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살기, 무관심하게 살기,
그냥 무심하게 바라보고, 그냥 무심하게 살자.
그렇게 생각해도 여기저기 들리는 것,
보이는 것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내가 나선다고 바뀌는 것도 아닌데,
오지랖 넓게 이것저것 관여하고, 비판하고
그러다가 보면 내 마음에 상처만 남을 뿐인데,
‘사적인 것이나 공적인 것이나‘를 막론하고 관심을 갖다가
실망하고 상처를 받는
그러한 삶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정치적 동물이라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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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소,
당신들도 나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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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도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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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우리에게 할 말이 없소,
우리도 아무에게 할 말이 없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오,
아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없소,
되링의 <공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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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사적인 것,
그것들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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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 전에 덤불더어는 이렇게 말했다.
“내 놓고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 보다는 무관심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는 경우도 흔히 있는 법이다.”
대놓고 미워하는 것보다 관심을 두지 않는 무관심이
오히려 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가 ‘종교’에 대해서 한 말은 더욱 더 의미심장하다.
“무관심만큼 종교에 치명적인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나, 천주교, 개신교, 천주교나
증산교 등 모든 종교를 다 좋아하는 내가
가장 종교에 깊숙이 빠지기 쉬운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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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무관심해야 하는데, 그게 더 어려운 것은
아직도 나에게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욕심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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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이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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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의 반대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는 무관심은
생에 대한 또 다른 몰두沒頭“ 라고,
고향만 해도 그렇다.
내가 태어난 곳, 진안만이 아닌 세계가 내 고향이라고 하면서도
내가 태를 묻은 곳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
그렇다면 나는 무관심을 가장한 관심으로 세상을 재단하며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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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30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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