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석탄일에 통도사에서 운문사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
임진년 사월 초파일(석가 탄신일)을 즈음해서 삼사기행을 떠납니다. 5월 26(토)일부터 28(월) 석가탄신일까지 사흘간에 펼쳐질 이번 기행은 그 첫날은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과 정혜사지 일대, 둘째 날은 울산의 망해사, 천진리 각석과 반구대 일대, 그리고 셋째 날인 사월 초파일은 양산 통도사,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석남사와 운문사 일대에서 펼쳐집니다.
“도덕산 자락에 위치한 정혜사지(定慧寺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불국사 다보탑과 화엄사 4사자 석탑과 함께 대표적인 이형 석탑인 정혜사 13층 석탑만이 남아있다.
하서 김인후가 그의 시속에서 “해당화가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동백꽃이 차가운 얼음 속에 오연하다.”라고 노래했던 그 시절은 과연 어느 세월이었던가? 이 절 정헤사는 경주의 역사와 지리지를 정리한「동경잡기」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절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덕여왕 1년에 당나라의 참의사인 백우경이 참소를 입고 이곳에 와 암자를 짓고 살던 중 선덕여왕이 이 절에 와서 행차한 후 정혜사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벼슬길에서 물러난 회재는 이 절에서 실의의 시절을 보내던 중 스님들과 사귀었고 그가 죽은 뒤 옥산서원이 세워진 후에는 정혜사가 편입되었다. 그러나 1834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이 절은 사라지고 탑만 남아있게 되었지만 이 탑 또한 1911년 도굴로 인해 내려졌던 탑재들을 잃어버린 채 십층탑으로 서있을 뿐이다.
정혜사 바로 아랫자락에 회재 이언적이 7년 동안 은거했던 사랑채 독락당은 보물 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락당은 회재가 낙향한 이듬해인 1532년에 지어진 건물로서 독락당과 계곡 사이에는 담장이 있고 그 담장의 한 부분을 헐어내고 살창을 설치하여 독락당 대청에서 자계 계곡과 흐르는 냇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독락당 건물 내에 계정이라 이름붙인 아름다운 정자 한 채가 있다. 난간에 기대어 보면 자옥산과 자계 계곡이 한데 어우러져 모두 하나가 된다. 우리가 계곡 아래로 내려가 계정을 바라볼 때 냇물 위에는 지난해 떨어진 나뭇잎들이 꽃잎처럼 떠있었다. 1688년에 저 계정에 올랐던 정시한은 이곳의 풍경을 아래와 같이 읊었다. “정자는 솔숲 사이 너럭바위 위에 있는데 고요하고 깨끗하며 그윽하고 빼어나 거의 티끌 세상에 있지 않은 듯하다. 정자에 올라 난간에 의지하여 계곡을 바라보니 못물은 맑고 깊으며 소나무, 대나무가 주위를 감쌌다.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등은 평평하고 널찍하며 반듯반듯 층을 이루어 하늘의 조화로 이루어졌것만 마치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 집과 방은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아 계곡과 산에 잘 어울린다.”
<나를 찾아가는 하루 기행> 2권 중에서
“울주의 온천면 처용리는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처용설화의 본고장이다. 정포(鄭脯)의 시에 “섬 속에 비치느니 구름 빛이 따뜻하고, 강에 연해 물맥이 통했어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 처용 늙은이가 이 푸른 물결 속에서 자랐다 하네. 풀은 치맛자락을 띄어 푸르렀고, 꽃은 술취한 얼굴에 머물러 붉었네. 거짓 미친 체하고 세상을 희롱한 뜻 무궁했으니, 항상 춤추고 봄바람을 보내네”라고 노래하였던 곳이 바로 이곳이고, 근처에 <삼국유사>에도 실린 망해사 옛 터가 있다.
아내의 부정 앞에서도 춤을 추고 노래를 했던 처용의 혼백이 떠도는 울산의 태화강 상류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의 대곡천에는 시공을 뛰어넘어 이 땅을 살다간 공룡들의 발자국이 남아있고 강을 건너 벽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린 바위그림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그 물길을 따라간 대곡리 서원마실에 반고서원(盤皐書院)이 있다. 고려 말의 충신으로 이곳으로 귀양을 왔던 정몽주는 이곳의 경치에 반하여 정자를 짓고서 제자들과 학문을 닦았다고 하는데, 이 서원은 숙종 38년(1712)에 고을 선비들이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와 문원공(文元公) 이언유(李彦油) 그리고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가 이곳에 머문 것을 추모하여 창건하였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신석기 말부터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대곡리 암각화가 있다.
이곳에는 1억 5천만년 전 쯤에 지구를 주름잡았던 공룡들의 발자국이 200여개가 있다. 대형초식공룡인 율트라사우르스와 중형 초식공룡인 고성고사우르스 와 육식공룡인 메갈로사우르스 등 공룡들이 이리저리 배회한 흔적들이 남아 있는 그 건너편 바위가 선사시대 사람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천전리 각석川前里 刻石이다. 천전리 각석은 일명 서석書石이라고도 불리는데,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바위 표면에 마름모나 동심원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와 사슴과 용 같은 동물과 물고기 등을 그렸는데 어느 때 누가 그렸는지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현재 국보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전리 암각화에는 신라 법흥왕 12년(525)년에 사탁부沙啄剖의 갈문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새겼다는 글이 남아 있고, 화랑도들이 다녀간 흔적도 남아 잇다. 그곳에서 대곡천을 따라 2km쯤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절벽에 신석기 시대 말기를 살았던 우리들의 선조들이 그린 사슴, 멧돼지 같은 육상동물과 고래 그리고 사람 등 200여점이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천전리 용화사에 영험한 미륵에 얽힌 이야기가 남아 있다.
언양관아의 남천南川의 앞마을에 ‘미륵彌勒’이라는 이름의 석불이 있다. 예로부터 민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에 언양 고을 관리가 군역을 담당할 장정의 징발을 독촉했다. 마을 사람들이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부족한 인원을 채워 넣었다. 그런데 군포를 받는 날에 성명을 적지 않은 패를 내어 주었는데, 군포를 징수할 곳이 없었다. 관리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대신 내라고 요구하자 마을 사람들이 크게 억울해 하며 말하기를, “석불을 부족한 인원에 충당했다가,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생겼구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느닷없이 미륵불의 어깨 위에 몇 필의 무명이 걸려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부처가 은밀하게 도와주어 그 같은 일이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양반이라고, 돈이 많다고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고 군대를 가지 않다가 보니 군인은 부족하고 어쩔 수 없이 미륵까지도 군역에 이름이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선 시대였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편에서
자장법사가 창건한 큰 절 통도사
『택리지』는 다시 이어진다. ‘이 절은 경상도 승흥부順興府 지역에 있다. 또한 양산에는 통도사通度寺 그리고 대구에는 동화사桐華寺가 있다. 전라도의 영광靈光(지금의 영암을 잘 못 표기함)에 도갑사道岬寺, 해남에 천주사天柱寺, 고산에 대둔사大芚寺, 금구에 금산사金山寺, 순천에 송광사松廣寺, 흥양(지금의 고흥군 흥양읍)에 능가사楞迦寺가 있는데, 모두 신라 때의 큰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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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에 실린 통도사의 기록을 보자.
‘통도사는 당나라 초기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천축국에 들어가 석가의 두골과 사리를 얻어와서 이 절 뒤에 묻고, 탑을 만들어 모신 곳이다. 탑을 세운지 세월이 오래되어 탑이 조금 기울어졌다. 숙종 을유년(1705)에 승려 성능聖能이 탑을 중수하기위해 허물었더니 탑 안에 “외도外道의 승려 성능이 중수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두골이 비단 보자기에 싸여 은함에 담겨져 있었는데 그 크기가 동이만 했다. 이미 천여 년이 지난 뒤였으나 비단이 썩지 않고 새것과 같았다. 또 작은 금함에는 사리를 담아 두었는데, 그 광채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탑을 고친 뒤에, 또 비각을 세웠는데 비문은 학사 채팽윤蔡彭胤이 짓고 글씨는 나의 선대부先大夫께서 쓰셨다.’
양산천이 물금읍에서 낙동강으로 접어들고 양산천을 따라간 양산시 하북면 영취산(靈鷲山 일명 취서산 1059m)기슭에 통도사(通度寺)가 있다.
한편 취서산 기슭에 자리잡은 극락암은 현대의 고승 경봉(鏡峰)스님이 스무 하루 동안 용맹 정진하다가 해탈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불경공부에 열중하였는데 어느 날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보아도 반 푼어치의 이익이 없다.’라는 구절에서 큰 충격을 받은 뒤 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1927년 11월 20일 새벽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서였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70년 가까이 이곳 삼소굴(三笑窟)에 주석하면서 당시의 선지식이었던 방한암(方漢巖). 김제산(金霽山). 백용성(白龍城)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불 칼 같은 설법으로 대중들을 깨쳤다. 경봉 스님이 1982년 7월 2일 입적하면서 남긴 선문답(禪問答)은 지금도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스님 가시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라고 묻는 시자(侍子)에게 빙그레 웃으며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신정일의 <신 택리지> 중 <살고 싶은 곳>에서
『택리지』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과 울산蔚山의 원적산圓寂山은 산봉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고, 겹겹으로 되어 있어 골짜기들이 아주 깊숙하다. 승가僧家에서는 천 명의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올 곳이라고 말하며, 또 병화兵火를 피할 수 있는 복지福地라고 말한다. .’ 하였는데 원적산은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에 자리 잡은 천성산인데 그 산기슭 운흥골에 운흥사(雲興寺)라는 폐사지만 남아 있고 석탑 3개가 남아 그 옛날의 번성했던 시절을 증언해주고 있으며 그 산 너머 천성산에 비구니 도량인 내연사가 있다.
운문사를 품에 안은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은 청도군 운문면과 밀양시 산남면 사이에 자리 잡은 산으로 높이는 1188미터이다. 이 산 밑에 진흥왕21년 신승이 창건한 운문사가 있다. 경남의 석남사와 계룡산 동학사와 더불어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이름이 높은 운문사를 품에 안은 운문산에서 울산시의 가지산으로 이어진 연봉들을 ‘영남알프스’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 영남알프스는 영남7봉 또는 영남9봉이라고도 하는데, 9봉을 꼽을 때는 운문산․가지산․천황산․재약산․간월산․신불산․취서산에 고헌산과 능동산을 보탠다.
그중 가지산은 1240미터로서 영남9봉 중의 최고봉이다. 가지산은 고헌산(1033m), 운문산이 동서방향으로 한 줄기로 뻗으면서 경상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는 경계가 되고 가지산에서 남쪽으로 S자 모양을 그리며 세력을 펼친 것이 능동산(983m), 천황산, 재약산, 간월산, 신불산, 취서산이다.가지산은 크고 좋은 세 개의 골짜기를 가지고 있는데, 북쪽의 쌍폭으로 해서 그 아래 운문사가 자리하고 있는 운문학심이골, 구연폭포․호박소․백연사․얼음골로 이어지는 남쪽의 쇠점골, 원시림에 가까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는 동쪽의 석남골이 그것이다.
이 석남골의 입구에 자리 잡은 절집이 비구니도량인 석남사(石南寺)이다. 석남사는 신라 헌덕왕16년(824) 도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온다. 도의선사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로 대표되는 중국의 선불교, 그중에서도 돌연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는 남종선(南宗禪)을 중국 당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직접 배워 신라에 처음 소개한 고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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