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고귀한 책무,
세상의 그 누구든 자기의 길을 간다,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지未地이고,
그 미지의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날지,
아니면 어떤 유토피아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요행을 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삶이란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미지의 길 앞에선 스스로의 운명을 안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소경이 밤 길 간다고 답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디를 언제까지 갈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가야하는 그곳으로 간다는 사실만 확실한 삶,
과연 왜 살고,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그 물음에 독일의 작가인 괴테는 다음과 같이 답을 풀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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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을 아무리 보아도 거기에는 인생이 없다.
반듯하게 서서 자기 주위를 둘러보라.
자기가 인정한 것을 우리는 붙들 수가 없다.
귀신이 나오든 말든 나의 길을 가는 데에 인생이 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는 고통도 있으리라. 행복도 있으리라.
어떠한 경우에도 인생은 완전한 만족이란 없는 것이다.
자기가 인정한 것을 힘차게 찾아 헤매는 하루하루가 인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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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그 운명을 헤매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의 자세일 것이다. 그럴진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로 사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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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특권은 누구도 가질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고통의 손길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나
불쾌한 상황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모든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고상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만감,
불행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다는 자만감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정신은 자아를 현실과 분리하는 과정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주받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고상한 정신이다.”
헤르만 헤세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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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나 헤세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아니,
이 세상을 살다간 모든 현자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至高의 진리는
길을 잃고 헤매면서도 간절히 원하며 찾고자 하는 ‘사랑’이다.
어떤 대상일지도 있지만, 어떤 사물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의무이자 책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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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괴롭혀서는 안 돼, 특히 자신이 옳은 입장을 때는 더욱 그렇단다.”
월리엄 사로얀의 <인간 희극>의 한 소절이
가슴을 두드리고 가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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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2일 화요일,
아파트 화단에 핀 꽃무릇 상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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