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로 여섯 번 째를 걷는다.
여름의 막바지 그 더운 날 관동대로를 걸으신 여러분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합니다. 벌써 여정이 원주의 초입 문막에 이르렀습니다.
원래의 일정보다 한 달 앞서 끝나게 된 <관동대로>의 여섯 번째 여정이 원주시 지정면에서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까지 이어집니다.
특별히 이번은 일정 관계상, 셋 째 주인 9월 15일과 16일에 펼쳐집니다.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의 대송치 소송치 지나 양동면에 이르고 그 아름다운 구둔재를 지나 지평에 이릅니다. 흑천을 지나 용문에 이르고, 양평을 지나면 남한강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남한강변에 자리 잡은 옥천면까지 이어질 관동대로 6차 여정은 xhxy일 아침에 출발하여 일벅 2일의 여정으로 펼쳐집니다.
“양수대교 2180미터, 족자섬너머로 보이는 산들은 흰 구름에 덮혀 있고, “한가롭다 과속 말고, 단속 없다. 음주 말고,”라고 쓰여진 표지판은 아랑곳없이 죽기 살기로 달리는 자동차들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저렇게 쏜 살같이 가는 것일까? 양수대교를 지나서 용담대교가 아닌 벼랑 쪽에 있는 길로 가기 위해 양평군 양서면 용담 1리 기두원起頭院 마을로 들어선다. 이곳 기두원에는 원집이 있었다는데, 원집의 흔적조차 없고 조금 지나자 새마을이고 금세 신원리에 이른다. 월계. 호리원. 또는 신원이라 부른 이곳은 원래 양근군 서시면의 지역으로 울계원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 신원리에는 가죽나무가 많다고 해서 가죽나무골이라는 골짜기가 있고, 묘골 동쪽에는 옹기점이 있었다고 해서 동이접골, 묘골 북쪽에는 대장간이 있었다고 해서 풀무골이 있다. 동이접골에서 풀무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풀무골 고개이고 샘골에서 목왕리 동막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샘고개이다.“
여운형이 태어난 묘골
이곳 신원리 묘곡妙谷은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인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5.25~1947.7.19)이 탯자리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 1차 대일수호조약을 맺기 위해 특사로 파견된 여우길呂祐吉의 11대 손인 우정현呂鼎鉉과 경주이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백사 이항복의 11대 손인 그의 어머니가 태몽을 꾸었는데, “태양이 이글거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몽양이라고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조부는 손자를 천리구天里駒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의그의 나이 16세에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으나 1년을 넘기기 못하고 자퇴를 하였다. 그 이유는 교회를 다녀야 한다고 고집하는 교장선생님의 강압이 싫어서였다.
여운형은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興化學校에 입학하였는데 그는 영어도 잘했지만 특히 기계체조와 ㅊ철봉을 잘햇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양평의 양근나루는 서울로 가던 길목이었다. 양평읍 양근리의 갈산 기슭에 위치한 양근나루는 1930년 무렵까지만 해도 강원도에서 서울로 들어가기 전의 가장 큰 포구였다. 남한강 수로와 홍천과 양양. 고성 간성을 이어주는 관동대로의 분기로가 만나는 지점이어서 한강 유역의 수륙교통 및 상업의 요충지였다. 1938년 통계에 따르면 경기도내 거래액이 백만원 이상을 기록한 장시場市칙는 수원과, 안성. 그리고 이곳 양평장 뿐이었다. 칙미포구라고도 불리던 양근나루는 강원도 일대에서 나는 메밀, 콩, 수수, 감자, 옥수수 같은 밭곡식들과 나무그릇, 꿀 등이 남한강을 따라 내려와 머물렀다가 서울의 마포로 내려갔던 곳이었다.
남한강은 그 무렵까지만 해도 수량이 넉넉해서 쌀 이백 가마쯤이 실리는 30톤짜리 돛단배들도 오르내렸다. 이 배들은 서울로 내려갈 때에는 물 흐름에 따라 떠내려가듯이 빨리 갔지만 올라올 때에는 물살을 거슬러야 했으므로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바람만 잘 만나면 강원도에서 사흘 만에 양근포구까지 내려갈 수 있었지만, 멀지 않은 마포나루에서 이곳 양근나루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사흘이 또 걸렸다.(...)
양평군 개군면 공세리에 있는 신내마을에서 나라 안에 수도 없이 들어선 ‘양평해장국‘이 전래되었다. 이 장 저 장 옮겨 다니던 장꾼과 소몰이꾼들이 머물면서 먹었던 해장국이 그토록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불과 몇 십 년도 안 되었다고 한다. 양평 해장국만 그런가, 포천 이동 막걸리나 안흥 찐빵등 조그만 면 단위 마을이름을 단 특산물들이 나라를 휘 젖고 있는 것을 보면 “품질 좋은 술은 좁은 골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중국의 속담은 정말로 만고의 진리다.
꿈속에 꿈이라고
깊은 잠이 들지 못하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다가 잠에서 깨어난 시간이 5시 17분, 민경권씨는 아직 깨어나지 않고 조심스레 지도를 다시 펴본다. 턱걸이 고개, 진양고개, 터걸이, 구둔치, 바득재, 서화고개, 교래산, 용문에서 문막까지 가는 길이 어떻게 전개될지, 언제쯤 도착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이런 때를 겪은 뒤에 썼는지 모르는 헤르만 헤세가 <관찰>이라는 책에서 묘사한 글이 가슴속에 파고든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란 대담한 생각을 품어 세상을 뒤집어 없고 모든 사물과 인간과 사건에서 답을 구하고 싶은 욕망과 다를 것이 없으며, 더 나을 것도 없다. 그런 욕망은 계획이니 책 따위로 잠재워지지 않으며,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많은 것을 대가로 지불한다. 마음을 바쳐야 한다.”
그래, 어떤 일들이 일어나건 달게 감수하고 받아들이자. 그리고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전체를 걸자. 이른 여섯시, 오늘은 갈 길이 멀다고 일찌감치 나서자고 해서 모여 김밥을 먹으며 이수아씨가 내게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제 선생님이 내일 가는 길이 험난하다고 해서 그런지 꿈에 집에를 갔어요, 험한 고개 다 넘으면 돌아오려고 했는데, 오는 길에 깨고 말았어요,” 그 말을 들으며 얼마나 걱정이 많았으면 꿈에 도망칠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꿈속에 꿈이다(夢中夢)” “꿈도 꾸기 전에 해몽을 한다(夢前解夢)”라는 말도 있지만 작지만 당차서 너무 잘 걷는 이수아씨가 그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말해 무엇 하랴,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모르고 걸어가면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리 바라본 지도를 가지고 내가 걱정을 했기 때문에 잠까지 설치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함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가장 힘들어 할 것 같아 내심 걱정했던 이기춘씨는 오히려 힘든 내색 없이 잘 걷고 있으니, (...)
우리가 지나고 있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는 조선시대에 지평현의 중심지였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양근군과 지평현을 합해서 영평군으로 만들면서 양평군에 딸린 하나의 면이 된 지평은 본래 고구려의 지현현(砥峴縣)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지평현으로 이름으로 고치어 삭주(朔州.지금의 춘천)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조선 태종 13년에 현이 되었고, 1895년에 강원도 춘천부의 관할이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경기도의 지평군으로 되었다. 지평이라는 이름은 남한강의 지류중의 하나인 흑천黑川이 흐르는 곳에 낮고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평구도平丘道에 속하는 전곡역田谷驛과 백동역白冬驛이 있어 원주를 거쳐 영남과 영동 지방으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
구둔재를 넘어 가는 길
구둔재를 넘어 양동면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묻자 “한 20여 년 전만 해도 그 고개를 넘어서 양동장에 갔어, 옛날에 어른들에게 들은 애긴데 구둔이라는 말은 이곳에서 전쟁을 아홉 번이나 치러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황노인의 말을 듣자 우선 안심이다. 20여 년 전에 넘었던 고갯길이라면 아무리 사람이 안 다녔어도 어렴픗하게 길을 있을 것이다. 마음 다지며 바라본 구둔 마을 뒤편 산 능선, 저곳이 우리가 넘어야 할 구둔치일 것이다.
마을은 평화롭게 가을 햇살을 받으며 펼쳐져 있고 다시 마을입구에 들어서자 나이 많으신 노인 한 분이 앉아계신다. 이 마을에 오래 사셨느냐고 묻자 그분 역시 이 마을 토박이란다. 이름은 최수복, 나이는 자그마치 97세란다. 나이가 많은데도 기억력이나 말씀도 또렷하다. “이 마을 뒤에서 매월리로 가는 고개가 구둔재여. 옛날에 소장사들이 소 많이 끌고 넘어갔어. 양평장 용문장 홍천장을 떠도는 장사꾼들도 몇 명씩 떼를 지어 넘어 갔고, 우리도 매월리로 해서 양동장을 다녔지, 도적놈들이 많았대, 그래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넘었다는데,”
우리나라 고개 밑에는 어딜 가나 도적들에게 피해 입은 민중들의 절절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는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다. 도둑이 <국어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하는 나쁜 짓 또 그러한 사람을 도적盜賊. 투아偸兒. 적도賊盜. 적賊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의 삼대도적이 홍길동과 일지매 그리고 임꺽정이며 그들의 후손들이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도둑들은 정치가 또는 사업가라는 탈을 쓴 간 큰 도둑들일 것이다.
“도둑놈도 핑계는 있다” “도둑놈도 의리가 있고 개통 참외도 꼭지가 있다”는 말도 있지만 “도둑놈 재워 주었더니 제삿밥 먹고 소까지 훔쳐 간다.” 도둑놈 재워 주면 새벽에 쌀 섬지고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조선중기의 이 율곡의 글을 보면 “십년 전에 갔을 때 백여 호가 살던 마을이 십여 집 밖에 안 남았다.”는 글이 있고 그것을 십실구공十實九空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오죽했으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도둑이 되었을까?
도적도 많고 고개가 가파르다 보니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원래 관동대로 길이던 석실. 매월리 구둔재. 전양고개 를 넘지 않았다. 그 대신 석실 금왕리 고송리 용문면 광탄리 다문리를 통해서 가다보니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뜸해졌다고 한다. 이 길을 다른 데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마을 뒤편에 있는 터널을 지나자, 집 한 채 보이고, 산으로 향한 길이 보인다. 묵정 밭 가운데 그늘을 드리운 밤나무 밑에서 지친 몸을 잠시 쉬는데 이게 웬 횡재, 씨알 굵은 밤들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다. 욕심도 욕심이지만 밤 줍는 재미도 쏠쏠한 것이라서 한참을 주웠더니 주머니가 불룩하다. 이래저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쉴 틈이 없구나.(...)
길만 제대로 나 있으면 된다
이제 길만 제대로 이어져 있으면 된다 싶은데 길이 아주 잘 나 있다. 이정도면 아주 훌륭한 옛길이다. 길옆으로 작은 시내가 흐르고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아주 명징하고, 그 옆에서 우짖는 풀벌레 소리, 가을이 깊고도 깊구나. 나뭇잎들이 한잎 두잎 떨어져 내리고 산길에는 바람이 없다. 가파른 산길, 뒤 따라 오는 사람들이 저 만치 멀다. 가파른 산길에 털썩 주저앉아서 나는 나뭇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바라다본다. 나도 어느 날 저 나뭇잎처럼 아무 기척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일 년에 이 길을 몇 사람이나 지나갔을까?
“힘들 것이라고 여겼던 만큼은 아니지만 고개하나 넘으면서 힘을 다 뺀 느낌이다. “재는 넘을수록 높고 내는 건널수록 깊다.”는 옛말처럼 우리가 넘어야 할 고개는 과연 몇 개나 될까?
진짜로 관동대로를 만났다는 기쁨에 내려오는 길이 얼마나 가뿐했던지, 성큼 성큼 내려오는 나를 따라 오다가 이기춘씨가 그만 길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괜찮아요?“ 하고 바라보자 이수아씨가 부축하는 것이 보이고, 그 짧은 찰나사이로 내 눈에 들어와 박히는 쫙 벌어진 으름열매, 나는 으름 덩굴에 매달려 으름을 따서 부상당한 이기춘씨와 일행들에게 맛을 보라고 권한다. 처음 먹어보는 열매란다. 서양식 바나나라고도 하는 으름덩굴은 그 잎새하며 꽃이며, 열매며 나무랄 것이 없어서 일부 사람들은 정원수라도 활용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양식 정원수에 길들여지고 한국의 자연을 접할 기회가 없다. 그러다보니 머루며, 다래며, 으름이며 심지어 산 벗 나무에서 나는 버찌나 뽕나무에 열리는 오디를 나이 오십 육십이 넘어서 처음 맛본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더덕이나 도라지, 그리고 향기 짙은 당귀며 산 작약 같은 것은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 많다.
하여간 ‘가을 산은 가난한 처갓집 가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한쪽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 다쳤는데, 그 사이 짧은 순간, 즉 순식간瞬息間에 쩍 벌어진 으름 열매가 내 눈 안에 포착되다니, 꼭 요술을 본 것 같기도 하고 환영을 본 것 같은데 내 입속에 지금도 남아 있는 달착지근한 맛을 보면 현실은 현실인 모양이다.
<백과서전>을 보면 ‘순식간’은 눈을 한 번 깜짝하거나 숨을 한 번 쉴만한 극히 짧은 동안, 전순간轉瞬間. 순식瞬息. 돌차간咄嗟間“이라고 실려 있다.(...)
석곡에 이르렀지만 석곡엔 식당이 없다.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플 때는 다른 어떤 것도 마음의 깊은 곳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걱정도 쓰라림도 먹은 뒤 이야기“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리라. 고픈 배를 움켜 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양평군 양동 면 소재지인 쌍학리에 이른다.
양동면의 소재지인 쌍학리는 쌍리와 학촌의 이름을 합해서 쌍학리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다. 이곳에도 웬 부동산이 그리도 많은지, 점심을 먹으며 이곳의 땅 값을 묻자 몇 년 전만 해도 평당 5.6만원 하던 땅 값이 지금은 30만 원쯤 나간다고 한다.
쌍학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학둔지 마을은 지형이 학처럼 생겨서 지어진 이름이고, 학둔지 남쪽에 있는 마을은 사창社倉이 있어서 창말이며, 창말 서북쪽에 있는 택풍당澤風堂은 인조 때의 문장가인 이식李植이 살았던 곳이다.
이행李荇의 후손인 이식(李植, 1584~1647)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호는 택당(澤堂), 자는 여고(汝固)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덕수 이씨의 무맥武脈이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으로 이어졌고, 그 문맥文脈 은 이식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문장가가 바로 이식이었다.
인조 때의 문신으로 문장이 뛰어났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장유(張維)와 함께 한문4대가 또는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라고도 부르며, 이들의 호를 한 자씩 따서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고도 부른다. 선조 때부터 인조에 이르기까지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들 네 사람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당송팔대가의 고문(古文)을 모범으로 삼은 점, 주자학적인 사고가 규범이 되고 있는 점, 이들 모두가 화려한 가문 출신이며 관료로서 출세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 한 몸 쉴 장소가 없을까‘ 생각하며 헉헉대면서 정상에 오르자, 경기도 땅에서 강원도 원주시에 접어든다.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에 접어든 것이 그제의 일인데 경기도에서 이제 강원도에 접어든 것이다.
강원도 땅을 지나 대관령을 넘어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경상북도 울진 평해 관동대로의 종착지에 도착할 날이 언제쯤인지 알 수 없는데 이제 다리가 무지근하다. 내가 이렇게 다리가 아프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아플까?
길을 오랜 나날 걷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설명조차 불가능한 커다란 인내심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독일의 작가인 헤르만 헤세는 『유리알 유희』에서 “나그네는 작은 일로도 보람을 얻으니 나그네에겐 참고 견디는 것이 유일한 약이다.”라는 글을 남겼고, 조선의 나그네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읊조리며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재는 넘을수록 높고, 내는 건널수록 깊다.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다. 산 넘어 산이고 가면 갈수록 심산深山이라”
지칠 대로 지친 이수아씨와 이기춘씨 그리고 민경권씨는 아무 말 없이 한 발 한 발 앞만 보며 발을 내딛고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뒤에 처진 나 역시 천천히, 천천히 걸음을 옳길 뿐이다. 일반국도 88번, 뒤돌아보니 우리가 지나 온 솔치너머 양동면 일대의 산들이 아스라하다. 이마에 땀이 송이송이 맺히고, 온 몸이 땀에 흥건하게 젖었다. 한발 한 발 넘어 가는 이 고개, 바람은 이제 선선하게 불고, <안녕히 가십시오 경기도 양평군입니다.> 라는 안내판 뒤에 “영원한 마음의 고향 , 어서 오십시오, 강원도 원주시입니다.>라는 안내판이 뒤를 잇는다. 여기서부터 강원도로구나.”
신정일의 <관동대로>중에서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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