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의 사월 초파일 삼사三寺기행과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계사년의 삼사기행이 봉암사와 김용사. 대승사 그리고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떠납니다.
일 년에 사월 초파일 하루만 문을 여는 봉암사와 문경지역의 아름다운 절, 대승사와 김용사를 찾아갑니다. 예천의 용문사 아래 초간정을 답사한 뒤 병산서원에서 하룻밤을 묵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하회마을로 가는 길을 걷고, 영주의 무섬과 소백산 자락 길, 그리고 죽령 옛길을 답사한 뒤 돌아올 예정입니다.
“봉암사는 스님들의 수도도량이라서 일 년에 하루만 절을 개방한다. 그래서 절을 개방하는 사월초파일이
면 전국각지에서
모인 신도들로 가은에서 괴산에 이르는 지방도로 뿐만이 아니라 입구에서 절 안까지 사람들의 발길로 차
들이 꼼짝을 할
수가 없다.
가끔씩 절에 가면 공부하는 선방 근처에서 떠든다고 벽력같이 화를 내는 스님들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 둥 거린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절해고도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어느 소음에도 동요하지 않
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쩌겠는 가, 그것은 내 생각이고, 저마다 스스로가 정한 계율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을, 사
람들의 발길이
잦아서, 또는 말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수도에 방해가 되면 안 되겠지 생각하며 봉암사가 자리 잡은 희
양산 자락에 접
어든다. 이른 새벽인데도 봉암사 입구는 차들이 너무 들어차 천천히 입구에서부터 걸어 들어간다. 날이 아
직 차고 지대가
높아선지 하늘에 별들이 주먹만큼이나 크다. 가로등은커녕 불빛도 없는 길을 어둠 속에 걸어가며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다
운 길인가를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지만 어둠 속에서 이 길의 아름다움을 느낄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
다. 밤길은 의외
로 멀다. 얼마쯤 올랐을까? 불빛이 보이고 봉암사에 이르러 가득 찬 사람들을 헤집고 초파일 날 새벽예불
에 동참한다.
봉암사는 경상북도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噫陽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로써 대한불교 조계종 제8
교구 본사인 직
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의 한 곳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인 이 절은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에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이 창건한 절이다.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 비
문에 의하면 도
헌은 성이 김씨로 이름은 도헌道憲이고 자는 지선智詵이며, 서라벌 사람이다 .경주 사람인 김찬양의 아들
로 어려서부터
불도에 뜻을 두고 부석사에서 출가하였다. 키가 8척에 기골이 장대하고 말소리가 크고 맑아 “참으로 위엄
있으면서 사납
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열일곱에 구족계를 받은 그는 정진에 힘썼고, 그의 나이 스물에는 따르는 사
람이 많았다. 그
는 임금이 경주에 와서 있을 것을 간곡히 요청했는데도 수도인 경주에 나아가지 않고 수행정진에만 힘을
썼다. 그러던 어
느 날이었다. 심충이라는 사람이 희양산에 있는 땅을 내어놓으며 그곳에 절을 짓기를 청하자 와서 보고는“
이 땅을 얻은
것은 어쩌면 하늘의 뜻일 것이다. 이곳에 승려들이 살지 않는다면 이곳은 도둑들의 소굴이 될 것이다.” 하
고서 이곳에 절
을 지었는데 이절이 희양산문의 본 찰이 된 것이다. 경문왕이 사신을 보내어 청하였으나 가지 않고, 헌강
왕이 왕사를 삼
았으나 역시 사양하고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수 59, 법람이 43년이었고 지증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
의 존경과 애도
의 뜻으로 내려진 시호이다.
봉암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지증대사가 이 자리에 절을 짓기 위해 큰 연못을 메우려 하는데 그 자리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 지증대사는 신통력으로 그 용을 구룡봉으로 쫓은 뒤에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는데, 백운곡白雲谷에 있는 계암이라는 바위는 봉암사를 창건할 당시 날마다 그 바위 위에서 닭 한 마리가 새벽을 알렸다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을 봉암사라고 이른다고 한다.
그 뒤 이 절은 935년(태조18)에 정진대사(靜眞大師)가 중창하였고 정진대사원오탑(靜眞大師圓五塔) 및 탑
비가 보물 제
171호와 제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진국사탑비는 규모가 지증대사탑비와 같으며, 일주문을 100m 앞둔
곳에서 오른쪽
으로 계곡을 건너가면 밭 가운데 있다. 한편 희양산문曦陽山門은 선종 9산문 중의 하나로 정진국사靜眞國
師의 긍양兢讓
이 희양산의 봉암사에서 선풍을 선양하여 하나의 문파를 이루었으므로 희양산선문 또는 희양산선파라고
부른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가 1431년(세종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
설의 金剛經五
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년(현종 15)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神和)가 중건하였고, 1915년에는
세욱(世旭)이
퇴락해가는 건물들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
로 전해지는 극
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
珠)를 얹고 있음
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禪院)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
과는 달리 편액
을 걸고 있지 않다.
이 절의 오른쪽에는 보물 제137호인 지선의 사리부도 지증대사적조탑(智證代師寂照塔)과 보물 제138호인
지증대사적조
탑비가 있다.
그리고 절 앞 뜰에는 지증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는 보물 제169호의 아름다운 5층 석탑이 있는데, 기단구
조에서 특이함
을 보이며 상륜부가 완존함으로써 주목되는 탑이다.“
“문경지역의 이름난 절로는 신라 헌강왕 때 지증대사가 세운 봉암사(鳳巖寺), 산북면 금룡리에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세운 김룡사(金龍寺), 농암면에 원효대사가 세운 원적사(圓寂寺)와 심원사(深源寺), 문경읍에 보조국사가 세운 혜국사(惠國寺), 신라 진평왕 때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산북면 공덕산 꼭대기에 내려앉자 그 바위 옆에 세웠다는 대승사(大乘寺)가 있다.”
“금곡천변을 조금 올라간 곳에 1582년에 지은 초간정(草澗亭)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지었고 1580년에서 91년까지 11년 동안 일상생활에서 국정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일들을 기록한 ?초간일기(草澗日記)?(보물 제879호)를 남긴 초간 권문해(權文海)가 1582년에 지은 별채 정자가 초간정이다.
권문해는 마흔아홉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초간정을 지었는데, 처음에는 작은 초가집이었으며 초간정사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에 탔던 것을 17세기에 다시 세우고 1870년에 연이어 중수하여 권문해의 유고(遺稿)를 보관하는 전각으로 삼았다.
금곡천변에 소나무와 여러 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자리 잡은 초간정 앞에 서면 권문해가 30 년을 동고동락하던 아내를 잃고 90일장 장사를 지내면서 아내에게 바쳤던 뼈에 사무치는 제문이 떠오를 것이다.
“… 나무와 돌은 풍우에도 오래 남고 가죽나무․상수리나무 예대로 아직 살아 저토록 무상한데 그대는 홀로 어느 곳으로 간단 말인가. 서러운 상복을 입고 그대 영제 지키고 서 있으니 둘레가 이다지도 적막하여 마음 둘 곳이 없소. 얻지 못한 아들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날 가면서 성장하여 며느리도 보고 손자도 보아 그대 앞에 향화 끊이지 않을 것을, 오호 슬프다.
저 용문산을 바라보니 아버님의 산소가 거기인데 그 곁에 터를 잡아 그대를 장사 지내려 하는 골짜기는 으슥하고 소나무는 청청히 우거져 바람소리 맑으리라. 그대는 본시 꽃과 새를 좋아했으니 적막산중 무인고처에 홀로 된 진달래가 벗되어 드릴게요. …
이제 그대가 저승에서 추울까봐 어머님께서 손수 수의를 지으셨으니 이 옷에는 피눈물이 젖어 있어 천추만세(千秋萬歲)를 입어도 해지지 아니하리다.
오오, 서럽고 슬프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우주에 밤과 낮이 있음 같고 사물이 비롯과 마침이 있음과 다를 바 없는데,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니 그림자도 없는 저승 나는 남아 어찌 살리.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서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었다오. 상향.”
임을 여윈 슬픔이 이다지도 깊으랴. 흐르는 물위에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고 해 뜨지 않은 아침녘의 초간정은 쓸쓸함으로 가득하다.“
연화부수형인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은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지정 민속마을로 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豐山柳氏) 동족마을로, 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남․서 방향으로 감싸는 명당이며 지형은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다. 풍산 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許氏)․안씨(安氏)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 13년(1635)의 ?동원록(洞員錄)?에도 삼성(三姓)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이전에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마을을 감싸 도는 화천(花川)은 낙동강 상류이며 그 둘레에는 퇴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그 서북쪽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백사장이 펼쳐진 강 건너에는 층암절벽이 펼쳐지고 그 위에 여러 누정이 자리 잡고 있어 승경(勝景)으로서의 면모도 잘 갖추고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부용대(芙蓉臺)의 절벽과 옥연정(玉淵亭)․화천서당이 있으며, 서북쪽에서 강물이 돌아 나가는 부근에는 겸암정(謙菴亭)과 상봉정(翔鳳亭)이 자리 잡고 있다. “하회별신굿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별신굿이 열릴 때면 나라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하회별신굿에 쓰이던 가면들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제작연대가 고려시대로 추정되어 하회마을의 역사적 배경이 뿌리 깊음을 말해준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부용대가 위치한 광덕리(廣德里)는 본래 풍산현 지역으로서, 넓은 둔덕이 있다 하여 광덕․광덕이․광덕리라 하였다. 부용대는 낙동강가에 높이 80미터가 넘는 높이로 깍아지른 듯 서 있는 암벽으로, 그 밑에 달관대(達觀臺)․운송대(雲松臺)․형제암이란 이름의 기이한 바위가 있으며, 그 사이 사이에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또한 서쪽 기슭에 겸암정(謙岩亭)․봉상정(鳳翔亭), 동쪽 기슭에 옥연정(玉淵亭)의 고적이 있다. 바로 밑에는 서남쪽으로만 흐르는 낙동강이 이곳에 이른 뒤 동쪽으로 흘러서 추월담(秋月潭)․옥연(玉淵)을 만들어낸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은 차마 혼자서 바라볼 수가 없을 만큼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옥연정은 부용대 동쪽 기슭에 있는 정자로 선조 19년(1586년)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창건하였다. 낙동강이 이곳에 이르러 옥같이 맑은 못을 이루었다는 뜻에서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불렀다. 옥연정 남서쪽 뜰에는 삼인석(三印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유성룡과 노수신(盧守愼)․정전(鄭瑑)의 3정승이 놀았다고 한다. 삼인석 밑에는 청파대가 있는데 낙동강 물이 범람하여 높이 파도를 쳐도 이 바위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청파대(淸波臺)’라는 석 자를 새겼다고 한다.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유성룡의 고향이 바로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이다.
유중영(柳仲班)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유성룡은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으며, 스물한 살 때 퇴계 이황을 찾아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받았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 하였고, 이항복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이원익(李元翼)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스물다섯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정여립 모반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국공신(光國功臣)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주어 실전에 활용하게 하였다.
말년인 1598년에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보 132호의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 ?신종록(愼終錄)? 등을 저술하였다.
1629년 유성룡의 셋째아들 유진(柳袗)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철종 14년(1863)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에도 잘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
도처에서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의 거봉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적 성과가 크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 잡았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주시 순흥면 면사무소 뜰 안에 흥주도호부 봉서루鳳棲樓라는 누각이 있어 이곳이 옛 시절 순흥의 옛 이름인 순흥도호부의 관아자리였음을 짐작케 한다. 봉서루는 공민왕의 글씨로 전해져 오는데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에서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한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래서 고을 남쪽에 누각을 지어 앞 쪽의 현판에는 봉황이 깃들어 산다는 의미로 봉서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영봉루迎鳳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축安軸이 지은 봉서루 기記에는 “나라의 동남쪽에는 본래 산은 하나인데 고개는 세 개이니, 태백. 소백. 죽령이 그것이다. 영남에 뿌리박은 첫째 고을은 바로 우리 흥주興州이다. 주에서 동쪽으로 가면 태백이 황폐하고 편벽된 마을이 나오고, 주에서 북쪽으로 가면 태백이 나오며, 북쪽에서 약간 꺾여 가면 소백이 나오는데 큰 길은 하나도 없고, 주에서 서쪽으로 가면 죽령이 나오는데 임금이 계신 서울로 가는 길이다. 주에서 남쪽으로 가면 길이 갈려서 동남의 여러 읍으로 통하게 된다. 고을의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에 나그네들이 출입하는 것은 동.북쪽으로는 없고, 모두 서. 남쪽 뿐이다. 옛 적에 이곳에 고을을 설치하였을 때 오직 서 남쪽에만 후정後亭을 세운 것은 고을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고 하였다.
강희맹은 그의 시에서 “ 사람은 다락에 기대었고, 새 자리는 비었으니, 달 밝은 밤의 피리 소리는 바람을 막지 못하누나. 황량한 옛 보루는 그냥 반이 있는데 기억하는가. 닭잡고 오리 잡던 공적을,” 라고 하였고 조원曹瑗은 “산 옆에는 민가 열채 다만 아는 것은 농사일뿐.” 라고 하였는데, <해동잡록> 4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아름다운 절집들과 나라 안의 이름난 물도리동인 하회마을과 무섬그리고 병산서원에서 하룻밤 묵고 싶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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