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빌리듯 시간을 빌리다.
1980년대 중후반을 전주에서 예술부문에서 활동하며
살았던 사람 들 중 몇 사람은, 이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길을 가는 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나에게 2천원만 빌려 달라”고,
그 사람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오래 전부터 아는 사람이고,
더구나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시인이라면
누가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나중에 그 돈을 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선선이 빌려 줄 것이다, 아니 그냥 지갑에 있으면 꺼내 줄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휴전선>이라는 시를 썼던 박봉우 시인이었다.
박봉우 시인은 그 돈을 받자마자 막걸리 집으로 향했고,
그 돈을 누가 주었는지 조차 받는 순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마시는 술에만 정신을 쏟았다.
가끔씩 박봉우 시인을 길에서 보면 그 남루한 옷에 훈장처럼
막걸 리가 흘러내려 마른 흔적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그 시대에 두보나 이백, 송강 정철이 환생했던 것은 아닐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 박봉우 시인의 뒤를 이어서 가끔씩 역이나 터미널에서
돈을 잃어버려서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다고
가서 보내겠노라고 돈을 빌려 달라는 사람들을 보고는 한다.
그 때마다 떠오르는 박봉우 시인이 고향인 광주가 아닌 전주에
뿌리내리고 살다가 작고하시고,
전주 효자동 공동묘지에 안식처를 구하던 날,
그날따라 왜 그렇게 구슬프게 비가 주룩주룩 내렸는지,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렇게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돈을 빌린 박봉우 시인과 달리
세계적인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빌리라고 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길모퉁이에 나가 서서 손을 내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거야.
‘적선하시오. 형제들이여!
한 사람이 나에게 15분씩의 시간을 나눠 주시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나눠줄 수도, 빌려줄 수도 없는, 시간,
그 시간이 있는지 없는지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라는 것을 서로 정해놓고
그 시간을 다투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 누가 시간을 빌려줄 수 있을까?
그런데 돈은 빌려주지 않더라도 시간은 무의식적으로
빌리고 빌려주고 사는 것이 현대인들의 생활 패턴이다.
우리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간에
남의 시간을 뺏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고,
그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돈보다도, 아님 그 휘황찬란한 황금보다도 더 소중한 시간을
나에게 가끔씩 달라고, 그것도 거저 달라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과감하게 말해야겠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당신에게 당신의 시간이 소중하듯,
나에게는 나의 시간이 소중하다.
내게 소중한 그 시간을 내가 당신에게 달라고 하면
당신도 나에게 아무 거리낌이나 망설임이 없이 줄 수 있는가?“
<!--[if !supportEmptyParas]--> <!--[endif]-->
문득 어느 날 박봉우 시인이 전주 시청 앞에서 만났을 때,
그 이가 거의 다 빠진 시인이
추억을 회상하듯 하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전혜린과 뽀뽀도 했었는데,”
그 말의 진위를 떠나 그 때 박 시인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던
그 슬픈 듯 처연한 듯 하던 그 쓸쓸한 미소,
<!--[if !supportEmptyParas]--> <!--[endif]-->
돈이나 시간이 그런 것이다.
있을 때는 모르다가 없을 때는 허전한 시간과 돈,
당신에게 필요한 시간은 얼마고
필요한 돈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if !supportEmptyParas]--> <!--[endif]-->
2017년 7월 18일, 화요일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큼 다가온 겨울에 길을 나서며, (0) | 2017.11.22 |
---|---|
숨어 사는 것은 즐거움인가, 괴로움인가?, (0) | 2017.11.22 |
행복이나 불행은 예고도 없이 온다. (0) | 2017.07.24 |
시간 속에 살다가 시간 속에 사라져 가는 우리들, (0) | 2017.07.24 |
옛글을 읽으며 가만히 나를 들여다본다. (0) | 2017.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