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2

길이 사라진 길을 걸었던 추억,

산중산담 2016. 11. 30. 19:26

 

길이 사라진 길을 걸었던 추억,

 

 

어디에 숨어 있다 터져 나왔을까?

흘러도, 흘러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온 몸 구석구석에서 흐르는 땀,

그 땀을 원도 한도 없이 흘렸다 싶은데,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아니, 움직이지 않아도

흐르고 흐르는 것이 땀이었다.

 

셀 수도 없이 걸었던 그 길,

낙동강 변 농암종택에서 단천리로 가는 그 길이

웃자란 쑥대와 온갖 풀들, 그리고 옥수수 밭도 아니고

풀밭도 아닌 것으로 뒤범벅이 되어 밀림을 이룬 그 길을 걸어 갈 때

그 때 오랜만에 길에서 막막하다는 것을 느꼈다.

언제 쯤 이 길이 끝나지?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은 괜찮을까?

하는 조바심과 염려 속에서 헤쳐 나가다 들깨와 잡초가 반반쯤 섞인

푸른 초원 같은 밭에서야 나는 흐르는 땀을 닦고 안도의 한숨을 쉴수 있었다.

때때로 우리는 운명으로부터 공포를 느낀다.

우리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탈출할 길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전율하는 것이다.”

잠시나마 헤르만 헤세의 글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면 너무 부풀려진 말일까?

 

가끔씩 혼자가 더 편할 때가 있다.

누구를 의식할 필요도 없고, 나 혼자만이 책임지고, 내가 헤쳐 나갈 때,

그 곳이 길이 아니어도 가시덤풀이라도 상관이 없는데,

누군가와 함께 간다면 그것이 책임과 의무라는 일종의 덫이라서

부담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을 쏟아 평지에 두면

각각 스스로 동서남북으로 흐른다.

인생도 또한 운명이 있거늘

어찌 능히 다니며 탄식하고 다시 앉아서 수심할 수 있으리오,

술을 부어, 스스로 위로 하며

잔을 들어, 삶의 길이 험하다고 노래하는 것을 끊으리라.

마음이 목석이 아닌데, 어찌 느낌이 없으리,

소리를 머금고 우두커니 서서 감히 말을 못하누나.“

육조시대의 포조鮑照가 지은 <심비목석心非木石>이라는 시가

그날 낙동강 변에서 내 심사였으리라.

 

지금도 두 팔에 잡풀과 옥수수가 숲을 이루던 길에서 얻는 영광의 상처가

상채기로 남아 있지만 그 길을 악전고투 끝에 뚫고 나가던 기억들은

이미 추억이 되어 가슴 깊숙한 곳에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으니,

지나간 것들은 그 어떤 것이라도 아름다움으로 채색하는

마법의 상자 일지도 모르겠다.

길이 사라진 길을 불평 없이 따라주었던 도반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들이 있어서

훨씬 추억이 더 깊고도 넓어졌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고 다시 그런 날이 와도 그날처럼 가고 또 갈 것이다.

가다가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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