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뜻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의 매일 매일의 화두가 아닐까?
조선 오백 년 역사 속에 큰 자취를 남긴 퇴계 이황 선생이
그가 살았던 <도산서당의 기문記文>에서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어떤 사람과의 문답을 통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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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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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사랑하는 옛 사람들은 반드시 이름난 산을 얻어서 스스로를 의탁했는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청량산에서 살지 않고 여기서 지내는 것입니까?”
내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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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은 만길 높이로 절벽처럼 우뚝 서 있고,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를 아슬아슬하게 굽어보고 있습니다. 늙고 병든 이 몸으로서는 편안히 지낼 수가 없고, 또한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데에는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옳지 않습니다.
이제 비록 낙동강이 청량산을 지나쳐 흐르긴 하지만, 청량산 속에서는 물줄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도 본시 청량산에서 살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량산을 뒤로 미루어 두고 먼저 여기에서 지내는 이유는, 무릇 산과 물로 어우러진 경치를 아울러 즐김으로써 늙고 병든 이 몸이 편안히 지내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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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시 물었다.
“옛 사람의 즐거움은 마음에서 얻는 것이지 바깥의 사물에서 빌리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무릇 안연顔淵이 살던 누추한 동네와 원헌原憲이 거처하던 가난한 집에서 도대체 무슨 산과 물의 즐거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릇 바깥 사물에서 기대한다는 것은 모두가 참된 즐거움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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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 안연과 원헌이 처한 바는 때 마침 주어진 자신의 그런 처지에서 안빈낙도를 잘하였기에, 고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경지를 누리게 한다면, 그 즐거움이 어찌 우리보다 더 깊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공자와 맹자도 아닌 게 아니라 산과 물에 대해서 자주 일컬으며 깊이 깨우쳤던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말이 믿을 만 하다면, ‘나는 증점曾點과 함께 하련다.’ 라는 탄식이 어찌 기수沂水가에서 나왔으며, ‘여기에서 한 해를 마치겠다.’ 라는 바람이 어이하여 노봉盧峯 꼭대기에서 읊어졌겠습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예 그렇겠군요.” 라고 말하고는 물러가버렸다.
퇴계 이황선생이 그가 살았던 도산서당과 청량산 근처를 두고 쓴 <도산서당> 기문에 실린 글이다.
어떤 사람은 강가에 터를 잡고 살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깊은 산속에 터를 잡고서 살기를 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산과 강, 두 곳이 다 충족되는 곳에
터를 잡고 살고자 한다.
저마다 다른 자연관이나 사생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시의
절해고도 같은 오래 된 아파트 8층에서 그냥 이 방 저 방,
책장을 오가면서 살고 있으니,
언젠가 나도 퇴계 이황선생처럼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되는 그 경이를 느끼며 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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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4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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