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자중독증活字中毒症에서 문자조립공文字 組立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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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습관 중의 한 가지가
어딜 가거나 책을 들고 가는 것이다.
잠시 산책을 나가도, 누군가와 차를 마시러 가도
가방 속에 책 몇 권 넣고 가야 마음이 놓이는 이 습관은
말 그대로 어느 순간부터 천성이 되었다고 할까?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추석이나 설날에 처갓집을 갈 때도
책을 가지고 가서 처가 형제들이 고스톱을 치는 그 귀퉁이에서
책을 읽었으니, 말 그대로 물 위에 기름같이 살았다고 할까?
세상에 그 무엇이 좋아하는 책 읽는 것과 비교할 수 있으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책만 읽는 사람들, 말 그대로 활자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더러 있고 예전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명나라 때의 사상가인 이지李贄(이 탁오. 1507~1602)가 그런 사람이었고,
그래서 책을 예찬하는 글 한 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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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용호를 낳아 탁오를 기다렸고,
하늘이 탁오를 낳아 용호에서 살게 했다.
용호와 탁오는 그 즐거움이 어떠할까?
사시사찰 책만 보고 다른 것은 전혀 몰랐다.
독서하면 어떠한가? 나는 만나는 것이 많았다.
일단 마음과 만나면 저절로 웃고 저절로 노래하여
노래와 읊조림이 그치지 않고 외침으로 이어졌다.
통곡하고 소리치며 눈물이 줄줄 흘렀다.
노래를 한 것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보면 실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통곡을 한 것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 텅 빈 호수에 사람이 없어서
그 사람 아직 만나지 못해 실로 내 마음을 애태운다.
책을 버려두고 읽지 말아라. 높은 집에 묶어 두어라.
성정을 편안하게 하고 정신을 기를 지어다.
왜 꼭 책을 읽어야 즐거운가?
이런 말을 듣고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
책을 묶어 놓고 보지 않으면 내 어찌 즐거우랴?
성정을 편안하게 하고 정신을 기르는 것이 바로 이 안에 있다.
세계는 얼마나 좁으며, 네모난 책은 얼마나 넓은가!
천만 성현이 자네와 무슨 억울한 사정이 있는가!
몸은 있으되, 묵을 집 없고, 머리는 있으되, 머리카락이 없는 이 몸,
죽는 것은 이 몸이요, 썩는 것은 이 뼈다귀라.
이것만이 홀로 불후하니, 이 세상 다하기까지 함께 하고 싶다.
수풀에 기대어 휘파람 불자니, 그 소리에 숲과 새가 화들짝 놀란다.
노래와 곡이 서로 뒤따라 그 즐거움이 끝이 없다.
‘촌음도 아쉬운데 어찌 감히 조용하리오.“
이지, 이 탁오의 <독서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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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며
이 지상을 살다간 뛰어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세상의 이치와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접하게 되니,
이 얼마나 재미난 일이며 행복한 일인가?
나는 그 이치를 너무 일찍 깨달아서 삶이 고달프기는 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 고달픔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 속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 속에서 책을 보며 살아온 세월을 살다가 보니
어느 순간 활자 중독증에서 벗어나면서
문자의 무질서 속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세종대왕이 만든 스물 넉자의 마술 같은 문자에 싫증을 내지 않게 되었으며
그래서 문자를 조립하면서 사는 ‘문자조립공’ 즉 작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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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이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작가라는 이름으로, 이 나라에서 혼자뿐인 문화사학자로 살아가는 것,
그러면서 배는 곯지 않고 ‘인디라이터, ’독립저술가‘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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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길이 있다.
매우 고답적인 일이지만, 내게 있어서 책은
<모비 딕>의 작가인 허만 멜빌의 표현을 빌려서
‘하버드대학이자 예일 대학이었다.
그 책 속의 길을 찾아서
어둔 밤길 걸어야 할까? 아니면 눈이
아프도록 책을 읽고 또 읽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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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4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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