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2012년의 마지막과 첫날을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한 해를 새롭게 설계하고자 마련하는 이 행사는 12월 30일 아침 출발하여 고창의 무장읍성과 영광 법성포 일대의 해안도로를 걷고 점심을 먹은 뒤 남도의 바닷가를 걸을 예정입니다. 오후에 목포의 유달산을 올라 신안 일대의 섬들을 바라보고 강진으로 향합니다.
임진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는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암 월출산을 경포대에서 천황사코스로 넘을 것입니다. 오후에는 월출산자락에 펼쳐진 길을 걷고 강진의 영랑생가와 영랑생가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계사년의 첫날 첫해의 떠오르는 해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취가 서린 강진의 다산 초당에서 보고 남도의 보삭 같은 절집 장흥의 보림사와 화순의 쌍봉사, 운주사 일대를 답사하게 될 것입니다.
법성포항에 있는 영광굴비
갈재의 서쪽에 자리 잡은 지역이 영광․함평․무안이고 남쪽이 장성군과 나주시인데 영광을 일컬어 옥당고을이라고 부른다. “아들을 낳아 원님으로 보내려면 남쪽에 옥당골이나 북쪽의 안악골로 보내라”는 옛 말에 나오는 옥당골은 지금의 영광을 말하고, 안악골은 지금의
황해도 안악군 일대를 말한다.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들이 넓을뿐더러 바다가 가까워서 바다에서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이다.
?택리지?에 “영광 법성포는 밀물 때가 되면 포구 바로 앞에 물이 돌아 모여서 호수와 산이 아릅답고, 민가[閭閻]의 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하여 사람들이 작은 서호(西湖)라고 부른다. 바다에 가까운 여러 고을은 모두 여기에다 창고를 설치하고 세미(稅米)를 거두었다가, 배로 실어 나르는 장소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법성포는 옛날 진나라의 중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 땅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곳이라고 전해오는 포구다. 고려 때 이자겸(李資謙)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 척준경(拓俊京)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 그때 이자겸은 칠산바다에서 삼태기로 건질 만큼 잡혔던 영광굴비를 석어라는 이름을 붙여 사위였던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법성포
법성포는 조선시대 영산포와 더불어 호남지방의 세곡을 갈무리했던 조창(漕倉)의 기능을 맡았었다. 그 무렵 조창의 중심 역할을 했던 나주와 영산포가 뱃길이 멀고 험하여 배가 자주 뒤집히자 중종 7년에 영산포 조창을 없애고 법성포로 옮겼다. 그때부터 법성포에는 광주, 옥과, 동복, 남평, 창평, 곡성, 화순, 순창, 담양, 정읍, 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 12개 고을의 토지세인 전세(田稅)가 들어왔다. 동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이 15채가 들어섰고, 배가 20채에서 50채까지, 전선이 22채, 수군이 1700여 명이 머물렀다.
이처럼 법성포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라도 제일의 포구였다. 고깃배 선단이 포구에 들어오면 법성포 외양에 있던 목넹기에 파시(波市)가 섰다. 충청도 전라도 일대의 어물상들이 떼 지어 물려와 북새통을 이루었고, 가을 세곡을 받을 때는 큰 도회지를 연상케 했던 법성포는 이젠 옛날만 회상할 뿐이고, 화려했던 법성포는 옛 이야기 속의 한토막이 되었다.
도온 시일러 가세에에
돈 실러으어 가으세에에
여영광에 버법성포에라 돈 시일러 가.
온 나라에 이름이 나도록 떼를 지어 몰려들었던 굴비가 수심이 얕아진 후로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나타나고, 다른 운송수단의 발달로 포구의 기능은 쇠퇴하고 말았다. 파시 때마다 흥청거리던 법성포의 영광은 언제 다시 올 것인지 기약이 없다. 홍농면에 자리한 원자력 발전소의 그늘에 가려 빛을 잃어가는 법성포에는 어느 바다에서 잡혔는지도 모르는 굴비들이 걸려있다. ‘영광굴비’ 또는 ‘이자겸李資謙굴비’라고 쓰인 간판들을 바라보면 이곳이 바로 굴비의 고장인 영광이라는 걸 안다.
“사공에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 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으로 시작하는 이난영의 노래는 문일석文一石이 193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향토가요 가사로 당선된 노랫말이다. 이 가사에 작곡가 손목인孫牧人 이 곡을 붙인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다. 이 노래뿐만이 아니라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로 기억되는 목포를 광주의 시인 문병란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목포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동백꽃처럼 타오르다
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
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
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고
배신과 실패가
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
문득 휘파람을 불고 싶은 곳이다.
없어진 삼학도에 가서
동강난 생 낙지 발가락 씹으며
싸구려 여자를 바라볼거나
삼학 소주 한잔을 기울일거나.
........
실패한 첫사랑이 생각나는 곳이다.
끝끝내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목포는 자살보다
술맛이 더 어울리는 곳
.........
목포를 어째서 목포라고 불렀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영산강 물과 서해 바닷물이 합쳐지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길 목쟁이’처럼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하여 ‘목개‘ 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겨서 목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진을 쳤던 고하도가 목화의 집산지라서 이 나라에서 생산한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날랐기 때문에 ’목화의 항구’라서 목포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목포가 큰 항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위에 섬이 많고 항만 동남쪽에 있는 영암반도의 돌출부와 남서쪽에 가로놓인 고하도가 자연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배후의 유달산이 자연방파제 역할을 하여 지형 상 유리한 위치에 있던 목포였다. 1895년 관제개혁으로 무안군에서 분리된 목포에 목포만호청이 설치되었고, 목포가 개항된 것은 청일전쟁이 끝난 1897년 10월이었고 그때부터 목포진 또는 목포항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 목포는 유달리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소설가 박화성 천승세가 있고, 작고한 문학평론가인 김현, 우리 시대의 시인인 김지하. 극작가 차범석, 동양화가인 허건도 이곳 목포에서 살았다.
“월출산 밑 고을 영암
나주의 서남쪽이 영암군이고 영암읍은 월출산 밑에 자리 잡고 있다. 백제 때 월나군(月奈郡)이었고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진 영암군의 풍속을 “농업에 전적으로 힘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 하였으며, 유관(柳觀)은 그의 시에서 “긴 내가 출렁출렁 성을 안고 흐르네”라고 노래하였고, 고려 때의 김췌윤(金萃尹)은 “땅이 창해바다와 접하며 장한 경치가 많다”고 하였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월출산을 김극기는 다음과 같이 예찬하였다.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그늘지며 개이고 추위와 더위가 모두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
월출산 남쪽에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가 있고, 서쪽에 영암군 구림면이다. 이 마을들은 신라 때부터 이름난 마을로서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곳에 위치하였다.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월출산은 수많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모습이 하나의 거대한 수석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가 되기도 하지만, 나무나 풀 한 포기 제대로 키울 수 없는 악한 산으로 보이기도 한다. 1973년 삼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이 산자락 밑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났다.
“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에서
“고려시대의 승 혜일(慧一)은 “앞 봉우리는 돌창고 같고, 뒷 봉우리는 연꽃 같았다” 하였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지었다.
“백련사 경치도 좋고 만덕산 맑기도 하여라. 문은 소나무 그늘에 고요히 닫혔는데, 객이 와서 풍경소리 듣는구나., 돛은 바다를 따라서 가고, 새는 꽃 사이에서 지저귀네. 오래 앉아서 돌아갈 길을 잊으니, 티 끝 세상 전혀 생각 없네.” 만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백련사(白蓮寺)에서 동백나무 숲길을 지나 산길을 걸어가면 정약용의 숨결이 바람으로 남아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이른다.
다산초당의 원래 건물은 일제 때인 1936년에 허물어졌고, 1958년에 다시 세운 단층 기와집이라 다산와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집 앞에는 그가 차를 끓여 마셨다고 전해지는 반석이 있고 집 뒤편에는 그가 유배에서 풀려 돌아가기 전에 썼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나주 들목인 율정점에서 정약전과 헤어진 다산은 나주 영산강을 건너 누릿재와 성전 삼거리를 지나 강진에 도착한 뒤 강진읍 동문 밖의 할머니 집에다 거처를 정한다.
오두막집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지은 그는 그 집에서 1805년 겨울까지 만 4년을 기식하였다.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창문을 닫고 밤낮으로 외롭게 혼자 살아가자 누구 하나 말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뻐서 혼자 좋아하기를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하면서,『사상례士喪禮』3편과『상복喪服』1편 및 그 주석註釋을 꺼내다가 정밀하게 연구하고 구극까지 탐색하며 침식을 잊었다”라고『상례사전』서문에서 기록하였던 것처럼 본격적인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활동에 전념한 그는 이곳에서「상례사전喪禮四箋」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며 살아가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도록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증하게 해야하니 후중하지 못함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한다. 이런 때문에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할 방’이라고 하였다. 마땅함이라고 하는 것은 의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만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 둔 사업은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때는 가경嘉慶 8년(1803) 11월 10일 동짓날…….”
다산은 1805년 겨울부터 강진읍 뒤에 위치한 보은산에 있는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곳에서 주로 주역 공부에 전념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 입으로 읊는 것, 마음속으로 사색하는 것, 붓과 먹으로 기록하는 것에서부터 밥을 먹거나 변소에 가거나 손가락을 비비고 배를 문지르던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인들『주역』이 아닌 것이 없었소”라고 썼던 시절이었다. 그 다음해 가을에 강진시절 그의 애제자가 된 이청李晴(자는 鶴來)의 집에서 기거했다. 다산이 만덕산 자락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유배생활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시인 곽재구는 다산초당 아래 마을에서 다산을 생각하는 시 한편을 남겼다.
귤동리 일박
곽재구
아흐레 강진장 지나
장검 같은 도암만 걸어갈 때
겨울 바람은 차고
옷깃을 세운 마음은 더욱 춥다(중략)
적폐의 땅 풍찬노숙의 길을
그 역시 맨발로 살 찢기며 걸어왔을까
(중략)
어느덧 귤동 삼거리 주막에 이르면
얼굴 탄 주모는 생굴 안주와 막걸리를 내오고
그래 한잔 들게나 다산
혼자 중얼거리다 문득 바라본
벽 위에 빛 바랜 지명수배자 전단 하나(중략)
정다산丁茶山 1762년 경기 광주산
깡마른 얼굴 날카로운 눈빛을 지님
전직 암행어사 목민관
기민시 애절양 등의 애민을 빙자한
유언비어 날포로 민심을 흉흉케 한
자생적 공산주의자 및 천주학 괴수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마을에 터 잡고 살던 해남 윤씨 집안의 귤림처사 윤단의 산정이었다. 정약용이 다섯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가 윤씨였고 귤동마을 해남 윤씨들은 정약용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 되었다. 유배생활이 몇 해 지나면서 삼엄했던 관의 눈길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정약용의 주위에는 자연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尹文擧 세 형제가 있어서 정약용을 다산 초당으로 모셔갔던 것이다. 다산초당 시절 각별하게 지냈던 사람이 백련사에 있던 혜장선사였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보림사는 전남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자락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원표(元表)가 세운 암자에다 860년경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하여 선종(禪宗)의 도입과 동시에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다.
보림사 경내에는 국보 제44호인 3층석탑 과 석등, 그리고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55호인 동부도(東浮屠),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157 ·158호인 보조선사 창성탑(彰聖塔) 및 창성탑비 등의 문화유산들이 있다.
다시 발길을 옮기면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쌍봉사에 이른다.
“한편 영산강의 한 지류인 지석강의 발원지가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쌍봉사 부근이다.
쌍봉사에 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쌍봉사雙峰寺 중조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시대의 문신 김극기金克己는 쌍봉사에 와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단청한 집이 붉고 푸른 숲 사이에 서로 비치니, 지경의 한가한 것 속된 눈으로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이었네. 학은 푸른 고궁에 날아서 지둔支遁(남북조 시대의 승려)을 하직하고, 물고기 금빛 못에 놀면서 혜관에게 감사하네. 어지러운 봉우리는 옥잠같이 난간에 이르러 빼어났고, 여울은 구슬패물처럼 뜰에 떨어지는 소리로세. 말하다가 조계물을 보니, 일만 길 하늘에 연해 노여운 물결 일어나네.” 이 절은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이 이곳의 산수가 수려함을 보고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여러 기록으로 보아 이 절은 철감선사가 주석하던 시기에 사세가 크게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절에는 신라의 문화재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것 중의 하나인 철감선사 부도(국보 제 57호)와 여러 점의 문화유산이 있다.
독실한 신심信心이 아니라면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부도 옆에는 보물 제 170호로 지정된 철감선사 부도비가 비신이 없어진 채로 있다. 그뿐만이 아니고 이 절에는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목탑인 대웅전(당시 보물 제 163호)이 있었는데, 1984년 4월초에 불에 타버려 새로 지어져 있어 아쉽기만 하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운주사에는 천불 천탑이 남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기슭에 위치한 운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제 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서 나지막한 산속에 들어 앉아있다. 이 절 이름을 배(舟)자로 삼은 것은 중생은 물이요 세계는 배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물방울 같은 중생이 모여 바다를 만들고 세계라는 배가 그 중생의 바다 위에 비로소 뜨는 것이며 역사는 중생의 바다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라는 깊은 뜻이 운주사의 배(舟)자에는 숨겨져 있다고 한다. 창건당시 운주사의 명칭은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雲住寺)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후 중생과 배의 관계를 의미하는 운주사(澐舟寺)로 바뀌었다가 다시 훗날에 그 두 가지를 섞어서 운주사(雲舟寺)로 전해왔다. 그러한 이름 탓인지 이 절을 처음 지을 때 해남의 대둔산이며 영남의 월출산 그리고 진도와 완도, 보성만 일대의 수없이 많은 바위들이 우뚝우뚝 일어나 스스로 미륵불이 되기 위하여 이 천불산 계곡으로 몰려왔다고 한다.
창건 설화는 신라 때의 고승인 운주화상이 돌을 날라다 주는 신령스런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창건하였다는 설과 중국설화에 나오는 선녀인 마고할미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운주화상이 천일기도를 하여 흙 같은 것으로 탑을 쌓았는데 탑이 천개가 완성된 다음천동선녀(天童仙女)로 변하여 불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거의 똑같은 솜씨로 만든 돌부처들의 모습을 보아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들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석공들이 석탑과 석불을 만들었던 연습장이었을 것이라는 허황한 설도 전해진다.
설화나 문학에 앞서서 운주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 석탑이 약 1천개씩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개의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개천사가 천불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재 천불산 좌우의 산등성이에 석불과 석탑이 산재한 것과 일치되며, 석불둘이 등지고 있는 것이 일치되고 있다.
천불천탑이 하룻밤 사이에
전남도청에서 펴낸『전남의 전설』에는 도선국사와 운주사의 전설이 이렇게 실려 있다.
‘도선이 여기에 절을 세우기 위해, 머슴을 데리고 와서 천상(天上)의 석공들을 불러 용강리 중장터에 몰아놓고, 단 하루 사이에 천불천탑을 완성하고, 새벽닭이 울면 가도록 일렀다. 천상에서 내려온 석공들은 절위의 공사바위에서 돌을 깨어 열심히 일했으나, 도선이 보기에 하루사이에 일을 끝내지 못할 듯싶으므로 이곳에서 9km쯤 떨어져 있는 일괘봉에 해를 잡아놓고 일을 시켰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었지만 천상에서 내려온 석공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 때 이들의 일손을 거들어주던 도선의 머슴들이 지쳐 꾀를 생각해 냈다. 어두운 곳에 숨어서 닭 우는 소리를 흉내 낸 것이다. 꼬끼오, 일을 하던 석공들은 가짜로 우는 닭소리를 듣고 모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이 때문에 운주사에는 미처 세우지 못한 와불이 생겼고, 6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화순군 도암면 봉하리의 하수락(下水落.아릿무지개) 일대의 돌들은 천상의 석공들이 이곳으로 돌을 끌고 오다 버려두고 가서 중지된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운주사 와불 아랫자락에는 칠성바위가 있다. 얼핏 보면 원반형 7층석탑의 옥개석으로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북두칠성이 이 땅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 한 모습과 흡사하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운주사 탑들의 배치가 하늘의 별자리와 같다고 보고 있고 고려시대 칠성신앙의 근거지였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 운주사에 과연 일천기의 석탑과 일천불의 불상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들이 많다. 불교에서는 천을 만수로서 무량무수의 여래를 표상하고, 천불신앙은 과거 장업겁, 현재의 현겁, 미래 성숙겁의 3세 3천불 가운데 현재 현겁에 대한 신앙을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천불과 천탑을 세운 것이 아니라 천불신앙에 천불천탑이었을 것이고 그 것도 하룻밤 새에 도력으로 세운 것이 아니고 11세기 초반에서 15세기 에 걸쳐 만들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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