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고원 길 1코스를 걷다.
을미년 4월 4일 토요일, 전북 진안에 있는 진안 고원길 1구간을 걷습니다. 백운면 노촌리 영모정에서 신전(갈우손이)과 상백암을 거쳐 반송리에 이르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백운면 소재지 원촌 마을을 답사 한 뒤 덕현리에서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로 넘어가는 구신이 고개를 넘을 예정입니다.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을 보낸 백운면의 아름다운 길을 걷게 될 이번 여정은 봄의 초입에 산촌마을의 정서와 고개에 얽힌 이야기들을 마음껏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 고향의 아름다운 이름>
내 고향은 전국에서 가장 외지고 궁벽진 곳 중 한곳이었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이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웃흰바우(상백암)는 흰바우 위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며, 아래 흰바우(중백암)는 흰바우에서 숲거리 지나 1키로미터 쯤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그 아래가 점촌이고, 물 건너가 면소재지가 있는 원촌이며, 바로 아래가 주위에 넓은 바위가 많다고 해서 지어진 번바우(번암)이다.
웃흰바우 위쪽에 있는 마을이 백운동인데 대가 높아서 항상 흰 구름이 떠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시냇물에 비취는 천봉의 푸름에 이어
깊은 골짜기 붉은 단풍 속 몇 집이 계곡 기슭 가에 있네.
인가가 드문 소로 길로 들어와 보니, 구름이 가득 서려 있구나.
산 위의 노을 질 제 시상詩想을 가다듬다가
찬 기운 돌고 해 기울어 고개 돌려보니
참으로 그림으로 보는 듯 하구나.‘
진안지에 실려 있는 임영林泳의 <백운동에서 놀다>라는 시다.
우리 마을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인 가는골은 어린 시절 내가 가재를 제일 많이 잡았던 곳이며, 우리 집에서 바라보면 덕태산(1113)의 후덕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골짜기이다.
백운동 마을을 지나면 노루목고개에 이르고 노루목 고개에서 보이는 푹포가 전진바우 폭포다.
선각산 줄기에 장군의 투구같이 보이는 봉우리가 감투봉이고, 감투봉 북동쪽 밑에 있는 바위는 진을 치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독진바우다.
독진바우 북동쪽에 있는 바위는 감투봉에 있는 장군을 보호하기 위하여 망을 보고 있다고 해서 망바우이고, 선각산 아래에 펼쳐진 골짜기가 망태골이며, 열두골, 국골, 큰덕골, 장자골, 통시골 복골등이 덕태산과 선각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들이었다..
가리손이(신전)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배갯재라고도 부르는 배고개이고 그곳에 큰 시암골, 작은 시암골이 있어서 내가 가재를 잡았던 곳이다.
시암골 동북쪽에 있는 등성이가 물방아날이고, 웃흰바우 남동쪽에 있는 보를 물방아보라고 불렀다.
상백암에서 은안으로 가는 고개를 닥실고개라고 불렀고, 가는 길목에 있는 저수지가 덕실방죽이었다.
백운동으로 가는 길은 사시사철 쉬임 없이 흐르는 백운동천의 맑은 물과 산세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는데, 가다가 보면 큰 소가 용소(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있는 깊은 웅덩이)가 있었다.
우리 마을 서쪽에 있는 쏘는 옛날 갓 시집온 각시가 빠져 죽었다는 각시소이고, 그곳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냇가가 어린 시절 마을 아이들의 자연 노천 수영장이었다.
내 어린 날의 기억이 한 올 한 올 살아 숨 쉬는 곳이 그곳이지만, 가서 보면 그 때 그 시절의 것으로 남아 있는 곳이 별로 없다.
“내 어린 시절은 다만 어두운 폭풍우였을 뿐,
이따금 눈부신 햇살이 이곳, 저곳을 뚫어 비추고
천둥과 비가 성화를 부려
내 뜰 안에는 몇 안 되는 붉은 열매만 매달렸을 뿐,“
보들레르가 노래했던 그러한 시절이었는데도 나는 가끔씩 그 시절을 그리워 할 때가 있다.
그렇다. 세월은 그 모든 추억마저 깡그리 데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가버린 옛날이여!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대운이 고개의 추억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진안군 백운면의 소재지 백암리 원촌에서 어린 시절 몇 년을 보낸 나에게 원촌은 갈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나에게 임실 17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섬광처럼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던 한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동창을 지나 구신리를 거쳐 대운이재를 넘어 임실로 걸어갔던 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고개 같은 고개인 대운이재를 맨 처음 한 발 한 발 걸어서 넘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였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때의 나에게 제일 부러웠던 것은 친구들이 입고 있던 중학교 교복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중학교에 간 아이들은 활기에 차 있었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은 그들의 까만 교복만 보고도 괜히 주눅이 들어 그들을 피하곤 했다.
그 무렵 우리집안의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 말이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한 번도 성공이란 것을 해보지 못하고 실패의 연속이었던 아버지를 오래전부터 믿지 못한 어머니는 6.7년 전부터 옷을 떼?箏?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임실군 성수면과 관촌면 일대, 그리고 진안 성수면 일대를 다니며 옷가지를 파는 행상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옷가지를 팔고 받아온 쌀, 콩, 보리, 서숙이라 부르는 조 등을 백운에서 임실까지 예닐곱 말씩 이고 가서는 팔고는 했다. 그 이유는 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서였기도 하지만 임실장에 가던 길가 마을인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 맡겨놓은 곡식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도 어머니의 길동무 또는 짐꾼이 되어 백운 소재지인 원촌에서 임실읍 까지 17킬로미터를 몇 번이고 오고 갔던 것이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나이에 그것도 친구들은 중학교에 갔는데, 곡식 너댓 말을 무겁게 등에다 지고 40리가 넘는 길을 간다. 어쩔 도리가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내가 그때 어머니와 절충했던 것이 이른 새벽에 떠나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아침 일찍 깨워 달라”고 잠이 들었지만 아침 일찍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난다는 중압감에 잠이 제대로 오기나 하는가. 이리 저리 보채는 나에게 새벽은 어김없이 오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얘야 어서 일어나야지 벌써 새벽닭이 울었단다.” 그래 무심한 새벽닭은 ‘어서 일어나라’ 꼬리를 물며 울어대고” 그래도 못들은 척 하고 누어있으면 다시 나를 깨우는 소리. 가만히 문을 열고 나 서면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무리들,
5일이 장이라서 전날 술을 많이 마신 아버지는 아직도 깊은 한 밤중이고, 동생들은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눈을 부비며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주섬주섬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몇 수저 뜨는 둥 만 둥 하고 너 말 쯤 되는 곡식을 멜빵을 해서 메면 어깨가 무지근했다.
유난히 작았던 열 서너 살짜리 소년이 너 댓 말쯤의 곡식을 등에 메고 허리를 구부린 채 길 위를 걷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가? 옛 시절 창(倉)고가 있었던 동창리(東倉里)를 지나 섬진강의 최상류에 놓여 진 백운교를 건너 덕현리 원덕현 마을에 이른다. 그곳에서 숲이 울창한 구신이재를 넘어갈 때면 불쑥 도깨비가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귀신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그 고개를 넘으면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 닿는다. 어머니가 맡겨둔 곡식을 조금 더 찾아서 마을 뒤편으로 이어진 길을 가다가 보면 다시 대운이고개에 이른다.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오정 마을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대운 마을 사이에 자리 잡은 대운이재고개는 이리저리로 구부러지고 나보다 두세 말을 더되게 머리에 이고 가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자꾸 가쁘다. 나도 힘들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도 없고 나는 언제쯤이면 이처럼 짐을 지고 이 고개를 넘지 않을까? 도무지 그 날이 올 것 같지도 않고 고개 마루를 넘어서 한참을 내려가면 대운 마을에 닿는다.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국지명총람』에 ‘지대가 하도 높아서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 같다 함’이라고 기록된 대운 마을에서는 사람의 인기척을 듣고서 개들이 울어댄다. 대운 아랫자락에 있는 매마우마을을 지나 수천리에 이른다. 어머니는 거기쯤에서 보리개떡을 내 놓는다. 배가 고프면 짐을 지고 걸어가기가 쉽지 않으니 새참으로 싸 온 것이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할머니와 고모에게 당한 시집살이 얘기를 늘어놓는다. 사는 것이 힘이 들고 무엇보다 머리에 이고 가는 곡식의 무게가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설움이 복바쳐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지만 지금 이 현실을 잊기 위해 어젯밤에 읽다 만 소설 속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바로 그 아랫마을이 수철리(水鐵里)다. 나중에 알아본 결과 태조 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상이암으로 들어설 적에 만난 사람에게 “수천 리를 걸어 왔다”고 했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 수철리 마을을 지나 성수리에 이르면 날이 희뿌연 하게 밝아 왔다.
그곳에서도 임실읍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그 때 쯤이면 내 또래의 아이들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를 가는데 이방인처럼 나는 어깨가 빠지게 짐을 메고 어머니의 뒤를 따라 장을 가고 있으니, 그곳에서 임실읍 갈마리로 넘어가는 서낭댕이 고개를 넘어서 갈마리 거쳐 임실장에 닿으면 해는 중천에 뜨고 사십 리가 넘는 길을 등짐을 지고 걸어온 나의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사주는 국밥 한 그릇을 먹고서 또 돌아갈 시간을 기다릴 때 눈부시게 떠 있는 햇살, 그 햇살이 얼마나 찬연한 슬픔이고 나를 주눅 들게 하였던지?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서 자판으로 그 추억을 두드릴 때 담헌 홍대용이 친구가 죽자 지은 제문祭文의 한 구절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홀연히 떠올랐다.
“글자마다 눈물방울, 그대 와서 보는가?”
그런데 왜 내 기억 속에서 그처럼 아픔을 간직한 채 넘었던 그 고개에 대한 추억을 망각처럼 잊어버리고 있고 있었던 것일까? 그 의문점은 풀릴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토록 아프고 쓰린 추억은 세월의 흐름 속에 깊숙이 침잠되어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나서 가슴을 들쑤시며 일어난다는 것을 그날 임실 17km라고 쓰여 진 이정표를 보며 깨달았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중에서
원래 이틀 예정으로 무주 무릉도원 길과 함께 예정되었던 이 길을 다른 일정 때문에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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