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해파랑 길, -그 다섯 번째 포항 청하에서 영덕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산중산담 2017. 7. 24. 14:56

 

연중 계획, 해파랑 길, -그 다섯 번째 포항 청하에서 영덕 고래불해수욕장까지

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

-그 다섯 번째 포항 청하에서 영덕 고래불해수욕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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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연중 계획으로 진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정기답사인 해파랑 길 그 네 번째 행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함께 그 길을 걸은 도반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섯 번째 행사가 623일부터 25일까지 넷째 주말에 실시됩니다.

포항 송라의 월포에서부터 화전해수욕장을 지나고 영덕에 접어들어 강구항과 축산도를 지나 대진 거쳐 울진 후포로 이어지는 이번 여정은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영덕 블루로드와 축산도가 있는 구간입니다. 목은 이색의 고향인 괴시리를 거쳐 고래불 해수욕장까지 이어질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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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국사의 고향 조사리

방어리에서 벗어나니 바로 송라면 조사리祖師里이다. 원각조사가 태어난 곳이라고 붙은 지명 조사리. 고려 우왕5(1379) 215일에 아버지 김백광, 어머니 정덕인 사이에서 태어난 원각국사는 매우 총명하여 여섯 살에 사서四書를 통달하고 아홉 살에 시경, 열 살에 서경, 열한 살에 주역을 읽어 시문은 물론 자연의 이치까지 터득하였다. 맑은 정신에 생황처럼 청아한 음성까지 지닌 그였으나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고, 스물 한 살 되던 해 최씨 성을 지닌 부인을 맞아 밭 갈고 우물을 파는 백성들 속에 섞여 평범한 삶을 살았다. 집 가까이에 있는 보경사와 성도암을 찾아 높은 스님과 불법을 문답하고 불경을 공부하여 참다운 생의 진리를 깨달아가며, 마을 사람들에게 기후변화와 풍흉, 왜군의 침범, 그리고 장차 이곳 송라에 역이 생길 것을 예언하기도 하여 사람들은 그를 이인 또는 성인이라 칭송하였다. 그가 숨을 거두자 불제자들이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자 수십과의 사리가 나왔다. 그 사리를 거두어 상태사에 부도를 세웠으나 절이 폐사되는 과정에서 이 비도 사라졌다. 그러다 1933년 장마에 비 받침돌이 드러났고, 그것을 본 마을 사람들이 부근 밭에서 이 비를 발굴하였다. 그 비를 보경사에 세우려고 하였으나 일본인들이 이 비에 배일사상이 깃들었다며 파괴하려 들었고,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다시 이 비를 진흙 속에 감추어 두었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을 맞아 조사리 사람들이 이 비를 원각조사의 탄생지인 조사리로 옮겨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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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 해수욕장은 동해 해수욕장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가도 가도 끝을 알 수 없을 것처럼 넓게 펼쳐진 모래밭, 모래백사장을 걷기란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고 낭만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실상 걷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고역이 따로 없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마치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는 것처럼 몸을 가릴 그늘조차 없다.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든 백사장을 지나다 군 초소에 부닥쳤다. 군사구역이니 왔던 길을 돌아가라는 초소 담당자에게 사정사정하여 건너가니, 일행 몇몇이 화전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최명운님은 조금 늦게 도착한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이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 야 저 사람들 좀 봐라아, 해운대에서 두만강까지라 칸다 "

" 어데 "

" 니는 저게 말이 된다꼬 생각카나 "

" 기냥 뜻이 그렇다 그거제, 얌먀야 그라믄 니 같으몬 진짜루 걸을끼가? "

" 아이다 근데 진짜 걷는거 같다카이~"

" 야야~ 볼 때는 걷고 안 볼 때는 차 타고 다 그런기다 "

" 암만캐도 진짜루 걷는거 같은데에~~~~~~~~~~~~~~~~ "

" , 참 임마가 요새 저래 걷는 사람이 어데 있다고 그라노 하면서 버럭 화를 내더라는 것이다. 금강을 걸을 때 우리를 취재했던 모 방송국 PD도 내게 그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선생님, 우리가 볼 때는 걸어가고 우리가 보지 않으면 차타고 가는 것 아닙니까?”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 말, 결국 그 말이 나를 더욱 정직하게 걷게 만들었다.

옛 사람들은 발과 눈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힘겨운 길에서 허우적대면서도 한 발 한 발 정직한 걸음을 걷게 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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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덕, 드디어 영덕 땅이다

여기는 영덕군입니다.”라는 팻말로 환영하는 어촌고을, 남정면 부경阜境. 대구. 문어. 미역 등이 주산물을 이룬다.

샛들에 정지남배기라는 논이 있는데, 그곳에 큰 정자나무가 있어 7월 칠석이면 이 나무 밑에서 농민들이 놀았고 오월 단오에는 이 마을 여자들이 그네를 뛰고 놀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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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십리가 빼어난 장사해수욕장

지경리에서 언덕배기를 넘으니 장사리長沙里이다. 그곳에는 동해안 해수욕장 가운데에서도 그 경관이 빼어나기로 소문난 해수욕장이 있다. 동쪽 동해 가로 길게 펼쳐진 모래톱, 명사십리明沙十里가 있고, 소나무 군락이 숲을 이루고 해당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는 그곳에는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영덕 대게의 고장 강구항, 은어 낚시터인 오십천

영덕지방에서 가장 큰 항구인 강구항 (江口港)은 경치가 매우 아름답기도 하지만, 영덕 대게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4~5월까지 이어지는 대게 철에는 수많은 대게잡이 배들이 항구로 집결하고, 대게 위판장이 운영되며, 일명 대게거리로도 불리는 식당가도 3km나 이어져 있다. 강구항 남쪽을 통해 빠져나가는 오십천(五十川)은 은어낚시터로 유명하다. 그리고 드라마촬영지로도 알려지면서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어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강구항은 새우, 오징어, 명태도 많이 잡히고 있다.

동북쪽 봉의재(황석산)는 조선시대 황석산 봉수가 있어서 남쪽으로 청하현 도리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별반산 봉수에 응하였다.

강구 동쪽 바닷가에는 천지天地방우라고 하늘 같이 둥근 방우와 땅처럼 모진 방우 두 개가 있었는데 축항공사를 하며 사라지고 말았다.

강구항을 벗어나 쇠나리라고 불리는 금진리 남쪽 소하동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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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매기가 숙성되어가는 창포리

대부리에서 창포리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붓꽃이 많이 피는 갯가가 있어 창포라고 이름 지은 그곳에 아름다운 창포말 등대가 있다. 가을 즈음 창포말을 찾으면 과매기를 만들기 위해 청어를 줄에 길게 매달아 놓은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 진풍경을 보노라면 간간이 과매기 줄 사이에 죽은 ?Ⅸ킥璲? 날개를 쫙 펴고 매달려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참 그렇다. 갈매기를 그렇게 매달아두면 과매기를 훔쳐 가는 갈매기들이 근접을 하지 않는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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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마을에 도착하여 점심으로 매운탕을 먹으며 맥주 한 잔을 곁들인다. 더위에 지쳐서인지 맥주가 마치 구세주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낮술은 취기가 금세 오른다. 취중 걸음이라취한 상태에서 걷는 바닷길, 포장도로지만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그리 많이 걷지 않았는데 대게 원조 차유마을이라는 경정 2리에 이른다. <어서 오십시오. 3월의 아름다운 어촌 경정 2. 해양수산부> 팻말을 바라보며 바다로 향한 길을 내려가자 바다를 바라보고 지어진 정자 근처에 영덕대게 탑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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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대게

영덕 대게는 다리가 대통처럼 길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1960년대만 해도 강구항에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로 잡혔었다. 하지만 마구잡이식으로 포획을 한 결과 한 때는 한 마리에 몇 십 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진귀한 특산물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부족해진 수효를 채우기 위해 러시아 지역에서 잡힌 대게들이 영덕으로 몰려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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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형상을 하고 있는 축산

경정 2리에서 아랫염장을 지나 말미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바닷가 길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이곳에 만들어진 길이 문체부에 제안하여 만들어진 영덕 블루로드 길이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한 기암괴석이 바다를 향해 돌출되어 있고, 수십여 년 동안 군부대 초소 길로만 사용되어 훼손되지 않은 자연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나라가 분단 된 이래 수많은 장병들이 청춘의 시절을 보냈을 초소 아래 돌계단에 나란히 앉아 먼 산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작은 모래사장에 앉아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며 걷다보니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마주하는 듯, 그렇게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축산도丑山島를 만난다.

생김새가 마치 소와 같아서 축산이라고 부르는 섬, 그 남쪽으로 높은 봉우리는 마치 말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마산馬山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전함이 정박했던 축산포영은 영해부 동쪽 14리에 있었고, 수군만호 1명을 두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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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그해 겨울의 무대

철 이른 바닷가, 대진해수욕장은 이문열의 출세작 <젊은 날의 초상>그해 겨울에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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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진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 두 시경 다시 내리기 시작한 진눈깨비 속이었다.

쉴 겸 젖은 옷을 말리느라 읍에서 몇 시간 지체한 탓이었다.

지금은 경상북도에서 몇 안 되는 해수욕장의 하나로 상당히 발전했다고 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대진은 여름 한 철을 제하면 볼 품 없는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한 겨울의 인적 없는 그 포구는 그대로 유령의 섬과 같았다. 읍에서 그곳에 이르는 마지막 십리 길도 그리 순탄했던 같지는 않다. 진눈깨비로 얼룩진 그날의 수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바다, 나는 결국 네게로 왔다. 돌연한 네 부름은 어찌 그렇게도 강렬했던지,”

(중략)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바다 역시도 지금껏 우리를 현혹해온 다른 모든 것들처럼 한 사기사詐欺師에 지나지 않는다. 도 구원하기를 단념하고 떠나버린 우리를 그 어떤 것이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속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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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은 불우한 청년기를 견디고 검정고시를 치러 서울 대학교에 들어간다. 그리고 사법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그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남로당의 고위간부로 활동하다 월북하여 북측 고위간부를 지냈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이 알려진다. 결국 그는 반공이념이 지배하던 당시 연좌제로 인해 제도권역내에서 자신에게 활동이 허용되는 한 치의 영역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방황한다. 유서와 약병을 상비하고 방황하던 그가 대진해수욕장을 찾았다. 그리고 이곳 대진 바닷가에 유서와 자살을 위해 가지고 다니던 약병을 던진다. 대진바닷가는 그가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 곳이다. “진실로 예술적인 영혼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저한 절망위에서 시작된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은 그런 절망위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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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항에서 덕천, 고래불로 이어지는 해수욕장. 진정 바다에서 바다로 이어진 모래사장 길을 맨발로 걸어보자. 발로 땅의 호흡을 느끼고, 몸으로 호흡으로 바다와 하늘의 기운에 휘감기는, 진정 자연과 내가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