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 가다

산중산담 2012. 12. 29. 14:45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 가다.

 

 

2012년 임진년 겨울 테마기행으로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 수록된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갑니다.

요즘 사람들의 최대 관심은 어느 곳에서 살 것인가 입니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이번 답사에서는 어느 정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꼽았던 ‘영남의 4대 길지’는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과 안동 도산의 토계부근, 안동의 하회마을, 봉화의 닭실마을입니다.

네 곳 모두가 ‘사람이 대대로 모여 살만한 곳‘ 대부분 산과 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고 들판이 넓어 살림살이가 넉넉한 곳입니다. 특히 낙동강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저습지를 개간한 하회마을 입구의 풍산평야는 안동 일대에서 가장 넓은 평야이며, 또 양동마을 건너편에는 형산강을 낀 안강평야가 발달해 있습니다. 현재 도산서원 근처 토계부근은 안동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살기에 아주 쾌적한 곳이었고, 충재 권벌의 자취가 남아 있는 유곡마을은 오늘날에도 양택지로서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곳입니다.

영남의 4대 길지와 경주의 최부자집, 청송의 성소고택(심부자집), 내앞마을의 의성김씨 종택,을 비롯하여 영남의 유서깊은 고택을 찾아갈 이번 답사에 참여를 바랍니다.

특히 토요일의 숙소는 서애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에 마련하였고 택리지 강연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과거를 보기위해 공부를 했던 병산서원의 하룻밤과 길지 탐방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양동의 서백당

 

영남의 4대 길지 중 한곳이라고 알려져 있는 경주시 강동면의 양동마을을 살펴보자. 영남대학교에서 발간한 『영남고문서집성』의 기록을 보면 고려 말 여강 이씨 이광호(李光浩)가 양동에 거주하였고 그의 손자 사위인 유복하(柳復河)가 이 마을에 장가들어 정착했다.

그 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진 월성손씨(月城孫氏) 손소(孫昭)가 유복하의 외동딸에게 장가를 들어 이곳에 눌러 살면서 일가를 이루었다. 여기에 이광호의 5대 종손인 이번(李蕃)이 손소의 고명딸과 결혼함으로써 이씨와 손씨가 더불어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월성손씨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양대 문벌을 이루어 동족 집단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양동마을은 오랜 세월 동안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이 양동마을은 경주시에서 16km쯤 떨어진 형산강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넓은 평야에 인접한 물(勿)자형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서남방 역수(逆水), 즉 형산강을 껴안은 지형이다. 그러한 형세가 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富)의 원천이라고 이 지방 사람들은 믿고 있다. 안강평야 대부분의 땅이 손씨와 이씨의 것이었으므로 이 ‘역수의 부’는 관념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이 옛날에는 수량도 많고 바닥이 깊어서 포항 쪽의 고깃배들이 일상적으로 들락거렸기 때문에 그 고장에는 해산물의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수량이 줄어들고 강바닥이 높아져 있어 어선이 출입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돼버렸다.

 

마을의 유래에 의하면 이곳 양동마을은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마을’, 즉 외손발복(外孫發福)의 터라고 하는데 이곳 손씨 대종가인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는 손중돈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있다. 외가에서 출생한 이언적은 별 다른 스승이 없이 외삼촌인 우재(偶齋) 손중돈(孫仲暾)이 관직생활을 하였던 양산, 김해, 상주 등지를 따라다니면서 학문적, 인간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 서백당의 며느리 방에서 서원에 배향되는 혈식군자(血食君子) 세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외손인 이언적이 태어난 뒤부터 그 방은 며느리 외에는 그 누구도 거처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월성손씨들은 지금도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 주장하고, 여강이씨들은 “그렇지 않다“고 맞서 두 집안의 갈등으로 비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들 중 그 무엇 하나 스승이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하회마을에 얽힌 유래

 

그 가운데 유성룡의 선조인 풍산 유씨 일가도 고려 말 하회마을에 터를 잡았는데 그 경위가 재미있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유씨 배판에”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김해 허씨가 터를 닦아 놓은 그 위에다가 광주 안씨가 집을 짓고 풍산 유씨는 안씨 집 앞에서 잔치판을 벌였다는 말로, 풀어 말하면 허씨들이 처음으로 하회마을을 개척했고 이어서 안씨들이 문중을 이루었으며, 유씨가 잔치판을 벌이고 흥청거릴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는 말이다.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과 서애 유성룡의 6대조인 전서공(典書公) 유종혜(柳從惠)가 풍산 상리에서 살다가 길지를 찾아 옮긴 곳이 지금의 하회마을이다. 전서공의 할아버지이자 고려의 도염서령(都染署令)이라는 관직에 있던 유난옥(柳蘭玉)이 풍수에 밝은 지사를 찾아가서 택지를 구했다고 한다. 이때 지사는 3대 동안 적선을 한 뒤라야 훌륭한 길지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였고, 그래서 유난옥은 하회의 마을 밖 큰길가에 관가정(觀稼亭)이라는 집을 지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적선을 베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뒤 유난옥의 손자인 전서공은 길지를 찾아 헤매다가 허씨와 안씨의 묘지를 피해 울창한 숲을 헤쳐 길목에 터를 잡고 숲을 베어 재목으로 삼아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거듭 무너지자, 지나가던 도사에게 왜 이렇게 집이 무너지는지를 물었다. 도사는 아직 이 땅을 가질 운세가 아니기 때문인데, 이 땅을 꼭 가지고 싶다면 앞으로 3년간 덕을 쌓고 적선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전서공은 큰 고개 밖에 정자를 지어 식량과 옷가지, 짚신 등을 마련해 놓은 후 큰 가마솥에다가 밥을 하여 인근 주민과 나그네들에게 먹이고 입히며 3년간 적선을 행하였다. 그 뒤에 집을 지은 것이 지금의 양진당 사랑채 일부라고 한다.

전서공이 길지를 잡아 발복한 까닭인지 점차 유씨들의 가문이 번성하고 겸암과 서애가 활약하면서 대단한 문벌을 이루게 되자, 화산 기슭의 허씨와 안씨들은 상대적으로 문중이 위축되면서 마을을 뜨는 사람이 늘어났다. 결국 하회마을은 화산 기슭에서 지금의 화안에 자리잡은 유씨들의 세거지로 중심을 이동하게 되었다.

유성룡의 선조가 하회에 가거지를 잡게 된 연유를 보면 전통시대의 사대부들이 살고자 했던 땅과 짓고자 했던 집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가를 유추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퇴계 이황이 살았던 도산

이중환은 우리나라 시냇가에서 가장 살만한 곳으로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들었다. 게다가 “도산은 두 산줄기가 합쳐져서 긴 골짜기를 만들었는데, 산이 그리 높지 않다. 태백의 황지에서 비롯된 낙동강이 이곳에 와서 비로소 커지고 골짜기의 입구에 이르러서는 큰 시냇물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최근에 와서 더욱 들어맞는다. 지금의 도산서원 일대는 안동댐으로 더욱 드넓어져 바다와 같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예안의 대표적인 사대부 가문은 예안 이씨였다. 이계양의 손자로 태어난 이황은 16세기 중반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계류를 찾아 온계(溫溪)의 아래쪽에 있는 토계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이황은 그 후 ‘퇴거(退去)하여’ 자리를 잡았다 하여 토계를 퇴계(退溪)라고 바꾼 뒤 호로 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퇴계 마을은 현재 안동댐에 수몰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지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중환은 “양쪽의 산기슭은 모두 석벽이며, 물가에 위치한 경치가 훌륭하다. 물이 넉넉하여 거룻배를 이용하기에 알맞고 골짜기 옆으로는 고목(古木)이 매우 많으며 조용하고 시원하다. 산 뒤와 시내 남쪽은 모두 좋은 밭과 평평한 벌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퇴계가 거처하던 암서헌(巖捿軒) 두 간이 아직도 있으며 그 집 안에는 퇴계가 쓰던 벼룻집과 지팡이, 신발과 함께 종이로 만든 선기옥형(璇璣玉衡: 옛날 천체를 관측하던 기구)을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안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옮겨진 도산서원의 전신은 도산서당으로서 토계리 680번지에 있다. 명종 15년(1560)에 퇴계 이황이 공조참판(工曹參判)의 벼슬을 내놓고 도산에다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다.

퇴계는 그 옆에 암서헌(岩栖軒), 완락재(琓樂齋), 농령정사(濃靈精舍), 관란헌(觀瀾軒), 역락서재(亦樂書齋), 박약재(博約齋), 홍의재(弘毅齋), 광명실(光明室), 진도문(進道門) 등의 건물을 지은 후 모두 자필로 현판을 썼다.

명종 21년(1566) 임금은 어명을 내려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그 경치를 대상으로「도산기(陶山記)」와 시를 짓게 한 후 병풍을 만들어 내전(內殿)에 두고 때때로 구경하였다. 또 후대의 영조와 정조 임금도 각기 화공에게 명하여 도산서당의 그림을 그려 오게 한 후 보고 즐겼다고 한다.

도산서당 뒤편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세워진 것은 선조 7년(1574)이었다. 서원을 창건하여 퇴계 이황을 배향하고, 그 다음 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도산서원’의 넉 자는 선조의 명으로 조선 중기의 명필인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썼고 뒤에 퇴계의 제자 월천(月川) 조목(趙穆)을 추배하였다. 뒤에 있는 상덕사(尙德祠)는 보물 제211호로 그리고 앞에 있는 전교당(典敎堂)은 보물 제 210호로 지정되었다.

 

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의 닭실마을

이중환이 “안동의 북쪽에 있는 내성촌에는 곧 이상(貳相: 두번째 재상이라는 뜻으로 정1품 삼정승 다음의 종1품인 좌찬성과 우찬성) 권발(權撥)이 살던 옛터인 청암정이 있다. 그 정자는 못의 한복판 큰 바위 위에 위치하여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둘러싸듯 흐르므로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고 기록한 내성촌은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있다.

이곳 닭실(酉谷)마을은 유명한 양반의 성씨인 안동권씨 중에서도 충재(冲齋) 권벌(權橃)을 중심으로 일가를 이룬 동족마을이다.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금닭이 알을 품은 모양’의 명당이라는 닭실마을은 동북쪽으로 문수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서남으로는 백운령이 뻗어 내려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이며, 동남으로는 신선이 옥퉁소를 불었다는 옥적봉이 수탉이 활개 치는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벌은 1496년 진사에 합격하고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연산군의 폭정하에서 급제가 취소되었다가 3년 뒤인 1507년에 다시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였다. 사간원, 사헌부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는데 1519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몰아낸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 당하자 귀향하였다.

그는 파직 이후 15년간 고향인 유곡에서 지냈으나, 1533년에 복직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1539년에는 병조참판, 그 해 6월에는 한성부판윤 그리고 1545년에는 의정부 우찬성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임 등을 적극 구명하는 계사를 올렸다가 파직되었고, 이어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벼슬에 있는 동안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하였고 조광조, 김정국과 함께 개혁정치에 영남 사람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후 1567년에 신원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좌의정에, 선조 24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닭실마을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던 동안 머물면서 일군 자취들이며 현재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권벌 종택의 서쪽 쪽문 뒤의 건물이 청암정이다. 권벌이 1526년 봄 집의 서쪽에 재사를 지으면서 그 옆에 있는 바위 위에다 정자도 함께 지었던 것이다. 커다랗고 널찍한 거북 바위 위에 올려지은 J자형 건물인 청암정은 휴식을 위한 것으로서 6칸으로 트인 마루 옆에 2칸짜리 마루방을 만들고 건물을 빙 둘러서 연못을 함께 조성하였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살고 싶은 곳‘

겨울이 접어드는 12월의 중순,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깨닫게 될 기행에 참여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