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을 읽으며 가만히 나를 들여다본다.
옛글에서 나를 보고, 나를 돌아다보며, 나를 느낀다.
그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글의 힘이다.
산다는 것이 지나고 나면 무상할 뿐인데,
그 무엇을 얻고자 매일 이렇게 나를 채근하고,
자책하는가?
한치 앞을 내다보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살아가는 날들이 가고 또 가면 어느 날
더는 갈 수 없는 장벽 앞에 도착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 새벽에 읽는 글 한 편이 쓸쓸하면서도
한 편으로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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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구가 나 성탄 더러 ”서상기는 어찌 그렇게 애써 비평하고 새기고 하는가?“ 라고 묻기에, 나는 초연히 낯빛을 고치고 일어서 ”그것은 나도 모르겠네. 그러나 내 마음으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네.“라고 대답했다.
“이제 저 끝없이 길고, 가없이 넓은 우주가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년인지 나도 모른다.
그, 몇 천만년의 세월이 물 흐르듯, 구름 걷히듯, 바람 가듯, 번개 치듯, 다 가버리고, 이날 이 때 이 자리에 나만이 잠시 머물러 있다.
이 잠시 머물러 있는 나도 물 흐르듯, 구름 걷히듯, 바람 불 듯, 번개 치듯, 그렇게 가버릴 몸이 아닌가, 그러나 다행히 지금 여기 머물러 있다.
다행히 여기 머물러 있으니, 나는 장차 무엇으로써 이렇게 이생을 보내어야 할 것인가, 나는 일찍이 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해야 할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생각하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고, 해야 하겠다는 일을 했다고 한들, 어느 것이나 다 물 흐르듯, 구름 걷히듯, 바람 불 듯, 번개 치듯, 그렇게 가버리고 말 것들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아아, 소용없는 짓들이다. 나는 차라리 아무 것도 하려들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련다. 그렇다면 왜 진작 물 흐르듯, 번개 치듯, 가버리지 않고,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가,
아아, 나의 하염없이 생을 보내고 있음이여,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오늘 이렇게 하염없었다면 옛 사람들도 또한 그랬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앉은 자리에 옛 사람이 먼저 앉았다 갔고,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먼저 서 있다가 간 사람이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들도 오늘의 나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만 있고, 옛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 옛 사람인들 어찌 몰랐으랴. 알고도 할 일이 없어 말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조물주에게 유감스럽다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아, 어찌 그리 불인不仁하뇨, 나를 내었으면 머무르게 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내지를 말거나, 원래 내가 없었고, 또 내가 타어나지라고 애원한 일도 없건만, 무단이 나를 점지하고 무단이 태어난 나를 또 잠시도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오래 두지도 아니할 나를, 왜 또 그리 보는 것, 들리는 것, 다감다애多感多哀하게 하는가? 아아, 슬픈지 고, 저승이 어디인지 고인古人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진실로 저승이 있고, 진실로 고인이 있다면 서로 얼싸안고 목 놓아 울어볼 일 이 아닌가?
...........
내 오늘, 마침 하늘은 맑고 일기는 화창한 이날, 창은 맑고 책상은 고요한 이 자리에서 좋은 붓과 깨끗한 벼루로 마음을 가다듬어 글을 쓰는데, 개미와 벌이 와서 서로 조증照證해주니, 이는 불세의 기연이요, 만나기 어려운 쾌사快事다.
후세의 사람들이 내 글을 읽을 때, 오늘 여기서 저 벌과 개미가 있었다는 것을 모를 것이요, 그렇다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을 나는 아노니, 그도 물 흐르듯, 구름 걷히듯, 바람 불 듯, 번개 치듯, 가버릴 몸으로 하릴없이 내 글을 취하여 생을 보내는 사람들일 것이다. 후세의 내 글을 읽는 사람이별로 할 일 없어 내 글로 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알리로다. 그도 종당은 물 흐르듯 구름 걷히듯 바람 불 듯, 번개 치듯 가고 마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여기에 깊이 깨달았나니, 그릇됨도 생을 보내는 방법이요, 그릇되지 않은 것도 생을 보내는 방법이요, 그릇되지 않으려다가 인하여 그릇됨도 무방하니, 어느 것이나 생을 보내는 소견법消遣法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이다. 정묘하게 하려는 것은 나의 자의요, 나의 자의란 내가 이미 깨달은 까닭이요, 내가 깨달은 것은 내 본래 할 일 없다는 것이요, 할 일 없어 한다는 것은 곧 나의 생을 보내는 방법이다. 나를 알건 모르건 내 알 바 아닌 것이다.
아아, 이것은 고인이 나의 재식才識보다 열배나 더 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내 그를 위하여 이것을 비평하고 새기고 있는 것이다. 즉 이렇게 비평하고 새기는 것은 통곡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고인을 통곡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인을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이도 하나의 내 생을 살아내는 방법인 것이다.“
김성탄의 <서상기서西廂記序>에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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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보낸 세월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 세월이 물 흐르듯, 구름 걷히듯, 바람 가듯, 번개 치듯, 다 가버리고 말았구나.
그나마 다행인 것, 내가 그렇게 허허롭게 보낸 그릇된 삶, 그게 마음속에 걸리고 걸렸는데, 옛 사람도 그랬고, 그래서 그렇게 말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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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기에 깊이 깨달았나니, 그릇됨도 생을 보내는 방법이요, 그릇되지 않은 것도 생을 보내는 방법이요, 그릇되지 않으려다가 인하여 그릇됨도 무방하니, 어느 것이나 생을 보내는 소견법消遣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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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냥 마음이 가면 몸도 가고, 가고 또 가는 대로 살다가 가자.
오늘 이 아침에 내가 내 마음에 던지는 주사위,
내가 이 땅에 살면서 견지해야 할 자세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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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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