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에 의주로를 고양과 파주 일대를 걷다.
11월 첫 주 일요일인 11월 4일 하루 도보답사로 관서로라고도 부르는 의주로 일대를 따라갑니다. 조선시대 9대로 중 제 1로인 의주로는 서울에서 고양과 파주를 지나 평양을 거쳐서 의주에 이르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이르는 연행로입니다.
벽제관과 보광산 자락의 보광사, 용미리 석불, 임진각, 그리고 파주시 파평면의 화석정과 임진나루 일대를 돌아볼 예정입니다.
“조선 태종 때에 고봉산 자락의 고봉현과 덕양 현의 글자 하나씩을 합하여 고양현이 되었고
성종 2년인 1471년에 군이된 고양은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큰 도로였던 관서로가 지나는 통로였다.
벽제관
한양에서 의주까지 이어졌던 관서로에는 큰 역관 12개가 있어서 조선과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머물러 쉬었던 곳으로서 벽제관은 그 첫 번째 역관이었다.
중국의 사신들은 서울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예의를 갖추어 입성하는 것이 정례(定例)였다.
현재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사지에 세워져 임금이 몸소 중국의 사신을 영송하였던 모화관에 버금가는 중요한 곳이었던 이곳은 조선초기에는 제릉에 친제하러 가는 길에 국왕이 숙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원래의 벽제관터는 지금의 자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가 1625년(인조3년)에 고양군의 청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지었던 객관의 터였다.
이 때 옮겨지었던 벽제관의 모양새가 어떠했는지 추측하기는 어렵지만「동국여지승람」에 “집이 크고 아름다우며 제도가 정장하매 질서가 있게 단단하여 한 가지도 빠진 것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930년대만 해도 남아있던 벽제관 건물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일부가 헐렸고 6.25 동란 때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예겸은 그의 시에서 “길은 왕경(王京)으로 돌아가는데 이 밤 기온이 차다. 두 행렬의 횃불이 말안장에 번지는 구나. 청산을 지나온 것이 얼마나 될까. 분명히 눈을 들어보지 못하였네.”라고 하였고
기순(祈順)은 “초가에 우는 닭이 4경을 알렸는데 여구 가객을 재촉해 왕경을 가자한다. 많은 역부는 분주해 구름 모으는 것 같고 여러 횃불은 얼기설기 불성이런가, 의심한다.
좋은 산은 길을 껴서 경치를 분별하기 어렵고 다리를 지나 흐르는 물은 소리만 들리네. 날이 환하게 밝자 가랑비 내리는데. 황은을 선포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있다.”하였다.
이렇듯 관서지방 사람들이 서울을 지나야 할 때에 꼭 들러야 했던 벽제관은 지금은 건물의 초석만 남긴 채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사적 144호라는 표지판이 무색하게 벽제관 터는 폐 건축 자재와 흉물스럽게 방치된 포장마차에 포위당한 채 번성했던 옛 시절을 부는 바람결에 들려주고 있다. (중략)
길은 고령산으로 이어진다. 벽제 삼거리에서 됫박처럼 가파르기 때문에 이름 붙었다는 됫박고개를 넘어서 보광사(普光寺)에 닿았다. 파주군 광탄면 영장리 고령산(高靈山) 중턱에 세워진 이 보광사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4) 임금의 명에 의해 도선국사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1215년(고종2년)에 원진국사가 중창하였고 우왕 14년(1388)에 무학대사가 삼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광해군 4년에 설마와 덕인이 법당과 승당을 복원하였다.
1667년(현종8년)에 지간과 석견이 중수하였고 1740년에 영조가 대웅보전과 광음전, 만세루 등을 중수하였으며 근처 10여리 밖에 있던 생모 숙빈 최씨의 묘 소령원의 원찰로 삼으며 왕실의 발길이 잦아졌다고 한다.
그 때 절 이름도 고령사에서 보광사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 말기에 쌍세전과 나한전, 수구암, 지장보살상과 산신각을 신축하였지만 한국전쟁 때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관음전, 나한전, 쌍세전, 산신각, 만세루, 법종각 등이 있고 영조대왕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편액이 있다.
새로 지어진 보광사 법종각에는 1631년(인조)에 만들어진 범종이(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이 걸려있다. 조선시대 범종양식을 제대로 보여주는 종이면서 크지는 않지만 매우 화려하면서도 다부진 느낌을 주는 종이다.
또 그 위로는 만세루에 걸려 있었던 목어가 이곳으로 옮겨와 걸려있다. 몸통은 물고기 모양과 같지만 눈썹과 둥근 눈, 튀어나온 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과 사슴의 뿔까지 있어 용의 형상을 한 물고기와 같다.
「조선 사찰자료」에 의하면 1896년(고종33년)과 1901년 사이에 중창된 것으로 보이는 대웅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은 당시 궁중의 여인네들이 불사에 동참했다고 한다.
대웅보전의 편액은 영조대왕의 친필이고 법당 안에 모셔진 비로자나삼존불은 1215년 중건 당시 원진국사가 조성해 모신 불상이라고 한다.
나는 만세루의 툇마루에 앉아 녹음 우거진 배경으로 그림처럼 펼쳐진 대웅보전을 바라본다.
정면 3칸에 측면 3칸 다포 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높게 쌓인 축대 위에 올라앉은 대웅보전은 퇴색된 단청이 더욱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한 보광사 대웅보전의 법당 외벽 벽화는 다른 건물과 달리 흙벽이 아닌 목판을 대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그 그림들이 다른 벽화와 다르게 부처님의 전생 담과 연화장 세계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민화풍을 느끼게 한다.
그뿐인가. 원통전 외벽에는 80년대의 민중미술에서나 볼 수 있는 삽자루를 잡고 앉아있는 농민의 모습과 아들을 떠나보낸 늙으신 어머니가 머리에 노끈을 두르고 앉아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영험이 있는 용미리 석불
용미리(龍尾里) 일대를 내려 다 보고 있는 용미리 석불은 일명 쌍 미륵으로 불리면서 아기를 못 갖는 부인들이 공양을 바치고 열심히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고 믿었었다.
고려 중엽 때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불은 보물 제 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연석에 균열이 생겨 두 개의 바위가 연하여 있음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성하면서 머리 부분은 따로 조각하며 얹었다.
천연석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신체 각 부분의 비례가 잘 맞지 않아서 기형의 형태로 보이지만 얼굴에서 아래까지의 길이가 17.m에 얼굴 길이가 2.45m나 되는 거대한 체구와 당당함이 그러한 아쉬움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안동의 제비원 석불과 조성양식이 비슷한 이 불상에는 고려 선종과 원신 공주(元信宮主)의 왕자인 한산 후(漢山候)의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선종(宣宗)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어느 날 원신공주의 꿈에 두 스님이 나타났다. 그 스님은 “우리들은 파주군 장지산에 있다. 식량이 끊어져 곤란하니 그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조각하라 그러면 소원을 들어주리라”하였다.
기이하게 생각한 원신공주는 사람을 그곳에 보냈다. 꿈속의 말대로 거대한 바위가 있는 게 아닌가. 공주가 서둘러 불상을 조작케 하는데
또 다시 꿈속에 나타났던 두 스님이 나타나 “왼쪽 바위는 미륵불로 오른쪽 바위는 미륵보살로 조성하라”라고 이르고 “모든 중생이 이곳에 와서 공양하고 기도하면 아이를 원하는 자는 득남하고 병이 있는 자는 쾌차하리라”라고 말한 후 사라졌다.
불상이 완성되고 절을 지은 후 원신공주는 태기가 있어 한산후를 낳았다고 한다. 한편 오른쪽 불상 아랫부분 옆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의 지방화 된 불상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예로 평가받고 있다.
답사의 여정은 임진각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성공리에 끝낸 탓인지 임진각의 주차장에는 빼곡히 들어찬 자동차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먼저 자유의 다리로 향한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다리를 휴전 후 교환 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다시 만들었던 가교가 자유의 다리였다. 당시 북쪽에 포로로 잡혀있던 12,773명이 돌아오면서 자유의 다리라고 명명된 저 다리를 건너 7km를 가면 판문점에 이른다.
그러나 그때부터 저 다리는 누구도 건널 수 없는 다리가 되었다. 이 임진각에는 서울에서 장단을 거쳐 신의주까지 이어졌던 경의선 열차가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고 외치며 그날 그때부터 멈춰서 있다.
나는 6월 25일 한국전쟁 50주년이 되는 그 역사의 현장 임진각 뙤약볕 벤치 아래 앉아 50년 동안 침묵한 채 서있는 열차를 바라보며 김지하 시인의 시 한편을 떠올린다.
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
김지하
당신이 내게 올 수 있다면
고원에 만발한 한 아름 나리꽃 안고 산철쭉도 안고
그보다도 더 아리따운
환한 웃음 안고 내게 올 수 있다면
내가 나가 반겨
당신이 아닌, 당신 몸이 아닌
당신의 꽃들과 웃음을 껴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원주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원주로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오락가락할 이유가 없겠지
낡아빠진 석탄 차
녹 슬은 기관차
지금은 국민학생 들 구경거리로 전락해 버린 차
그 차
휴전선에 잘린 경의선
경의선 화통
그것을 타고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다면
그 기관차를
새파란 동백잎, 빛나는 유자 무더기. 향기 짙은 치자꽃으로,
무화과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그리고 못난 내 얼굴에라도
함박꽃 같은, 달덩이 같은 째진 웃음지어 만나고 싶다
나 오늘 눈 내리는 원주 거리에 다시 서서
다시금 남쪽으로 돌아갈 자리에 서서
거리를 질주하는 영업용 택시를 보며
경의선 끊어진 철로 위에
홀로 남겨진 기관차 속에 홀로 남을
민족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소주 한 잔을 국토 위에 붓는다.
아 아 꽃들이여
너희들의 영광은 언제 오려는가.
김지하 시인이 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 꽃은 채 가고자 했던 북녘 땅을 나는 이른 아침 무궁화 열차를 타고서 달리고 싶다. 그래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사리원과 평양을 거쳐 묘향산과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이라고 썼던 김소월의 고향 땅을 밟고 싶다. 그리고 백두산을 북녘 땅에서 오르고 싶고 서울에서 금강산까지 천천히 걸어서 가고 싶다.
우리나라 옛길의 가장 중요한 도로였던 의주로를 따라가며 그 길에 얽힌 이야기를 바람결에 전해들은 이번 기행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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