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2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편지.

산중산담 2016. 11. 30. 19:21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편지.

 

 

 

편지, 시도 때도 없이 많이 썼던 편지를 어느 때 부턴가 쓰지 않는다.

그 편지, 인생의 괴로움, 그리움, 그리고 슬픔과 고통을 담아 썼던

내가 보낸 그 편지들이 누군가의 가슴 속에, 혹은 실재實在로 남아 있기나 한 것인지, 나는 그 편지에 대한 글을 어느 가을에 다음과 같이 썼던 적이 있다.

 

가을편지

 

이 밤

그때를 향해 띠우는 편지는

어둠을 뚫고

별빛에 젖어

찬 이슬 몸을 적신 후

잠든 그대 머리맡에

살포시 내리 소서

 

가슴 안에서

정갈하게 여과된 진실의 마음이여

하나하나 그리움의 새가되어

그대 꿈꾸는 푸른 동산에

날개 파닥이며 닿으소서.

 

빛나는 그대 정신의 창문을 열고

떨어지는 가랑잎 소리로

낭랑한 새벽 종소리로

혼곤한 잠을 깨워

깊어가는 가을 한 밤을

잠 못 들게 하소서

 

1985.11.3 에 쓴 글이다.

이렇게 쓴 편지도 있지만, 그리움을 가득 담은 사랑의 편지나,

절연의 편지, 혹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쓴 편지도 있다.,

그 중, 죽음도 그냥 죽음이 아니라 처형에 임박해서 쓴 글은 얼마나 절박하고

비장할까? 그런 편지를 썼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루이 16세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편지다.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 전 이름은 Josèphe Jeanne M.A.이었다.

독일 황제 프란츠 1세와 여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의 아홉 번 째 딸로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4세에 그보다 두 살 위인 루이 16세와 결혼(1770)하였다. 그러나 그의 남편인 루이 16세의 즉위(1774) , 궁정의 반()오스트리아 세력과 대립, 궁정 의례(儀禮)의 무시 및 쾌락 추구로 인하여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

정치에도 간섭, 특히 황태자 탄생(1780), 모르파 사후는 왕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력하게 하고, 튀르고네케르 등의 자유주의 개혁을 좌절케 했다. 사치낭비벽하층 계급 멸시로 인하여 "오스트리아 여인 L'Autrichienne"이라는 멸시의 이름으로 불리었고, '목걸이 사건(1785~86)'에는 사실 관계가 없었으나 국민의 반감을 더하게 했다. 삼부회(1789) 소집부터 반()혁명적 노력을 계속하고, 10월 사건(1789. 10) 이후, 파리의 튈르리궁(, Tuileries)에 옮긴 때부터는 미라보와 연락하여 군주제 유지에 진력, 반 사건(1791)을 일으키고, 국외 도망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파리 시민의 튈르리 침입(1792) , 오스트리아의 혁명에 대한 무력간섭을 요제프 2세에게 교섭하고, 개전이 되자(1792) 혁명군의 작전을 적에게 통보(通報)했다. 파리 시민의 튈르리 습격 사건(1792. 8) , 탕플(Temple) 옥에 이송되고, 루이 16세 처형(1793. 1. 21) , 혁명 재판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지배의 위엄으로써 많은 오욕(汚辱)에도 잘 견디고 품위 있는 태도를 보였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이 말은 그가 세상물정에 얼마나 어둡고 국민들이 처한 상황에 무지하며 무관심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사람들에게 회자되곤 한다.

프랑스 국민들이 먹을 빵이 없어 굶주림에 고통 받는다는 말을 듣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와 같이 말했다는 것인데, 이 말을 한 사람은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 왕가 출신 마리 테레즈 왕비의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마리 테레즈가 빵이 없다면 파이의 딱딱한 껍질을 먹게 하라말했다는 이다.

세상의 온갖 누명을 쓰고 단두대에서 사라져간 그가 결혼 7년 만에(1778) 장녀 마리-테레즈 샤를로트가 태어났을 때 했던 말이 있다.

가여운 어린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지만 난 너를 사랑한단다.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것이 되었겠지만, 너는 내 것이고 내가 보살필 거야. 너는 나와 기쁨을 함께 하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

 

그의 비운을 예감했던 것일까? 결국 단두대에서 사라져 가기 전 시누이이자 자기 아이들의 보호자가 된 마담 엘리자벳에게 이생에서 마지막 편지를 쓴다.

 

시누이, 이것이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그러나 그것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나볼 수 있게 되리라는 선고입니다. 그분은 결백합니다. 당신의 오빠(루이 16)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기에 나는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확고부동함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나로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오직 아이들과 나의 다정한 시누이, 당신만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겁니다.

우리와 함께 지내려는 다정한 마음씨로 모든 것을 희생해온 당신을 이런 형편에 두고 떠나게 되다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 불쌍한 어린 것,! 그 애한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애들에게 나의 축복을 전해주십시오. 애들이 자란 뒤에 당신을 만나게 되어 당신의 착한 마음씨를 맛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의무의 계율과 그 수행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나의 가르침을 아이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정과 신뢰가 그 아이들을 결합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딸은 누나로서 경험과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동생에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와 봉사의 태도를 보여 주길 바랍니다. 두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협조하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도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괴로움 가운데에서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 가질 때 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 이외의 어디에서 아름답고 내적인 친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잘대로 잊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나도 그 말을 되풀이합니다.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기를,

나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하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아이가 당신을 괴롭게 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애는 아직 어리니까요.

그리고 아이들한테 말을 억지로 시키게 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니까요. 언젠가 그 아이가 당신의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씨의 가치를 이해하고 서로 이해하게 되기를 나는 기원합니다.

당신에게 이제 나의 마지막 생각을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도 없었거니와 재판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통에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는 로마 카톨릭의 사도적인 신앙 가운데에서 죽습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위안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내 종교의 신부가 계실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내가 있는 이 장소에 오신다는 것은 극히 위험스러운 일이지요.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범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용서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생동안 그래 오신 것처럼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시고, 동정과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가한 모든 괴로움을 용서해 주기를 나는 모든 사람, 그리고 당신께 기구합니다. 나는 그들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해왔던 모든 적들의 악을 모두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고모, 형제, 자매에게 안녕을 고하려 합니다. 내겐 벗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내가 지금 죽으면서도 떨쳐 버릴 수 없는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에까지도 그들을 생각했었다는 것만이라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다정한 시누이, 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들과 당신은 온 마음을 다해서 포옹합니다. 당신과 아이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일은 끔찍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이제는 종교적인 의무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 신부 한 사람을 임의로 데려오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17931016일 새벽 430분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누이(이듬해 처형당함)에게 쓴 이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서명도 없이 끝을 맺은 이 편지는 그의 시누이인 엘리자벳에게 들어가지 못했다. 형리가 들어오기 이전에 간수인 볼에게 이 편지를 시누이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 편지는 담당 검사에게 넘어갔다.

그 뒤 사라졌다가 이십여 년 뒤 꾸르뚜와라는 장사꾼의 손에 의해 루이 18세 국왕에게 전해져 아름답고 슬픈 이별의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편지를 쓴 앙투아네트는 헌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흰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잘린 뒤 손이 묶였다. 11시에 수레에 태워져 콩코드 광장으로 향했다.

오스트리아 여자가 지나간다!” “뻔뻔스러운 앙투아네트가 여기 있다!” 기요틴 처형대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처형 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의 발을 살짝 밟고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종교의례를 강요하는 신부에게 그녀가 말했다. “내 불행이 끝나가려는 순간에 용기가 나를 저버릴 리가 없어요.”

편지 속에 쓴 것처럼 그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인생의 최후에서 각오를 하고 있는 사람의 머리 속에는 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은 하늘의 영과도 같은 것으로서 과거의 산봉우리 위에서 빛을 내려 보내고 있다.”

 

괴테가 죽은 직전에 했던 말과 같이 앙투아네트 역시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을 것이다. 그가 목이 잘려 생을 마감한 것은 1215, 38, 생일을 약 2주 앞둔 날이었다.

 

심약한 남편을 휘두르며 고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여 프랑스를 배신하고, 사생활이 추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심지어 아들(당시 9살이었다.)과 근친상간을 한 여자라는 누명을 쓴.’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프랑스 국민들은 열광했다.

국민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던 거만한 오스트리아 여자의 머리가 마침내 떨어졌다.” 처형 이후 혁명재판소가 받은 축하문들 가운데 하나다.

 

인형처럼 매혹적인 화사한 자태, 채색된 자기처럼 반질한 살결, 생신生新하고 푸른 눈, 활달하게 웃고 때로는 샐쭉할 줄도 아는 우아한 매너, 위엄 있는 입 언저리, 빈틈이 없는 기거의 동작, 깃처럼 가벼운 걸음걸이, 출출 때의 그 황홀한 맵시.”

 

슈테판 츠바이크가 <마이 앙투아네트 전기>에서 묘사한 그는 그렇게 이 세상을 하직했고. 부르봉 왕가 복고 시기인 1815121, 그녀와 루이 16세의 시신은 생 드니 성당 지하 납골소에 안치됐다.

 

불행 속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말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황제 사이에 딸 마리-테레즈 샤를로트(17781851), 아들 루이 조제프(17811789), 아들 루이 샤를(1785-1795), 딸 소피-엘렌 베아트릭스(1786-1787) 등이 있다.

이처럼 극과 극의 생을 살았던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었던가?

삶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로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고, 그 여정 속에서 발견하는 조그마한 빛, 그것이 바로 희망일 것이다.

그런 희망조차 잃어버린 그 마지막 순간에 이처럼 명징한 편지를 썼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후생이 삼가 조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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