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모음글 정리

신정일(우리땅걷기)대표님 글 모음 2 - 책3

산중산담 2013. 12. 15. 10:30

3-2 습관은 제 2의 본성이다.

세상이 변천하다가 보니 한 마디 한 마디 해주는 소리가 다 잔소리가 되고, 그렇다고 그 말한 바를 따라서 실천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생활 습관이 올 바라야 세상을 살기가 원활하고 수월하다는 것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그 습관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구나 알듯이 옷은 몇 번 입고 나면 새 것이었을 때보다 잘 맞는다. 옷감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응집의 습관이다.
자물쇠는 사용할 수록 잘 작동한다. 이 조항의 소멸이 바로 습관이다.”
“습관은 제 2의 본성이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습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연적인 사물은 습관의 결과로 다른 것일 수는 없다.
예컨대 돌은 천 번을 공중에 던진다 해도 위로 올라가는 습관을 지니지 못한다.”

 

3-15

내가 삶을 살아가는 길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조심하고 조심하며 살았는데도 삶은 마냥 어수선하고, 허접하기 그지없다.
지금에서야 인생에도 길이 있고, 저마다 정해진 길을 간다는 것을 실감하고 실감할 뿐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마음을 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해봐야겠고 다짐한다. 그것이 결국 못 이룰 꿈일지라도

 

3-18

이 세상 그 언제고 모두가 더불어 사는 낙원樂園이 있었던가?
목 놓아 기다리는 세상은 항상 기다림으로만 끝나고 가끔씩 실망하여 마음을 내려놓고자 해도,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세상,
그래서 김소월 <옛날>이라는 시가 가슴을 친다.
“생각의 끝에는 졸음이 오고 / 그리움의 끝에는 잊음이 오나니 / 그대여, 말을 말아라, 이 후後부터 / 우리는 옛날 없는 설움을 모르리.“
지금 이순간도 지나고 나면 고금古今인데, 하물며 옛날의 그 설움이 무에 그리 서러워서 이 한 밤에 쓸쓸한 미소를 날리고 있는 것인지,

 

3-20

내가 그렇게는 살지 않은 듯 싶은데, 너무 시간에 얽매어 한가롭게 사는 것의 즐거움을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이 아쉬운 것이다.
좀 더 한가하게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한가하게 사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바삐 서두르는 일을 한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한가하게 받아들이는 일에 바삐 서두를 수 있
다.

 

3-29

‘인연이란 어기기를 좋아하고 어긋나기를 좋아 한다’는 말처럼

아직 사흘 동안의 도보답사를 남겨둔 도반들을 아쉬움 가득한 눈빛만 남기고 돌아왔으니,
지금이라도 내가 그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본래 정한 길을 아무 탈 없이 걷기를 바라는 것 뿐,
그래서 에픽테토스의 말을 전해 줄 수 있을 뿐이다.
“화살이 날아가는데도 길이 있고, 마음이 움직이는데도 길이 있다.
마음은 조심할 때에나 마찬가지로 전진하여 그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부디 애초에 설정한 그 목적지 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마음속이 봄의 기운이 충만하여 돌아가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3-30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숙명적으로 오고 간다는 것만을 알게 된다.
인생은 결국 그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감내堪耐할 수밖에 없으며,
달이차면 기울듯이 결국 돌아가고 돌아가는 세상의 이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가끔씩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내게만 왜 이렇듯 ‘운명이 불공평하고 가혹한가?’ 하면서 발버둥을 칠 때가 있다.
어디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만 그러한가?
가고 오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한 사람의 생애는 그야말로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만큼이나 빠르게 오고 간다.

그 가고 오는 것이 <전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 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강물이 다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를 채우지 못하듯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지혜와 지식을 다 모아도 自然 앞에는 한갓 헛수고이고, 무용지물일 때가 더 많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의 제 3부.<낡은 게시판과 새로운 게시판에 대하여>에서
우주 순환의 이치를 다음과 같이 설파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아간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 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며, 모든 것은 다시 만나게 된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이렇듯 영원히 자신에게 진실하다.

매 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이곳을 중심으로 저곳이라는 공이 굴러간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이라는 오솔길은 굽어 있다.“
모든 것이 그렇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도 없고, 오고 가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흐르고 흘러가다 소멸되는 구름 같이 가없는 인생길에서
잠시 만나고 헤어지기도 하고, 오랜 억겁의 인연으로 계속되는 그런 소중한 인연에 기대어 사는 우리들의 생,
그 생이 문득 생각하니 어찌 그리 쓸쓸한 것인지,
그래서 이 한밤에 못내 그리움으로 뒤척이는 시간이 어찌 그리도 허허로우면서 충만한지?,

 

3-31

( ) 이런 마음의 자세로 사는 사람이 많다면 세상이 얼마나 밝아지겠는가? 그런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 이 세상의 이치이다.
저마다 사는 방법이 있고, 그 길에서 벗어나서 사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바르게 살고 그르게 살고도 저마다의 잣대로 재는 것이라서 어느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도 없다.
다만 자기 자신의 거울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데, 좀 더 넓게 세상을 보는 지혜, 그것을 터득했으면 하는 마음, 그것뿐이다.

 

3-32

며칠 전 이른 아침,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의 안동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보았습니다.
호수를 둘러 싼 산들이 꽃의 향연을 벌이는데, 그 산을 감싸고돌던 구름,
나는 한 사람의 길손이 되어 날씨가 추워서 귀가 시린데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을 넋을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의 꽃들이 몇 번의 비가 바람 속에 내리면 속절없이 사라져 갈 것을 미리 예감했는지도 모르지요,
이런 저런 이유로 돌아다니다가 돌아오던 길, 바람 속에 비가 묻어 있었습니다. 가랑비가 내릴지, 소낙비가 내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일은 이 땅에 비가 내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3-33

“우주의 모든 사랑은 바로 당신이 있는 그 자리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당신이 어서 알아차리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자신의 화분에 스스로 물을 주는 당신을 사랑하라.” “사랑은 한계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싶은 만큼 무한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신은 무궁무진한 사랑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삶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주의 법칙은 ‘긍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을 끌어당긴다.’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항상 풍족하게 느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반대 우주의 법칙은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끌어당긴다.’입니다.

‘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 기분 느낌들은 더 많은 부정적인 생각, 기분 느낌들을 가져오게 되고, 그 결과 사랑은 적어지게 됩니다. “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의 뜬 구름처럼 어느덧 소멸되기도 하고, 애당초 그런 구름 같은 행운마저도 만날 수 없는 사람 들도 많이 있다.

 

3-34

온 천지에 내리는 봄비를 산에서 바라본 대희라는 시인은<산에 봄비가 내리는데>라는 시 한 편을 남겼지요.
“빈산에 흠뻑 봄비가 내리고 / 복숭아꽃 살구꽃 울긋불긋 피었네. /

산중이라 꽃 피어도 보는 이 없어 / 저 혼자 시냇물에 그림자 드리웠네.
이 비 그치고 나면 아직 피지 못한 봄꽃들이 줄을 이어 피어나고 나뭇잎들이 무성하게 피어나서 바람결에 합창소리를 들려줄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온산을 물들인 꽃들이 피었다 진 강변에 꽃들이 강물을 덮고 흐를지도 모릅니다.

 

3-35

누구에게나 번뜩이는 영감 같은 것이 발현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정리하고 세상에 펼쳐 놓느냐

아니면 생각 속에서 맴돌면서 내 놓지 못하느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만이 그럴까?  아니라?고 대답한 사람이 바로 괴테였다.
“언제나 내겐 체험의 사용이 전부였다. 허공에서 창조해내는 것은 결코 나의 방법이 아니었다.
나는 세계를 나의 천재성보다 언제나 더 천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느 길이건 걷다가 보면 만나는 모든 사물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기하지 않은 것들이 없다.
얄팍한 머리나 좁은 가슴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미지와 경탄의 대상이 잘 차려진 밥상처럼 펼쳐져 있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만나는 것이 바로 길이다. 그 길을 걷다가 보면 나도 당신도 문득 천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

 

3-39

가다가 길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추어 있을 때,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때,그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큰 길은 푸른 하늘처럼 넓기만 한데 저만 홀로 나가지 못한다.“
이백의 시 구절이다.
남들이 가는 길은 넓고도 평탄한데 내가 가는 길은 좁고도 험해서 나아가지 못할 때 그런 때가 있다.
그런 때 크게 심호흡 한 번 하고 내 마음을 내려놓고 아니, 죽은 시체처럼 온 몸에 힘을 다 빼고
오랜 시간을 누워 있으면 서서히 내가 나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누구나 가는 것인데,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지만 때로 어떤 죽음은 태산같이 무겁고 때로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사마천의 말이다.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3-40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 인생인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것인지,
“ 참으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참으로 알고 있지 않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노자 <도덕경> 81장에 실린 글이다.
그래, 내가 아는 것이 천지간에 흩어진 작은 먼지하나보다도 작은 것을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 하고,

그 아는 것을 말하고 가끔은 후회로 발등을 치기도 했던 것은 아닐까?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말을 하지만,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장자> 26장에 실린 글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너 편 아파트의 밝고도 밝은 형광등 불빛 하나,

 

3-51

“작품을 뽑는 방법의 요체는 온갖 맛을 모두 살리고 한 가지 색깔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뽑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택을 하되,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온통 한 가지 색깔로 만드는 것은 뽑아서 다시 뒤섞는 것에 불과하므로 애초부터 뽑았다는 의미가 없다.
( )그 모양을 대충 보아 넘기면 그 실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지만 세말하게 음미하면 그 맛은 무궁하다.

“물은 아무런 맛이 없다.” 그러나 목마른 자가 물을 마셔보라. 그러면 천하의 그 어떤 맛있는 것도 이보다 더하지않으리라.

지금 그대는 목마르지 않다. 그러나 저 물의 맛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북학의>의 저자인 초정 박제가.의 글이다

 

3-57

가고 오는 세월의 흐름 또한 인간이 정하고서 그 세월의 흐름을 감지하고서 쓸쓸해하고 허무해 하는 것 또한 인간인 것을,
하루가 짧은 것 같으면서 길기도 하고, 하루가 어떤 때는 한 편의 우화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멍 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으니,
나도, 그대도 흐르고 흘러가가다가 소멸되는 구름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이 시간에도 오늘과 내일이 교차되고 있는 것을,

 

3-59

이 생각, 저 생각들이 섞이고 섞여서 엉뚱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또 소멸되는 그 흐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으랴.
그래서 소월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생각 끝에는 졸음이 오고 / 그리움 끝에는 잊음이 오나니 / 그대여 말을 말아라. / 이후부터 우리는 옛날 없는 설움을 모르리.“
가고 오는 세월은 세월이 맞지만 그 속에 어디 정해진 것이 있는가,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어제 같은 그 시간의 흐름 속에 나도 한 사람의 길손일 뿐인 것을,


3-60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조금씩 양보하고 체념하는 것인데, 그 양보와 체념이 어려운 것이지요.
세상에 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곧 운명이라고 하지만,
그 운명을 거부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슬픔입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는 또 한 마디의 말,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따라서 같은 약속의 장소로 가는 순례자들이다.”
그 말이 지금의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듯한, 깊은 밤 세상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3-62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지만 거울은 비기는 하였으나 활물活物이 아니며, 마음을 물에 비유하지만 물은 활물이기는 하나 깨닫지 못하며,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하지만 원숭이는 깨닫기는 하나 신령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마음은 끝내 어디에다 비유할 수 없는가?
먼 곳은 거울에 비유하고, 깨닫는 곳은 원숭이에 비유하고, 여기에다가 신령을 더한다면 된다.

거울은 본래 밝지만 먼지가 앉으면 어두워지고, 어두움을 제거해야 본래로 돌아가게 되므로

 

3-64

옛 사람들의 책 읽는 모습은 어떠했을까?
“청년으로서 글을 읽는 것은 울타리 사이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중년中年으로서 글을 읽는 것은 자기 집 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며,
노년老年에 글을 읽는 것은 발코니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독서의 깊이가 체험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에 실린 글이다.

 

3-68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고, 아무도 나를 위로해 주지도 않으며, 어디에도 기댈 것이 없는, 그런 시간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구세주救世主는 이미 구세주가 필요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즉 구세주는 우리의 도착 하루 뒤에 겨우 나타날 것이다.

마지막 날이 아니라 마지막 다음 날에 나타날 것이다.”
모든 기다림의 숙명일 것이다. 기다린 것은 언제나 오지 않았다?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보다 단지 희망만을 지니고 여행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고대의 현자들은 도착을 어떻게 보았을까? “천천히 서둘러라. 그대는 곧 도착할 것이다.”
그러나 도착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꿈이나 희망, 그리고 행복이나 기쁨이 그렇듯이
‘순간은 도착하자마자 출발하여 머물러 있지 않는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다시 출발을 꿈꾼다. 어디로 갈 것인가?

 

3-69

누가 누구를 걱정해주고,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으랴. 저마다 다른 우주宇宙라서 저마다 가야하는 길이 다를 것이다.
나하고는 아주 다른 길,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어쩌다 인연이 되었지만 한 번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는 길,
그 길이 도처에 있고, 그 시간이 지금 이 시간일지, 아님 내일의 시간일지 나도 모르고 그대도 모른다.
다만 지금 이렇게 살아 있고, 저렇게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 뇌성병력이 치며 장대비가 내리는 그것뿐인 것을,

 

3-79

가끔은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갔던 적이 있다.

 ‘길이 없으니, 가지마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내가 가면 곧 길이 아니겠는가.‘ 고집을 부리고 갔다가

억수로 고생만 하다가 되돌아 나올 때의 그 낭패감을 뭐라고 설명하랴.
길은 도처에 있을 것 같은데, 그 길을 찾지 못해, 무수히 후회하고 후회하는 길 위의 인생

“여행자여 길은 없나니 길은 걸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말과 ”헤매다가 길을 잃는 것이 한 번도 헤매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는 말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인 것을 어찌하랴.

 

3-83

기다림이 그리움으로 변하는 시간에는

갈잎을 흔드는 바람소리만 들려도 행여 그대인가 뒤돌아보고, 흐르는 강물소리만 들려도 가던 발길을 멈추는 것이지요,
술잔을 받아 놓고서, 입만 축이고 있다가 조금 늦어 돌아오는 길,
우뚝 선 나무들이 문득 그대인가 싶어서 한 참을 바라보다 돌아왔지요,
곧 이어서 시월이 가고 십일월의 초하루가 열릴 테지요,  더 황량한 바람이 부는,
그러다가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는 그 계절, 동짓달에는 무엇을 그리워 하며 가는 세월을 바라보아야 할런지요,

 

3-88

백두대간 능선 속, 곧 산속으로 들어가면 길이나 나무 등, 산의 주변만 보지 산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산림청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이 <백두대간 산촌 마실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인제에서 서쪽으로 돌아 지리산에 이르고 다시 거창 문경, 양양을 지나 고성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산자락을 따라 걷는 기나긴 여정을 따라가면 백두대간을 제대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어디 백두대간만 그럴까?
사람 역시 그러하다. 외면만 가지고 사람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일부분만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

특히 어느 학교를 나왔고, 외모가 어떻고, 어떤 옷을 입었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다.
오래 만나고 살아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인데,

하물며 처음 만나서 바라본 그 인상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몇 번 만나서 그 사람의 전체를 아는 양 하고 있으니,

 

3-89

아름다운 경치는 잘 쓴 한 권의 책과 같다.
바라보는 곳마다 무한한 상상의 원천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자연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이 단풍드는 이 땅의 가을 산천이다.
그 계절에 나는 그 단풍이 들기 전 그 빛 바래가는 나뭇잎에다, 흐르는 강물에다가 넘쳐 나오는 내 마음의 상념을 물감처럼 풀어놓는다.
아직은 남에게 보여줄 수가 없는 미완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는 가을 산천, 어디 그림뿐인가,

 

3-92

한 해가 거의 저물고, 그렇다고 내 놓을 것 별로 없이 가버린 시간 앞에서 자꾸만 초조해지고, 서두르는 마음의 바다에
쏜 살같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시간의 파도, 그와 같이 마음의 공허는

어딘가로 무작정 떠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다고 해도 풀릴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것이 바로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이 계절에 이를 때 깨닫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이 있어도 집 같지 않아서 길을 그리고, 길에 있으면 집이 그리워 집을 그리워하는 겨울 밤,

 

3-96

남자와 여자는 <화성에서 온 여자와 금성에서 온 남자. 이 책 제목이 정확한지 모르겠다.>라는 책제목처럼

본질적으로 틀린 인종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일찍부터 눈치 챘던 니체는 그 다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남녀는 서로를 오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오직 자신만을(혹은 좀 더 부드럽게말해 자기의 이상을)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는 자기의 여자가 온화한 여자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여자는 본질적으로 고양이처럼 앙칼진 존재이며,

제 아무리 완화하게 되려고 애를 써 봐도 그러한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
니체의 <선악의 피안>의 ‘잠언과 간주곡’에 실린 글이다.
남자역시 만만치 않다. 여자를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이기려는 마음이 더 우선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남녀 간에 사사건건 부딪치다가 보면 서로의 사이가 벌어져 나중에는 다시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다투게 되면 누가 더 괴로울까? 니체는 그 해답을 미리 준비해놓고 있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 있는 개인적인 불화나 입씨름을 한 뒤에는 한 편이 무엇보다는 상대편에 괴로움을 주었다는 표상으로 고민한다.

그런데 전자는 무엇보다도 상대편에게 충분한 괴로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 때문에 눈물, 흐느낌, 광증에 가까운 동작 등으로 앞으로도 계속 상대편의 마음을 괴롭게 해주려고 고심한다.”
<선악의 피안> 중 ”누가 많이 고민하는가?“ 라는 글이다.
남녀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동성 간의 관계에서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항상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멀리 있을 때에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가까이 있을수록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사람과의 관계다.

그 관계가 어려워질수록 견지해야 할 자세가 성 프란체스코의 ‘애매한 경우에는 자유를’이라는 구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