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산중산담 2012. 10. 14. 22:04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2012년의 정기기행 관동대로가 일곱 번째로 막을 내립니다.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사무소를 출발하여 삼척, 동해, 강릉, 대관령, 평창, 횡성, 원주, 양평을 지나 남양주와 구리를 지나면 동대문에 이릅니다. 일곱 번째로 진행된 이번 마지막 구간은 양평군 옥천면 아산리에서 출발하여 양수리를 지나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취가 서린 능내리와 덕소을 지나 서울에 이를 것입니다.

마지막 구간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한적한 남한강 길에 접어들자마자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에 접어든다. 아오와 신대의 이름을 병합한 아신리 기곡마을은 터굴로도 부르는데, 아세아 신학대학교 근처인 아신굴에서 멀지 않은 빙곡 마을에는 옛날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가 있었다고 한다.

잔고개 남쪽에 있는 세우자리마을을 지나 고읍교라고 부르는 큰 와검다리를 지나자 식당들이 줄을 이어 있다.(...)

 

이곳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이 된다. 두 개의 큰 물길이 만나는 곳이므로 두물머리, 두머리 등으로 불리는 양수리의 옛 이름이 병탄幷灘이었던 듯싶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군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여강麗江 물과 용진龍津 물이 여기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병탄이라고 한다.”고 실려 있다.

이곳 병탄을 두고 고려 말의 문신인 이색李穡은 “흐름을 따라 내려가니 뱃사공이 한가하도다. 험한 곳을 만나면 경각 사이에 놀라 외친다.

늦게 사장沙場에 닿으니 바람과 이슬이 찬데, 등잔불 하나가 깜박깜박하여 구름 산을 비친다..” 고 하였고

 

여말선초의 문신인 권근은 이렇게 노래했다.

작은 배 일렁인다. 파란 물결에

조용히 건너니 한길 같구나.

지난 일 아득해 온통 꿈인데

부생들 어느 때나 한가하려나.

세상의 영화는 이름 때문이고

벼슬의 오르내림에 마음조이네.

영천(潁川,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물 이름)에 가서 귀를 씻지 못하니

밝은 강에 비치는 얼굴이 부끄럽다.

 

 

예로부터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의 배가 건너다니는 곳을 나루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주의 웅진熊津을 곰나루라고 한 것이 가장 이린 시기의 나루에 관한 용례이다. 배로 사람이나 짐을 나르기 때문에 ‘ 나르는 곳’에서 ‘나루‘라는 말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한자로 표현할 때는 도渡(삼전도). 진津(. 정암진. 주문진)이라 하였고, 조금 더 큰 것을 포浦(다대포. 삼천포)라고 하였으며, 대규모의 바닷가 나루는 항港(부산.) 이라고 하였다.(...)“

 

 

“현재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5-1번지로 변했지만 다산이 살았던 그 당시는 경기도 광주군 초부읍 마현리였다.

서재와 독서 그리고 침잠하기에 알맞고 좋다 하여 여유당이라고 불렸다는 다산의 생가는 1925년 여름의 홍수 때 떠내려가 1975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옛 맛을 느낄 수 없는 다산의 집 뒤편 ‘여유당(與猶堂)’이라 새긴 빗머리 돌을 지나 작은 언덕에 오르면 정약용과 그의 아내인 ‘숙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한 묘가 나타난다.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다산의 묘 앞에서 보면 팔당호의 출렁이는 물결이 어른거린다.

긴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다산의 삶은 쓸쓸하기만 했다. “남쪽 천리 밖에서 노닐었지만 어디 간들 이 좋은 언덕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노래하면서도 그의 시는 쓸쓸하기만 했다.

 

강촌의 밤은 저물어 어두운데,

개짓는 소리 성긴 울타리를 끼고 흘러라.

물이 차가워 별빛은 더욱 고요치 못하고

산이 멀어서 눈빛이 더욱 맑구나.

먹고 살 긴 대책은 전혀 없고

글 쓰는 방에는 짧은 등잔대 하나

남모를 근심으로 밤잠은 아니 오고

어찌하면 여생을 탈 없이 마칠까?

 

다산이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함께 활동했거나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남겨진 재산 또한 별로 없었다.

회갑을 맞은 다산이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자찬묘지명」에서, “내가 서술한 육경사서로 자기 몸을 닦고 일표이서로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으니 본말을 갖춘 것이다”라고 자부하였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자가 많으니 만약 천명天命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비록 한 횃불로 태워버려도 좋다”고 하며 그의 삶과 사상이 수용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가난 속에서 지조를 굽히지 않고 더욱 학문을 연마하면서 때로 청평산, 용문산 등지로 유람을 다니며 보신保身에 철저하였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쓸쓸한 적막과 고적감 뿐이었다.

“유락流落된 7 년 이래 문을 닫고 홀로 웅크리고 앉아 있노라니 머슴종과 밥 짓는 계집종조차도 함께 말도 걸어주지 않더이다.

낮 동안 보이는 거라고는 구름과 파란 하늘 뿐이요, 밤새도록 들리는 거라고는 벌레의 울음이나 댓잎 스치는 소리뿐이라오...”라고 정약용은 친구에게 토로했으며

“책을 안고 돌아온 지 3년이나 되었지만 함께 읽어줄 사람도 전혀 없습니다”하고 가슴에 사무친 외로움을 토해냈다.

특히 “우리 집 대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오지 않는 거야 이미 정해진 관례이오니 원망하지 않으나 천하에서의 괴로움은 남은 기쁜데 나는 슬퍼함이며

가장 한스러움이란 나는 그를 생각하지만 그는 나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경우랍니다...”라고 다산이 썼던 글처럼 그 당시 내노라 하던 사람들은 다산의 집을 지나치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지나갔다.

그는 깊고도 깊은 고독 속에서 『흠흠신서』30권과 『아언각비』 3권을 저술했다.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 마재로 돌아온지 17년만인 1836년(헌종 2년) 2월 22일에 다산은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뒷산에 묻혔다.

 

덕소

삼패동을 지나 덕소를 조금 남겨두고 한강을 보자 남양주대교가 한 부분만 남겨두고 거의 잇닿아 있다. 언제쯤에 저 다리가 완공 되어 차들이 다닐 수 있을까? 하고 발길을 옮기는 사이에 남양주시 덕소읍에 이른다.

본래 남양주시 와공면의 지역으로 라는 이름이 붙은 덕소는 현재 서울 인근의 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아파트가 즐비한 곳이다.

덕소 남쪽에 있는 마을이 말무더미 또는 율계라고도 부르는 뱅깨인데 뱅깨 동남쪽에 있는 산이 높이가 90.6m인 금대산金垈山이다.

뱅깨에서 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금대산 고개이다. 이곳 도곡리에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인 박원종朴元宗의 묘소와 그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世德祠를 비롯한 순천 박씨들의 묘역이 있다.

덕소 남서쪽에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안동김씨 김번金璠의 묘가 있다. 안동이 본향인 김번이 과거에 급제하고서 양주 땅에 터를 잡고 살던 남양홍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처가의 근거지인 덕소에 그의 무덤을 쓰게 되었는데, 그 자리가 원래 홍씨의 산이었다. 그런데 김번에게 시집간 딸이 그 시 백부 되는 학조대사學祖大師의 말을 들어 그 남편의 무덤을 썼는데, 옥병에 물을 담은 형국이라고 하여 유명한 무덤이다.

그의 후손이 앞서 언급한 김상헌과 김상용이다.

덕소 일대에 조선 초기와 중기 그리고 조선후기 까지 조선을 뒤흔들었던 박원종. 김육. 김상헌 등 기라성 같은 사람들의 묘소가 즐비하다.

이렇게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이곳 남양주 덕소 부근에 삶터를 정하고 사후에도 머물고자 했던 것은 이중환이 <택리지>에도 언급했듯 강이 흐르고 산천이 빼어난 길지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수택동에 있던 들판인 개무기 들과 구리시장을 지나며 길을 잃어 길을 묻는다. 길(道은) 여기 저기 도처에 있는데, 길에서 길을 묻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길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길은 아는 사람이 앞서가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아는 사람이 없는 탓이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길을 묻는다. 그것은 여행지에서 나그네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우리 속담에 ‘알아야 면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낮선 길에서 나그네가 길에게 길을 묻는 것이 도시에서의 길 찾기이다.

“타향에서 온 나그네는 바로 길을 묻는 사람이며, 장소의 이름을 묻는 사람이다.

길 가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수수께끼 같은 수많은 장소들 속에서 어디가 어디인지를 분간하는 일, 지도나 풍경들의 색깔과 선線들 속에서 자신이 서 있는 현재 위치를 헤아리는 일이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눈대중의 척도尺度에 따라 계산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할지를 예측하는 일이다.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세계를 명명하는 것이다. 도보 여행자는 아직 어느 것 하나 그 정확한 좌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사람의 차원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 차원 속에서 그가 더듬어가는 장소들은 한결같이 미지의 장소들이며, 마치 미완성 상태에 있는 것만 같은 장소들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에 실린 글이다.

 

 

왕숙천

그래도 이 근처 덕소에 살고 있는 고혜경 씨의 기지로 제대로 길을 찾았고, 구리시 환경사업소를 지나 왕숙천에 걸린 토평교를 건넌다. 왕숙천(王宿川)은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內村面) 신팔리(薪八里) 수원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남양주시를 지나 구리시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한강의 지류로 길이는 37.34km이다.

왕숙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유래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팔야리(八夜里)에서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先王)이 길이 잠들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내가 지금 떠나고 있는 서울은 한국인에게 무엇인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 서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번 서울에 뿌리를 내리면 극히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 나가서 살고 싶지 않은 살만한 곳(?)이 서울이다.

서울을 떠나는 것은 유람이나 벼슬살이 그리고 유배를 당했을 때 등 몇 가지 이유 속에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가세가 기울게 되면 서울을 떠났다.

 

조선 후기인 1890년대 우리나라를 답사하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지은 영국의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의 글을 보자.

 

“모든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지방 관리들은 수도에 따로 저택을 갖고 있으며, 연중 많은 기간 부임지의 직무를 경시해도 된다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토지 소유자들은 수도에 살고 있는 부재 지주자들이며, 그들은 지대를 받기 위해 지방으로부터 민중들을 쥐어 짠다.

여행 중의 음식 값과 숙박료를 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일 년 중에 한 번이나 두 번 서울로 걸어오며, 어느 계급일지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 주라도 서울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에게 서울은 오직 그 속에서만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살고 아침마다 KTX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 논물도 보고 콩밭도 매고 할 날이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서울, 우리의 서울, 아침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서울, 그렇게 한국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그 서울을 ‘나와 몇 사람의 도반이 지금 떠나고 있다’ 그래, 떠나고 있다.‘ 고 읊조리며 떠난다.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는 길을 조금 걷자 우측에 동묘가 보인다.”

 

 

"이곳 동대문 밖을 지나서 역사 속을 걸어갔던 사람이 조선사대의 빼어난 문장가인 송강 정철의 형 자滋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당시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사온령司醞令, 즉 궁중에서 쓰는 술을 빚는 사온서司醞署의 책임자였고 그의 형 자滋는 이조정랑이었다.

계림군은 모진 고문 끝에 자복하여 능지처참을 당했고, 아버지 정유침은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인 자는 전라도 광양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잠시 귀양에서 풀려났던 정유침은 명종 2년 가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경상도 영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전라도 광양에 귀양 가 있던 형은 더 멀리 보내야 된다는 상소문이 빗발치자 함경도 두만강 가에 있는 경원慶源으로 옮겨 가게 되면서 서울에 당도하였다.

성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동대문 밖을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그의 어머니는 자기의 속옷을 벗어 입히면서

‘아들이 싸움터에 나갈 때 어머니의 옷을 입고 가면 빨리 돌아온다.‘ 는 옛말이 있다” 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통곡을 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정철의 형 자 는 경원으로 가는 도중에 장독이 도져 죽고 말았다.“

 

 

삼남대로와 영남대로를 다 걷고부터 가슴속에 큰 짐이 하나 얹혀 져 짓누르고 있었다. 그 무거운 짐이 <대동지지>에 나타난 동남지평해삼도로東南至平海三道. 즉 路평해로平海路라고 부르는 관동대로였다.

북한 쪽 답사는 언제 추진될지 모르지만 남한에 있는 이 길을 빨리 걸어야 할 텐데, 어떻게 한다. 달력을 놓고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마땅치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정해년(2007)을 넘기지 말자! 그리고 이왕이면 무르익은 가을 만산홍엽을 바라보며 걷자, 하고 날짜를 결정했던 것이 관동대로 도보답사였다.

 

그런데, 혼자 걸었던 삼남대로나 네 명이 함께 걸었던 영남대로와 달리,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도반道伴들과 걷기로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프리랜서인 나야 일정만 비우면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금 쪽 같은 휴가를 내야 되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땅 걷기 정예 도반들과 나서게 되었는데, 이번에 열나흘간의 대장정에 나서는 사람들은 불과 몇 개월, 또는 년 전 까지만 해도 이 하늘 아래 어디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운명적인 관동대로의 도반이 된 것은 2005년 가을에 결성한 우리 땅 걷기 모임 때문이었다.

 

“작은 것만 보던 사람은 천지가 크다는 것을 보지 못 한다.”는 옛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한 경우가 드물다.

여행을 가도 주마간산, 아니 주차간산처럼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어떤 주제(, 옛길. 한국의 강. 국토종단의 도보답사)계획을 세워서 두 발로 한 발 한 발 걸어간다는 것은 생각 속에서만 머무르고 실천은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나마 계획을 세웠다가도 집안에 조그마한 일만 생기면 포기를 하거나 다음으로 미루게 되고 결국 “사람은 내일을 기다리다 묘지로 간다.”는 러시아 속담처럼 끝내 물 건너간 계획이 되고 만다.

지금 사람들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옛사람들도 그러했다. 서울에서 불과 수백 리 밖에 안 되는 금강산을 답사한 사람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신기재申企齋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을까? “젊을 때는 병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인생 백 년 동안을 금강산 한 번 못 보았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답사를 통해서 먼 저 간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을 동참할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우리 땅 걷기>였다. “

 

 

관동대로 마지막 구간,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에서 서울 동대문까지 걸어가고자 하는 분은 미리 신청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