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봄이면 봄, 가을이면 가을 한 두 차례 씩 가는 섬진강이지만
유독 날이 맑고 물도 푸르른 강이었습니다.
내가 강에 마음이 홀려서 산지 벌써 40여년,
강은 언제나 보아도 설레는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강이 그렇다면 강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산은 어떨까요,
모든 산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사유思惟와 침묵의 언어를 조금씩 풀어놓고,
더 이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산山이지요,
어떤 때는 오래 사귄 친구처럼 낮 익고,
어떤 때는 처음 보는 사람 같이 낮 선 산,
그 산들을 D.H. 로렌스는 <인간과 인형>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산들까지도 당신에게 꾸민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들의 오만한 높이는 내가 미워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감격한 듯 정상을 의젓하게 걷는 사람들을 나는 미워하지요.
나는 그들이 정상을 멈추고 소화 불량을 일으킬 때까지,
그들에게 얼음을 집어 삼키도록 하고 싶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미워합니다. 그것은 질색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조금 미친 것 같군요.”
하고 그 여자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산이 당신보다 더 높은가요?”
“아닙니다. 산은 나보다 높지 않지요.!”
그는 말했다. “나보다 높지 않죠.”
나도 그렇게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오만이지만, 가끔, 어느 때는 그러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산이 산을 겹겹이 에워싸고 펼쳐지듯,
강이 온몸을 풀어헤치고 유유히 흘러가듯,
나도 그렇게 아무런 걸림이 없이 흘러서 바다에 이르고 싶은 것입니다.
어둠이 내린 강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런 설렘과, 초조,
그런 것들까지도, 다 내려놓고,
내가 서서히 어두워져 칠흑 같은 어둠이 되어 정신을 잃어버리는
그런 시간이 내게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난 한 밤에
가까운 듯 먼 듯 들리는 그 강물소리,
임진년 월 초여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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