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이청준 문학의 산실인 소록도와 장흥 회진을 걷다.

산중산담 2012. 12. 29. 15:12

이청준 문학의 산실인 소록도와 장흥 회진을 걷다.

 

연중 기획으로 마련한 섬진강 기행이 참석자가 저조해 일정을 바꾸었습니다. 한국문학사상 가장 빼어난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인 이청준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상재한 <당신들의 천국> 무대인 소록도와, <선학동 나그네> <서편제> <눈길>의 무대인 장흥 회진의 이청준 생가와 천관산을 답사할 예정입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소록도의 해변과 언제 읽어도 가슴이 울컥해지는 <눈길>의 무대, 그리고 낡이 맑은 날은 제주도가 환히 보이는 천관산을 답사할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 뱀골재를 넘으면 지도상에 사람의 위 같기도 하고 주머니 같기도 한 고흥반도에 접어들고 고흥의 야트막한 산 너머로 보이는 소록도를 두고 한하운 시인은 시 한편을 남겼다.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붉은 전라도 길

 

한하운과 그의 동료들, 육신이 짖이겨지는 절망과 한의 세월 속에 자리했던 소록도를 배경으로 쓰여 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 이 실려 있다.

 

“내 말은 결국 같은 운명을 삶으로 하여 서로의 믿음을 구하고 그 믿음 속에서 자유나 사랑으로 어떤 일을 행해 나가고 있다 해도 그 믿음이나 공동운명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 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소록도少鹿島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에 속한 섬으로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남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있다. 남쪽은 거금도와 인접해 있고, 그 사이에 대화도·상화도·하화도 등 작은 섬이 있다. 지형이 어린사슴과 비슷하여 소록(小鹿)이라 했다고 한다. 본래는 군의 금산면에 속했으나,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마리와 함께 도양읍에 편입되었다.

이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 수용시켰는데, 그 기원은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1910년 세운 시립나 요양원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에는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센병 환자를 강제 분리·수용하기 위한 수용 시설로 사용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되기도 하였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4대 원장 슈호 마사토(周防正秀)가 환자 처우에 불만을 품은 환자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가혹한 학대를 당하였으며, 강제 노동과 일본식 생활 강요, 불임 시술 등의 인권 침해와 불편을 받았다. 소록도내에는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 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록도 감금실과 한센병 자료관, 소록도 갱생원 신사 등 일제 강점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인 건물과 표지판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소록도 병원은 해방 후에도 한센병 환자의 격리 정책을 고수하여 환자들의 자녀들이 강제적으로 소록도 병원 밖의 학교에서 공부해야 하였으나, 이후 한센병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고,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완화되면서, 한센병의 치료, 요양 재생, 한센병 연구 등을 기본 사업으로 하는 요양 시설로 변모하였다. 또한 1965년 부임한 한국인 원장에게서 과일 농사, 가축 사육에 종사하여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도록 경제적인 배려를 받았으며, 일부는 소록도 축구단을 결성하여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완화하였다.

섬의 주민은 국립 소록도 병원의 직원 및 이미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센병 환자들이 대부분이며, 환자의 대부분은 65세를 넘긴 고령이다. 환자들의 주거 구역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다.

삼림과 해변이 잘 보호되어 있어서 정취가 뛰어나며, 관광지는 아니지만, 걸어 다니면서 섬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길이 잘 닦여 있다.

2007년 9월 22일 고흥 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1160m의 연육교 소록대교가 임시개통하여, 육상교통로가 열렸다.

이곳을 무대로 소설가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을 썼는데, 일제 말에서 19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이규태의 빼어난 취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 소설은 살아 있는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편에서

 

이청준의 고향 장흥 진목리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소설가 이청준은 장흥군 대덕면, (회진면)의 진목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회진이라는 작은 포구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무렵의 몇 년간 그의 가족들이 차례로 죽어갔다. 그의 나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세 살난 아우의 죽음과 결핵으로 죽어간 맏형,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온가족들과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충격을 남겨 놓았다. 그때부터 그는 형의 정신적인 유물 이었던 책과 노트를 통해서 죽은 사람과의 영적 교류를 시작 하였다.

한줌의 재로 변해버린 형의 육신이 어린 이청준의 마음속에서 훌륭하게 재생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빛나는 문학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형의 기록을 전하기 위하여 지루함을 참으며 책을 읽었고.... 나는 그 형과만 지냈다. 책과 노트 속에서 형을 만나 그 형의 꿈과 소망과 슬픔들을 은밀히 이야기 들었다.”

이청준은 그의 작품「눈길」에서 가난과 어머니와 그 흰 백색의 눈(雪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남에게 팔린 그 집을 어렵사리 빌려 아들에게 차마 말도 못하고 하룻밤을 재운 뒤 면소재지 차부에서 보내고 돌아오는 어머니에 대한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겠냐. 눈발이 그친 그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그래서 어머님은 그 발자국 때문에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하셨겠네요.”

“간절하다 뿐이었겠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에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가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 나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하다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나하고 돌아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어머니 그때 우시지 않았어요.?”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작구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고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하게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받고 살거라.” <눈길>의 일부분

 

이청준은 <선학동 나그네> <당신들의 천국> <잔인한 도시> <서편제>등 수많은 작품 속에서 그는 권력과 언어의 문제 정치와 사회의 문제 그리고 한의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해 왔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진목리 마을은 다른 여느 마을이나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참나무가 많아 참냉기 또는 진목이라 부르는 진목 마을에서 참나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참나무가 참나무인 것은 어느 때부터였을까? 신라가 가장 번성하였을 때 17만호의 경주시내 집집마다 숯불로 불을 지폈던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숯 중에는 참나무 숯을 최고로 쳤고, 나무 역시 강했기 때문에 참나무라고 하여서 참 진眞자 진목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봄날 나라의 모든 산들마다 피어나는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부르고 철쭉은 개 꽃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이청준선생이 태어난 그 집에는 그가 태어난 집에는 20여 년 전에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다가 지금은 군에서 매입하였다. 그 집 담 벽 속에는 철늦은 도마도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 받으며 삭그미(이진목)마을과 도청제를 지나자. 천관산이 눈앞이다.

대덕읍을 지나 방촌리에 접어들면 제법 규모가 큰 고인돌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옛 사람들의 무덤들이 옹기종기 서있는 소나무 숲을 벗어나 바라보면 천관산이 듬직한 맏형 같은 자세로 얼굴을 내민다.

이곳 방촌리에도 재미있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할미처럼 구부정하게 생긴 할미바우 밑에 있는 사랑바우는 위가 넓고 평평해서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바우라고 부르고, 세태 동 남쪽에 있는 회화나무인 여기정女妓亭(삼괴정)은 이곳 방촌리가 고려 시절 회주고을이었을 때 기생 명월明月과 옥경玉京이 이 나무 밑에서 놀았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사람이 엎어져 있는 것 같다고 엎진바우라는 이름이 붙은 바우 아래에 있는 턱이진 바우는 아들바우라고 부르는데, 아들을 바라는 사람이 돌을 던져서 그 턱에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천관산 자락의 오래된 옛집인 위씨 가옥의 고즈넉함을 맘껏 받아들인 우리 일행은 아침밥을 먹고 산행에 접어들었다.“ <신정일의 <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에서

 

이청준 선생의 문학의 현장인 소록도, 이청준 선생의 고향인 장흥의 회진과 남도의 명산 천관산을 답사하고자 하시는 분의 참여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