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그 아름다운 내 변산 산행과 부안 마실길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7. 7. 24. 15:01

 

그 아름다운 내 변산 산행과 부안 마실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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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여름 부안의 변산과 변산 마실길을 걷습니다. 외 변산 또는 바깥 변산이라고 알려진 바닷가 부근이 <변산 마실길>로 개발되었습니다. 그 길에는 변산 해수욕장, 적벽강, 채석강을 비롯한 명소와 곰소 염전, 우반동(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지은 곳)등 볼거리가 많습니다.

그리고 부안읍내에 조선시대의 이름난 여류시인인 이매창의 무덤이 있습니다. 정유년 7월 첫 번 째 일요일인 72일 하루기행으로 변산 마실길과 실상사 거쳐 직소폭포를 지나 내소사로 이어지는 아름답고도 고적한 산행을 실시합니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그밖에도 두승산상두산과 가까운 정읍시에 편입된 태인고부와 바다에 가까운 부안무장 등의 고을은 모두 나쁜 기운이 있다. 오직 부안의 변산 부근과 고창의 진산인 방장산과 선운산 등이 들어서 있는 지역은 토지도 비옥하고, 또 호수와 산의 경치가 좋으므로 그 중에서 나쁜 기운이 없는 샘을 고른다면 여기도 살 만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고부의 진산으로 평지돌출의 산인 두승산에서 보이는 변산 기슭에 부안이 있다. 원래 이름은 부령현(扶寧縣)이었고, 백제 때 개화현(皆火縣)이었으며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규보가 그의 시에 풍속이 중국 남방의 해변에서 생활하는 종족인 단자(蜑子)와 같다고 한 뒤에 강과 산의 맑고 좋음은 영주봉래와 겨룰 만하니, 옥을 세우고 은을 녹인 듯한 것은 만고에 변하지 않는다하였던 부안에서 허난설헌(許蘭雪軒)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여류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매창(李梅窓)이 태어났다.

이매창은 선조 6(1573)에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桂生)이었고 매창은 호였다. 이매창은 서녀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지만 얼굴은 예쁜 편이 아니었고 시와 글, 노래와 거문고 등이 능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매창과 교류를 나누었던 사람 중에 천민이었으나 훗날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집한 공로로 인해 천민에서 벗어났던 유희경(劉希慶)이 이매창의 연인이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움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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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이 죽고 60여 년이 지난 후 부안의 아전들이 그의 시들을 모았고 그가 생존에 자주 찾았던 개암사(開巖寺)에서 남아 있는 시들을 모아 책을 펴냈다. 부안을 고향으로 두고 시작활동을 했던 시인 신석정(辛夕汀)은 이매창유희경직소폭포를 가리켜 송도삼절과 견주어 부안삼절이라고 불렀다.

이매창과 교류를 나누었던 사람이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이고, 그가 부안 기생 이매창을 만난 것은 1601723일이었다. 그가 지은 <조관기행>을 보자

“23(임자)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위의 글을 보면 허균이 만난 이매창은 얼굴보다 문학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여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함열로 유배를 왔을 무렵 허균은 이매창을 자주 찾았고, 이 지역을 사랑했던 그는 아예 눌러 살고자 하였다.

허균은 공주목사에서 파면 된 뒤에 이곳 우반동에 왔다. 그는 김청金淸이라는 사람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우반동의 골짜기에 지은 정사암靜思巖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때 <정사암중수기靜思菴重修記>라는 글을 지으면서 우반동의 수려한 경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서 골짜기로 들어서니 시냇물이 옥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덤불속으로 쏟아진다. 시내를 따라 채 몇 리도 가지 않아서 곧 산으로 막혔던 시야가 툭 트이면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이 마치 봉황鳳凰과 난새가 날아오르는 듯 치솟아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동쪽 등성이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 셋이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 돌고 대나무 수백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상기도 인가의 폐호임을 알 수 있었다. 남으로는 드넓은 대해가 바라보이는데 금수도金水島가 그 가운데 있으며,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서림사西林寺가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옛 당산나무를 지나 소위 정사암이라는데에 이른다.

암자는 겨우 방이 네 칸이고, 깎아지른 듯한 바위 언덕에다 지어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 보이고 세 봉우리가 마주 서 있다. 나는 폭포가 푸른 절벽에서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였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머리를 풀고 옷을 벗은 후 못가의 바위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막 피기 시작하였고 단풍잎이 반쯤 붉게 물들었다. 저녁노을이 서산에 걸리고 하늘 그림자가 물위에 드리워졌다. 물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를 읊고 나니 문득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었다.(중략)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행이 건강할 때 관직을 사퇴함으로써, 오랜 계획을 성취하고 또한 은둔처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하늘이 나에 대한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소위 관직이 무슨 물건이기에 사람을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