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이성계가 계시를 받은 상이암을 걷고 오디가 지천인 진안 고원 길을 걷다.

산중산담 2017. 7. 24. 14:47

 

이성계가 계시를 받은 상이암을 걷고 오디가 지천인 진안 고원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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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일 현충일에, 나라 안의 기도처 중 소원을 가장 잘 들어주는 암자로 알려져 있고, 역사 속에서 태조 왕건과 이성계, 그리고 동학의 지도자인 김개남이 기도를 했던 임실 성수면의 상이암을 답사하고 진안고원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그 시절에 온 산천을 새카맣게 물들이며, 단내를 발산하는 오디를 따먹으며 하루를 즐길 예정입니다.

제철에 길을 걸으며 맛보는 오디도 오디지만 최창조 선생이 생애 최초로 어린 눈용을 보았다는 덕태산 아래 펼쳐진 진안고원 길의 아름다움은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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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면 성수리에 위치한 해발 86.7m의 성수산은 임실읍의 동쪽 성수면과 진안군 백운면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팔공산에서 뻗어온 줄기에 속하는데 성수산은 다시 남으로 줄기를 이어 남원군 보절면 천황봉으로 이어진다.

왕건 태조가 신라 말에 장차 건국의 웅지를 품었을 때 먼저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 기도를 올렸는데 도선이 왕건에 권하여 성수산에서 백일을 기도해도 아무런 징조가 없자 3일을 더 기도하면서 매일 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물에 목욕재계하여 마침내 관음의 계시를 얻었다 한다.

이로써 왕건이 세 번 목욕한 유래로 말미암아 이곳을 삼청동이라 부르고 그곳에 암자를 세워 도선암이라 하였다는 설화가 <당 일행 선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성계와 관련 설화도 있다.

공기 맑고 물 맑은 이곳은 예부터 신선이 노니는 곳이라고 하였고 이 상이암에는 삼청동(三淸洞)이라고 쓴 태조 이성계의 친필글씨가 새겨진 비각과 어필각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백일기도를 드릴 때 신선??내려와 성수만세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고 세 번에 걸쳐 왕에 등극할 것이다라는 응답을 받았다 해서 삼청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 대접주였던 김개남이 이 상이암에 들어와 기도를 드렸었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이 지역의 의병장 이석용 장군이 기포를 했었다고 한다. 그 뒤 상이암의 모든 건물은 1951년 진안 경찰서에 의해 불 태워진 후 사라졌던 것을 1957년 임실군수를 비롯한 기관장들의 울력으로 다시 세워졌다. 산세가 중첩하고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있어 인근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산을 찾는다. 우리보다 먼저 올라가는 택시 안에는 스님이 앉아 계셨고 그 뒷모습이 틀림없이 주지스님이라 생각했더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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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다는 것은 근본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울퉁불퉁한 자갈길은 가지 않고 오래 전에 쌓여진 듯한 두 개의 돌탑이 마치 일주문처럼 호젓한 옛길을 걸어 올라가는 스님은 봄의 고요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듯 싶다. 어디를 다녀오셨느냐는 나의 물음에 보궐선거 투표를 하고 왔다는 동효스님은 자근자근 말문을 여신다. “이 절은 신라 헌강왕 원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라는데 확실하지는 않지요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다 한국전쟁 때 모조리 불타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요사채 뒤편에 있는 유형문화재 제 150호로 지정된 부도와 다른 부도들 밖에 없지요.... 진리眞理가 무엇이냐 하고 내가 물을 때 처사님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난감하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이 없었는데 내가 무슨 성인이라고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진리는 복잡하지 않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단순성이지 않을까?’라고 어설프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

진리라는 것은 말할 수는 있지만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지요. 진리가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진리를 이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이치는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형상이라는 것들은 끊임없이 변해 가는데 그것 또한 진리라고 볼 수 있지요. 거울을 보면 내가 보입니까? 아니지요 거울에 비치는 내 그림자를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미친다는 것은 근본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뜻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미쳐야 이룰 수 있지요 그래서 미쳐가지고 한 고비가 넘어야 이룰 수 있지요..... 원래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데 한 생각 일어난 놈이 크게 든 작게 든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평화롭고 원만할 땐 모든 것들이 우주처럼 넓게 펼쳐지다가도 어떨 땐 바늘 하나 꽃을 데가 없이 마음이 좁아지지요

스님은 말을 마치고 임실의 주산이 성수산이고 성수산의 상이암이 풍수의 교과서 격인 곳이며 이곳이 구룡쟁주형의 명혈이라고 알려주시는데 풍수지리연구가 최명우선생에 의하면 상이암은 제비집 모양의 연소 형국의 명당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기도터라고 한다.

성수산의 정상에서 뻗어내는 봉우리들이 이곳 상이암의 삼청각 뒤편에 우뚝 솟은 여의주봉을 향해서 내려오고 그래서 이곳을 천옥 즉 하늘이 만든 감옥처럼 둘러 쌓다고 한다. 우리가 상이암을 다시 찾았을 때는 꽃피는 봄날이었다. 복숭아꽃, 배꽃, 산벚꽃이 온 대지를 수놓고 있었고 길가에는 제철을 만난 두릅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더위에 지친 우리들에겐 상이암의 물은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는 것보다도 더 시원하게 느껴졌고 산신각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산신이 포효하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정일의 섬진강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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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을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보낸 나는 내 고향을 아름답다거나 자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내 고향이 내게 새로운 느낌의 고향으로 다시 다가온 것은 한권의 책에 의해서였다. 풍수지리학자 최창조 선생은 <한국의 풍수지리>라는 저서에서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저 곳을 이렇게 평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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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태산 방면에 어린용이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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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 이상 풍수를 공부해 오면서도 필자는 아직까지 어떠한 종류의 풍수적 이상향도 제시하지를 못했다. 그것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그야말로 이상의 세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이상향을 꿈꾼다. 필자는 풍수적 삶터의 이상적인 모형으로 인간관계에서는 대동 적 공동체를 조화로운 어울림을 표방하여 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터전을 현실 속에서는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번 여름에 그에 상당히 근접하는 좋은 마을들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그곳은 바로 전북 진안군 일대였다. 지리산 서쪽에 가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남원을 거쳐 임실에서 진안으로 들어가는 30번 국도에 접어들었을 때는 굵은 장마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원래 맑은 날보다는 비 오는 날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이렇게 물난리가 날 지경에 이르러서는 좀 지긋지긋한 생각이 들었다.

임실 성수면을 지나 진안 성수면(같은 성수면이 임실에도 있고 진안에도 있음)을 약간 스쳐 백운면에 접어들었을 무렵 참으로 운이 좋게도 잠시 파란 하늘이 고개를 내미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더욱 행운인 것은 이때 바로 교룡의 대표적인 형세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눈 룡이란 용세십이격 중 노령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글자 뜻 그대로 어린용이라는 뜻이다. 백운면 초입 남계마을에서 북서쪽으로 덕태산 방면에 나타난 눈룡은 산이 바로 사람임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산은 즉 사람이다. 눈룡이란 어린아이다. 한 열 살쯤 되는 어린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처럼 혈기 방장한 것도 아니고 아기처럼 철이 너무 없는 것도 아니며 노인처럼 기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매우 신선하게 아름다우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순박하다. 아름다움을 갖추고도 교만하지 않다는 것은 어린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기운은 이제 싹이 돋아나려는 듯이 밑에 깔려 위로 치솟고 있는 상태다. 산이 사람으로 비친다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로써 산과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백운면의 눈룡은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최창조 선생이 눈룡을 보았다는 장소가 내가 어린 시절 가재를 잡고 살았던 가는골, 시앙골, 가루 손이 일대였다.

신정일의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