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2017년 여름 걷기학교, 민족의 성산 지리산 자락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7. 7. 24. 15:00

 

2017년 여름 걷기학교, 민족의 성산 지리산 자락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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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3(목요일 밤)부터 6(일요일)일까지 여름 걷기 학교를 실시합니다.

민족의 성산 지리산 일대에서 실시되는 이번 여정은 지리산 자락의 역사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지리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는 그런 시간이 될 것입니다.

구례, 하동, 산청, 그리고 함양에서 남원으로 이어지는 이번 여정은 산 깊고 물 좋은 길에서 스스로가 자연이 되는 경이로움을 맛볼 수 있는 그러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84일 첫날은 구례의 쌍산재와 운조루를 답사하고, 국사암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길을 걷고, 그 아름다운 화개 장터에서 평사리에 이르는 섬진강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85일은 하동의 상림을 답사하고, 남명 조식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에 이르고, 단속사를 거쳐서 구형왕릉과 유의태 약수터에 이르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86일은 함양의 칠선계곡과 남윈의 지리산길을 걷게 될 이번 여름 걷기학교에 참여를 바랍니다.

지리산 8백리 길에서 이어질 이번 여정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 그리고 형제자매, 그리고 좋은 친구끼리 함께 하면 더 좋은 여정이 될 것입니다. 많은 참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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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에 실린 지리산(智異山)의 기록을 보자.

지리산智異山은 남해南海 가에 있는데, 이곳은 백두산의 큰 산줄기가 끝난 곳이다. 그런 까닭에 이 산의 다른 명칭을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이라 하고,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이다.지리지地理誌에는 지리산을 태을성신太乙星神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였다. 계곡이 서리어 뒤섞였고 깊고 크다.

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는데 이는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므로 산의 다른 이름이 두류산이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은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하는데, 소위 삼신산이다. 지지(地誌)에는 지리산을 태을선인(太乙仙人)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계곡이 서리어 뒤섞였고, 깊고 크다.’

지리산은 백두산에서 비롯된 백두대간이 끝맺음 되는 산으로 높이는 1915미터, 산의 둘레는 8백여 리에 달한다. 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 등 세 개 도와 남원시구례군하동군산청군함양군 등 다섯 개 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총 면적이 438.9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동북쪽에 있는 주봉인 천왕봉(1915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칠선봉(1586m)덕평봉(1522m)명선봉(1586m)토끼봉(1534m)반야봉(1732m)노고단(1507m) 등과 동쪽으로 중봉(1875m)하봉(1781m)싸리봉(1640m) 등의 높은 산들로 이루어진 이곳 지리산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선만 해도 42킬로미터쯤 된다. ‘지리는 원래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유래된 말인데, 두류산백두산에서 흘러내려 이루어진 산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서산대사 휴정은 이곳 지리산을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고 표현했지만 이중환은 지리산을 전국의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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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남쪽에 하동군 화개와 악양동이 있다. 고려 인종 때에 기인이었던 한유한(韓惟漢)은 처음에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이자겸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장차 나라에 환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가족을 데리고 악양으로 숨어들었다. 조정에서 그의 재주를 아껴 사방으로 찾았으나 그는 악양동에 숨어서 세상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 되었다고 했는데, 훗날 지리산의 화엄사연곡사신음사쌍계사 등에서 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는 신라말기의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의 도를 이어받아 세상 사람들이 삼신산이라고 부르는 금강산한라산지리산을 신선을 따라 오가면서 노닐었다고 하는데, 화개동과 악양동이 그의 피신처였다고 한다. 수많은 문신들이 금강산과 더불어 이곳 지리산을 찾았다. 그중 조선초기의 학자인 김종직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천왕봉에 올랐던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새벽,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느라고 놀빛이 눈부시다.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옷자락을 걷어붙인 후 석문을 거쳐 오르는데 밝히는 풀과 나무마다 얼음이 맺혔다. 성묘(지리산 여신묘)에 들어가 다시 잔을 올리며 천지가 맑게 개어 산천이 활짝 열린 것을 사례하였다. 그런 후 북쪽 봉에 오르니 비록 나는 기러기라도 우리 위로 날지는 못할 것같이 높이 오른 것이다. 마침 새로 갠 날씨여서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창창 망망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일행에게 물었다. “먼 곳을 보는 데에 요령이 없으면 나무꾼들이 바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선 북쪽을 본 후에 동쪽을 보고 그 다음 남쪽 서쪽을 보되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눈을 옮기면서 보아야 할 것 같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