왕의 덕화德化가 멀리 미쳐서 온갖 신이 받들어 순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산수山水’편에 실린 제주도에 관한 글이다. 한 시절 전만 해도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의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백두산을 한 본 보기를 소원했다. 그와 반대로 육지 사람들은 아열대 식물이 자라는 한반도의 남쪽 바다 건너에 있는 제주도를 보고자 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올 수도 있고 돌아갈 수도 있는 제주도를 두고 사람들은 여러 이름으로 부르며 그리워한다.

 

‘낙원의 섬,’ ‘하늘의 축복을 받은 섬’ ‘휴양지,’ 누구나 가보고 싶고, 살아보고 싶은 그리움의 섬‘이 제주도라고,

그러나 역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눈물과 한숨이 없이는 가까이 할 수 없는 한 많은 땅이 제주도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쁨은 모래알처럼 작았고, 시련은 바위처럼 컸다”라는 말로 제주도를 비유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리 제주도와 관계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제주도 바다의 역사를 다 읽었다면 그 역사를 ‘제주의 눈물, 눈물, 눈물’이라고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제주 해협의 바다는 곧 제주 사람들이 역사에 바친 눈물의 양으로 출렁거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제주가 고향인 고득종高得宗은 제주의 형승을 <홍화각기弘化閣記>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에 대하였다. 집집마다 귤과 유자요 곳곳마다 준마로다.”

제주는 멀리 남해 가운데에 있으며, 큰 산이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한라漢拏라고 부른다. 한라산은 은하수를 붙잡을 수 있다 하여 붙여졌다. 다른 이름으로는 원산圓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생김새가 활 모양으로 굽어져서 둥글기 때문이다.

 

제주는 조선 태종 16년인 1416년에 세 고을로 나누어졌다. 동쪽을 정의라 하고 서쪽을 대정이라고 하여 나누어 다스렸다. 옛날에는 동영주. 탁라. 또는 탐라라고도 불렀으며, 시대에 따라 바꿔 부른 것이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정이오鄭以吾는 그의 서序에서 “본토에서 탐라를 바라보면 큰 바다 아득하고 먼 가운데에 따로 한 구역이 되어 부속국과 같다.” 고 하였다. 고려 의종 13년에 제주도의 안무사按撫使로 근무했던 조동희趙冬曦는 조정에 들어가서, “탐라는 험하고 치고 사우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동문감東文鑑>에 “남해 가운데에 있어 물길로 무려 백리나 되고 그 가운데가 대단히 넓다.”고 하였던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우리나라의 가장 먼 곳의 행정구역 제주

한반도의 최남단, 즉 바다 건너 가장 먼 지역에 있는 제주도는 우도를 비롯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그리고 가파도를 포함한 5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우도를 포함하여 몇 개 뿐이다.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가 제주도의 가장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가 최남단이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차귀도가 가장 서쪽이고, 동쪽은 제주시 우도면 연평리가 가장 동쪽이다.

 

목포에서 141.6㎞ 떨어져 있으며, 부산에서는 286.5㎞ 떨어져 있고,일본의 대마도에서는 255.1㎞쯤 떨어져 있다.

제주도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 Jeju Special Self-Governing Province로 관리되고 있고,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포함하여 2시. 7읍 5면 31동으로 되어 있으며, 총 면적은 1848.4㎢이다.

 

주호인이 살았던 제주도

어느 곳에서건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그 아래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고 한라산을 볼 수 있는 곳이 제주도인데, 이곳 제주도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까?

가장 앞 선 기록이 <삼국사기>중 ‘백제 본기’ 중 서기 476년 4월의 일이다.

“탐라국이 특산물을 바쳤으므로 임금이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이다.

<삼국지>와 <위지>그리고 <후한서>와 <동이전>등의 고문들에는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호족‘이라고 실려 있다. 육조 시대에 범엽이 지은 <후한서>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자.

 

“마한馬韓 서해의 큰 섬에 주호족이 있는데, 그 인종은 몸집이 작고 언어는 한족과 같지 않으며 머리를 짧게 깎아 선비족과 비슷하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있는데,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배를 타고 한나라와 왕래하며 교역한다.”

그런 주호족을 두고 일부에서는 도서 족 계통, 즉 일본의 원주민이이었던 고루보그족이나 아이누족으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일본 열도 전역에서 살았던 종족으로 체구는 작고 옷도 상의만 입었고 하의는 입지 않고 생활했으며 사냥과 고기잡이를 주업主業으로 삼았던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제주도에 터를 잡고 살았던 제주도 사람들은 1세기쯤에 있었던 한라산의 화산폭발로 멸망하고 말았다. 그들이 살았던 제주도는 제주 신화의 주인공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제주의 신화가 시작되다.

원래 탐라국(耽羅國) 또는 탁라(乇羅)라고 불렸던 제주도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에 따르면, 제주의 역사는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라는 세 을나(乙那)에 의하여 시작된다. 제주의 시조가 되는 세 을나가 독특하게도 제주 1동에 자리 잡은 삼성혈(三姓穴)의 모흥혈毛興穴이라고 부르는 세 구멍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가야나 신라․고조선․부여 등의 다른 나라 시조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알에서 태어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시조가 한 사람도 아니고 셋인 점도 다르다.

 

“당초 세 사람은 바로 신인이었는데

서로 짝 지어 해 뜨는 동쪽에 와서 살았네.

오래도록 세 성씨만 서로 혼인을 한다더니

듣건대 그 남아 전하는 풍습 주진朱陳과 비슷하구나.“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점필재 김종직의 시이다.

 

그런 연유로 의병장 고종후高從厚가 의병을 모집하면서 세 성씨가 모두 같은 후손임을 언급한 글이 유성룡이 지은 <난중잡록>에 실려 있다.

 

“제주. 정의. 대정. 3 고을. 고성. 양성. 부성. 43가문호의 모든 어른들에게 고하나이다. 옛적 태고 때에 인물이 생기던 시초에 하늘이 3신을 한라산 밑에 내려 보내시니, 고씨. 양씨. 부씨라. 또 아름다운 여인과 망아지. 송아지의 종자를 함께 주어 한 지방에 터를 여는 조상이 되어 이제에 이르러 인구의 번성함과 말(馬)을 길러냄이 대개 3 신인의 덕택이 아닌가 하옵니다. 그 후세에 자손이 혹은 바다에 떠서 이리저리 여러 곳에 흩어져 사니, 세상에서 이른바 제주 고씨, 제주 양씨는 모두 그 후손입니다.”

 

삼성혈에서 솟아난 세 을나는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고 나물을 캐서 먹으며 이동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배를 타고 온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각자의 배필로 맞아들였으며, 그들이 가져온 오곡종자와 송아지․망아지 등 육축으로 농경생활을 했다다.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혼인지(婚姻池)는 세 을나가 벽랑국의 공주들과 혼례를 올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농업과 목축업을 시작한 뒤 점차 제 몫의 땅이 필요해진 세 을나는 각자 자기가 살아갈 터전을 결정하는 데 화살을 이용했다.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세 을나가 쏜 화살은 각각 일도․이도․삼도에 떨어졌고, 일도․이도․삼도동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세 을나가 활을 쏘았던 장소가 바로 제주시 봉개동과 아라동에 걸쳐 있는 제주도 말로 쌀손장오리(射矢長兀岳 사시장올악)라고 하며, 세 을나가 쏜 화살이 박힌 돌을 모아둔 곳이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삼사석(三射石)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제주 시조의 탄생 이후 바다를 통하여 발달된 외래문화가 유입되었고 비로소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 때까지가 제주도의 신화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제주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백제 문주왕 2년(476)에 탐라국이 백제에 토산물을 바치자 벼슬을 주었고, 동성왕 20년(498)에는 탐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왕이 친히 정벌하기 위해 지금의 광주에까지 이르자 탐라국의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사죄하였으며,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 문무왕 2년에 탐라국의 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독립국이었던 탐라국이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신라의 속국이 된 탐라국

 

탐라耽羅로 표기 된 제주가 <당회요唐會要> 권 100 ‘탐라국耽羅國‘에 다시 등장한다.

“탐라는 신라의 무주 바다 위에 있다. 섬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였다. 북쪽 백제와 배를 타고 5일에 갈 만한 거리이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이고, 이름은 도라인데, 성황은 없고, 다섯 마을로 나뉘어 있다. 그들의 집은 동굴에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혔다. 호구는 8천 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무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의 지배아래 있었고, 용삭 원년(661년) 8월에 조공 사신들이 당나라에 이르렀다.” 고 실려 있다. 그 뒤로 별 다른 기록이 전해지지 않다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숙종 10년에는 탐라군으로 바뀌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제주도) 중에서

 

대략 일정

11월 8(목요일)일 오전 8시 관덕정 앞 집결, 제주 관아 답사, 오후 제주 올레 18코스를 걷고

11월 9일(금요일) 여름 걷기학교에 오셨던 송장환선생님의 안내로 신평곶자왈에서 무릉곶자왈코스를 걸을 예정입니다.

11월 10일(토요일)은 날이 맑으면 한라산을 오르고 그렇지 않으면 사려니 숲길을 길게 걷거나 한라산 부군을 걸을 예정입니다.

11월 11일(일요일)은 아름다운 제주 올레 중 서쪽 서귀포에서 모슬포, 그리고 한림일대와 역사유적을 돌아보고 해산 할 예정입니다.

 

비행기나 배편은 각자가 예약하여 제주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회원 분들이 좋은 곳 추천해주시면 일정에 반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