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오백 삼 십리를 가다.
2013(계사년)의 첫 기행이 나라 안에서 제일 아름다운 강 섬진강 상류를 걷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상초막골 데미샘에서 시작되어 임실, 남원 곡성 구례 하동을 지나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에서 남해로 들어가는 섬진강을 따라 네 차례에 걸친 여정이 펼쳐집니다.
눈 내린 겨울에 시작하여 매화꽃, 산수유꽃 만발하는 봄까지 이어질 이번 여정에 동참하십시오.
"나라 안에서 그 경치가 빼어날 뿐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슬픈 사연이 많기로 소문난 섬진강의 발원지를 사람들은 대다수가 팔공산으로 보고 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섬진강의 발원지를 중대산 또는 마이산으로 보고「택리지」에도 역시 마이산으로 실려 있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는 이렇게 실려있다.
“광양(光陽)의 섬진강(蟾津江)은 근원이 진안(鎭安)의 중대(中臺) 마이산(馬耳山)에서 나와서 합하여 임실(任實)의 오원천(烏原川)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운암(雲巖) 가단(可端)을 지나서 태인(泰仁)의 운주산(雲住山) 물과 합하여 순창(淳昌)의 적성진(赤城津)이 되는데 이것을 「화연」(花淵)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저탄(猪灘)이 되고, 또 동쪽으로 흘러서 남원(南原)의 연탄(淵灘)이 되며, 또 순자진(鶉子津)이 된다. 다시 옥과(玉果)에 이르러 방제천(方悌川)이 되며, 곡성(谷城)에 들어가서 압록진(鴨綠津)이 되고, 구례(求禮)에 이르러 잔수진(潺水津)과 합하였다. 잔수진은 근원이 동복(同福) 서석(瑞石) 동쪽에서 나와 현(縣) 남쪽 달천(達川)이되고, 남쪽으로 흘러 보성(寶城) 북쪽에 이르러서 죽천(竹川)이 되는데, 이것을 또 「정자천」(亭子川)이라고도 한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 순천(順天)의 낙수진(洛水津)이 되며, 잔수진에 이르러 순자강과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화개(花開) 소쪽 경계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여기는 조수(潮水)가 들어오는 곳이다. 또 광양(光陽) 남쪽 60리에 이르러 섬진강이 되는데, 그 동쪽 언덕은 곧 하동(河東)의 악양(岳陽)으로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는 이 물이 배류(輩流)한 삼대강(三大江)의 하나라 하였고, 이름을 「두치강」(斗峙江)이라 하였다” 1918년 일제가 만든《조선지지자료》는 ‘전북 진안군 우곡리 부귀산에서 발원하여 경남 하동 갈도까지 본류 길이는 212.3km'라고 기록하는데, 부귀산(806.4m)은 진안읍 북서쪽 정곡리 뒷산이다. 이후 건설부에서 만든《하천편람》이나 수자원공사에서 만든《전국하천조사서》도 이 발원지 개념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여러 각도로 계측한 결과 팔공산보다는 봉황산이 길이가 긴 것으로 추정하였고 그래서 섬진강의 상초막골 데미샘에 섬진강 발원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진 것이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68개의 제1지류와 129개의 제2지류 그리고 53개의 제3지류 및 15개의 제4지류를 받아들이면서 흐르다가 광양만에 이르러 남해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섬진강은 우리나라 남부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총 유역 면적은 4896.5㎢이고, 본류의 유로 연장은 212.3km로 남한에서는 네 번째 큰 강이다. 섬진강 유역의 가장 북쪽 끝은 북위 35°50’ 00”, 남쪽 끝은 북위 34°40’ 26”이며, 동쪽 끝은 동경 127°53’ 05”, 서쪽 끝은 동경 126°51’ 50”이다. 이렇듯 섬진강유역의 동쪽에는 낙동강 유역이, 서쪽에는 영산강과 동진강 유역, 그리고 북쪽에는 금강유역과 만경강유역이 접하고 있다. 그리고 총 유역 면적 4,895.5㎢ 중 전라남도가 47%, 전라북도가 44%, 경상남도가 9%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고려 때부터 배류삼대강(輩流三大江)의 하나라 해서 낙동강, 금강과 같이 풍수설로는 중앙으로 향해 흐르지 않고 그것을 등지는 강으로 보았다. 그런데 낙동강과 금강은 그 유역이 삼국시대뿐만이 아니라 고려 조선의 역사에서 각광을 받았던 곳이지만 섬진강 유역은 두 강 유역을 경계 짓는 그늘진 곳으로 내려왔다. 오늘날에도 섬진강유역은 산업화의 물결이 크게 미치지 못한 곳이라 다른 큰 강 유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시점에선 오히려 산업화에 휩쓸리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있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
"뒤돌아보면 구름 속에 숨어있는 저 팔공산(1150m)은 대구 팔공산에 가려 이름은 없지만 이곳 골짜기에서 섬진강이라는 강을 흘러 보내고 팔공산 너머 신무산의 뜬봉샘에서는 천리 길 금강의 수원지가 되고 있으니 나누어주기만 하면서도 시새움하지 않는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산이 저 산이 아닐까?(...)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린다. 이번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에는 이렇듯 보여줄 것들을 다 보여준다. 비 내리다 멎는 줄 알았더니 다시 또 눈이 내리고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옛날보다 얼마나 좋은 여건인가. 최병선 선생님의 말대로 “옛날 여자들은 길쌈 삼다가 하루해를 보냈고 남정네들은 짚신 삼다가 다 보냈다”는데 하루 종일 걷다보면 어디 짚신 몇 켤레가 금방 떨어지고 그러면 옛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또한 짚신이라는 것은 물에는 대책이 없어서 금방 스며들었을 것이다.
아침밥을 먹고 공주 팀들에 대한 배려로 마이산 탑사로 향한다. 마이산 탑사에 눈이 내린다. 아무도 없는 탑사에 눈이 내리고 눈 소리가 사각사각 들린다. 나무들마다 하얀 눈발이 쌓이고 우리가 오늘 걷는 이 길도 역시 정해진 운명의 수순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고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지 그 또한 모르는 일이다.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투키티데스는 “일은 사람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이치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기는 것이 편하다.” 라고 했고, 가이벨은 “운명보다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동요하지 않고 그 운명을 짊어지는 용기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에 하루 종일 눈이 내려 쌓인다 해도 또는 어제처럼 비가 내린다 해도 맞을 수밖에 없다. 1930년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처럼 우리들이 풍찬 노숙의 세월을 보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운명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않고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다만 그 재료와 씨앗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따름이다.”라고 말한 몽테뉴의 말을 기억한다면 오늘 일진이 아무리 예측불허일지라도 그렇게 우려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이산 탑사에 도착했다.(...)
풍혈냉천에 햇살만 쬐다
성수면 좌포리 양화마을 앞 대두산(459m) 밑에 있는 이 풍혈냉천은 조선시대 때부터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풍혈은 바위 사이에서 찬바람이 나오는 구멍이며 냉천은 삼복 더위에도 손을 넣고 1분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차갑다는 것이다.
이 냉천에 개구리가 뛰어들면 즉사했다고도 하고 이 냉천에서 목욕하면 웬만한 피부병 정도는 쉽게 낫고 무좀에도 특효가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풍혈과 냉천이 발견된 것은 1780년께로 당시 자연적인 지질의 변화로 한쪽에는 사람 체온보다 높은 온천이 두 군데 솟아나고 한쪽에는 찬바람이 나오는 구멍 2개와 삼복에도 찬물이 나오는 냉천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성수면 양화리의 대두산 기슭에서 나온 온천물은 성분이 좋아서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소문이 널리 퍼져 나병환자들이 떼를 지어 찾아와 완치를 보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들이 목욕을 하고 간 뒤에는 수질이 나뼈져 온천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져 갈 때 힘센 장사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불결한 온천이라고 흥분하여 큰 바위를 들어 온천을 매몰시켜 버리고 주위에 있던 버드나무와 음식을 해먹던 솥 기타 모든 기물도 다 파괴하여 버렸다고 한다.
그 뒤로 온천은 땅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 온천을 찾아내어 일확천금을 벌어 보겠다는 사람이 간간이 드나들어 온천이 있던 장소를 찾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43년 3월 전주에 사는 박성근이라는 사람이 온천을 다시 발굴하려는 큰 꿈을 품고 인부 3백여 명을 동원 많은 경비를 들여 탐색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장소를 찾아내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근처의 땅을 모조리 들추어 파헤치다시피 하여 온천이었던 곳으로 추측되는 부근에서 물길의 자취와 버드나무 솥 등을 발견하였고 이제 온천을 막아버린 바위덩이만 찾아내어 그 바위만 들어내면 온천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막바지 작업을 진행했으나 갑자기 박성근씨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그해 세상을 뜨자 온천발굴사업은 또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 찬바람이 나왔던 두 개의 냉혈 밑에서 2개의 냉천을 발견하였으나 지금은 지형이 변화되어 1개소는 없어져 버리고 찬바람 나오는 풍혈 1개소와 찬물 나오는 냉천 1개소만 남아 있는데 요즈음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급증하여 줄을 이어 몰려들고 있다.
풍혈은 삼복더위라 할지라도 온도가 6℃를 유지하고 있으며 자유당 때 굴이 무너지기 전만 하더라도 한 여름에 고드름이 매달린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일본이 2차 대전 막바지에는 여기에다 대규모의 한천공장을 세웠었고 또한 잠종저장소로도 사용되었다 한다.
냉천은 석간수로서 3℃의 온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으며 물에 함유된 성분이 또한 여러 가지라 위장병에도 좋고 피부병에 효과가 크고 특히 난치의 병으로 알려진 「무좀」도 치료가 된다하여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신정일의 <섬진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민음사 출판그룹 판미동 간에서
그 고운 섬진강의 물살을 따라 걷고자 하시는 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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