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을 넘어, 강릉 소금강에 이르고, 월정사 지나 적멸보궁 가는 길
2017년 9월 둘 째 주 금요일 밤에서 일요일까지 그 아름다운 강원도의 산천을 걷습니다.
조선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인 고형산이 개척한 대관령을 넘어 노인봉 자락의 소금강을 걸어서 답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사천진에 들러 허균을 만날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소금강이라고 했을까 싶은 곳이 바로 오대산의 소금강이지요. 그 다음날은 월정사에서 상원사, 적멸보궁을 오르고 오대천을 따라 내려와 월정사와 전나무 숲길을 걷고, 메밀꽃 피는 봉평에 가서 이효석을 만나고, 양사언이 하룻밤 묵고자 했지만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여드레를 묵었다는 팔석정과, 율곡 이이의 아버지의 자취가 서린 판관대와 봉산서재 일대를 걸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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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봉老人峰은 높이가 1,338m로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에 속해 있다. 오대산은 크게 보아 진고개를 지나는 국도를 사이에 비로봉(1,563.4m), 호령봉(1,561m), 상왕봉(1,491m), 두로봉(1,421.9m), 동대산(1,433.5m)의 다섯 봉우리와 그 사이의 많은 사찰들로 구성된 오대산지구, 그리고 노인봉 (1,338m)을 중심으로 하는 소금강지구로 나뉜다.
노인봉 남동쪽으로는 황병산(1,407m)이 있고, 북동쪽으로 긴 계곡이 청학천을 이룬다. 노인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하류로 내려가면서 낙영폭포, 만물상, 구룡폭포, 무릉계로 이어지는데 이름하여 청학동소금강(靑鶴洞小金剛)이다. 노인봉은 정상에 기묘하게 생긴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아, 그 모습이 사계절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면 백발노인과 같이 보인다 하여 노인봉이라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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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봉은 현재 오대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소금강 계곡을 감싸안고 있는 노인봉(1,338m)이 진고개로 오대산과 그 맥을 잇고 있을 뿐, 소금강 계곡은 오대산과는 사실 별개의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오대산국립공원은 월정사지역과 소금강지역으로 구분해 부른다.
소금강이라는 별칭을 가진 명소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1970년 우리나라 최초 명승1호로 지정된 청학동소금강이 대표적인 절경이다. 소금강이라는 별칭을 부여할 때는 대개 지역 이름을 앞에 붙여 경기 소금강, 정선 소금강 등으로 부른다.
청학동 소금강은 소금강하면 청학동 소금강을 지칭하기도 하며, 오대산 국립공원속에 포함되면서 오대산 소금강이라고도 하고, 일부에서는 연곡소금강, 청학천이라고도 불린다.
노인봉에서 발원한 청학천이 13km 흘러내리며 이룬 이 소금강은 기암기석과 층암절벽, 소와 담, 폭포 등이 절경을 빚고 있다. 무릉계를 기준으로 상류쪽을 내소금강, 하류쪽을 외소금강이라 한다. 외소금강에는 금강문, 취선암, 비봉폭, 그리고 내소금강에는 삼선암, 세심폭, 청심폭 등이 대표적인 경관을 이룬다.
이밖에도 30개가 넘는 경관지가 있는데, 특히 금강산의 그것과 흡사한 만물상, 구룡연, 상팔담 등이 볼만하다. 계곡 요소마다 철난간이나 구름다리 등이 놓여 있다. 소금강은 무릉계 무릉폭에서 그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릉계에서 1.1km 거리에는 계곡 물이 열십자 모양의 못을 이룬 십자소가 낭떠러지 아래에서 깊은 물을 일렁이고, 다시 600m 지점에는 식당암이라는 평평한 암반이 있다.
식당암에서 극락고개를 오르면 세심대와 청심대를 지나 구룡폭(구룡연)에 이른다. 아홉 폭포가 연달아 내리꽂히는 자태가 장관이다. 구룡폭 바로 위에는 만물상이 있다. 거인의 옆얼굴을 닮은 귀면암, 촛불 형상의 촛대석, 암봉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 낮이면 해 같고 밤이면 달 같은 일월봉, 거문고 타는 모습의 탄금대 등이 만물상을 장식한다. 관리사무소에서 만물상까지는 약 4km로 2시간쯤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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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석가모니의 정골 사리 곧 머리뼈 사리를 모신 곳으로서 오대산 신앙을 한 데 모으는 구심점으로 나라 안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다섯 보궁 중의 한 곳이다.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인데 어디쯤에 석가모니의 머리뼈인 사리가 모셔져 있는지 알 길이 없으며 불상조차 놓여있지를 않다. 건물 뒤쪽 석단을 쌓은 자리에는 50cm 정도 크기의 작은 탑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이것은 진신사리가 있다는 ‘세존진신탑묘’이다. 신앙심이 깊은 불교신자들이 오대산이라면 월정사나 상원사보다 적멸보궁을 먼저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적멸보궁에 서서 바라보면 동서남북으로 적멸보궁을 에워싼 오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 오대산五帶山을 두고〈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설악산의 남쪽에 있는 오대산은 흙산으로 바위와 골짜기들이 겹겹으로 막혀져 있다. 가장 위에는 다섯 개의 대가 있어 경치가 훌륭하고 대마다 암자 하나씩이 있다. 그 중 한 곳인 중대(中臺)에는 부처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상당부원군 한무외(韓無畏)가 이곳에서 선도를 깨닫고 신선으로 화했는데, 연단할 복지를 꼽으면서 ‘이 산이 제일이다’
예로부터 이 산은 전란이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에서는 산 아래 월정사 옆에다가 사고를 지어 역조실록을 갈무리하고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예로부터 신령한 산으로 이름이 높은 오대산은 여러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두 왕자인 보천, 효명이 중대 비로봉에서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오대산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산으로 삼신산에 들었다. 옛 사람들은 이곳을 ‘삼재가 들지 않는 명당 터‘라고 여겼던 곳이고 “어떤 재앙이 닥쳐도 안전한 땅”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성지로 발전하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대산의 중심을 이루는 줄기인 비로봉 아래 용머리에 해당하는 자리 잡은 적멸보궁 터는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명당이라 감탄해 마지않은 터이다. 팔도를 관찰하다. 오대산에 올라온 박문수는 이곳을 보고 “승도들이 좋은 기와집에서 일도 않고 남의 공양만 편히 받아먹고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는 곳이다.
적멸보궁에서 오대천을 따라 월정사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가본 사람들만이 안다.
그 길이 끝나는 지점에 늘어선 전나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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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연려실기술?에는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군이 단대령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령大嶺 또는 대관산大關山이라고도 불리고 옛날 관방關防을 두고 목책을 설치했기 때문에 ‘대관령’이라고 불린 이 고개를 처음 개척한 사람은 조선 중종 때 강원 관찰사로 부임했던 고형산高荊山(1453-1528)이었다고 하며 그는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관의 힘으로 몇 달 동안에 걸쳐 이 고개를 열었다고 하는데, 대관령 아래에 강릉이 있다. 강릉 지역 사람들이 강릉 땅이 살기가 좋고, 대관령이 하도 험한 고개라서 “강릉에서 나서 대관령을 한 번도 넘지 않고 죽으면 그 보다 더 복된 삶은 없다.”고 했던 강릉에서 위대했던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율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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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죽헌동에 자리 잡은 오죽헌(烏竹軒)에서 조선시대의 학자인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났다.
평창군 진부면에 오대산이 있으며, 그 아랫자락인 평창은 이효석의 고향이다.
‘1930년대 우리 문단에서 가장 참신한 언어 감각과 기교를 겸비한 작가’라는 평을 받았던 이효석(李孝石)은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에서 태어났다. 1930년 경성대 법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25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봄>이 뽑혔으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초년 작가시절 유진오(兪鎭午)와 함께 도시유랑민의 비참한 생활을 고발한 작품들을 썼기 때문에 카프(KAPF) 진영으로부터 소위 동반작가라는 호칭을 듣기도 했던 그는 「노령근해」와 같은 정치적 경향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경제적인 곤란을 견디다 못한 이효석은 스승의 주선으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한다.
하지만 주위의 지탄과 자괴감에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었으며, 1931년 결혼한 뒤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여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찾았다. 그 후 초기의 경향 문학적 요소를 탈피하여 다양한 서정의 세계로 들어서서 「메일꽃 필 무렵」 「돼지」 「산」 「들」과 같은 단편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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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이후에는 허무주의적 요소가 가득 담긴 「개살구」 「장미 병들다」 「화분」 등을 썼다. 1940년 아내와 둘째아이를 잃고 극심한 실의에 빠져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건강을 잃은 그는 끝내 뇌막염으로 병석에 누운 지 20여 일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柳宗鎬)는 ?적요(寂寥)의 아웃사이더?라는 글에서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을 쓰게 된 동기와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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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석의 집안과는 한 마을에 살면서 아주 가까이 지내던 성공여라는 사람이 있었다. 성씨 집에는 스무 살쯤 된 옥분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봉평서는 제일가는 일색이었다.
뒷날 집안 형편이 기울어 이웃고을인 충북 제천으로 이사를 갔다. 영에서 뜨는 달과 잔약한 메밀꽃과 머루 다래 같은 산과와 청밀을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던 효석은 서른 살 나던 해, 어릴 때 알았던 ‘곰보 영감’과 조봉근과 충주집과 성옥분의 심상에 상상의 허구를 곁들여 명작 ?메밀꽃 필 무렵?을 써서 고향에 대한 최대의 헌사를 바친 셈이다.”
한편 이곳 평창군 봉평면 평촌리 흥정계곡에 팔석정八石亭이 있다.
팔석정(八石亭)은 그 이름 때문에 건축물인 정자(亭子)로 오해하기 쉽지만 실은 정자가 아니라 여덟 개의 바위를 가리킨다. 물 맑은 흥정계곡의 물길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다.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이곳 경치에 반해 여덟 개의 바위에 이름을 붙였다 하여 팔각정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각각의 바위에는 전설 속 삼신산을 가리키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라는 글씨와 석대투간(石臺投竿; 낚시하기 좋은 바위), 석지청련(石池淸蓮; 푸른 연꽃이 피어있는 듯한 바위), 석실한수(石室閑睡; 낮잠을 즐기기 좋은 바위), 석요도약(石搖跳躍; 뛰어 오르기 좋은 바위), 석평위기(石坪圍碁; 장기 두기 좋은 바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하는데 세월이 흘러 지금은 글씨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이곳에서 가까운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의 '판관대(判官垈)'는 신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율곡의 아버지인 이원수가 재직한 수운판관(水運判官)을 따서 '판관대(判官垈)'라 이름지었는데, 수운판관이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 관직이다.
하지만 율곡을 잉태할 당시(當時)인 1536년에 이 원수(李元秀)공의 관직(官職)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원수 공이 수운판관이 된 때가 1550년임을 고려해 볼 때 와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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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 서쪽에는 모양이 매우 수려한 삼신산三神山이 있고, 평촌리 동남쪽에는 그 모양이 머리에 쓰는 관모와 비슷한 관모봉이 있다. 평촌 마을 뒤에 있는 봉산蓬山은 예?鰥〈? 덕봉德峯이라고 하였는데, 양사언이 이 산에서 놀고 간 뒤로 봉산이라고 지었고, 평촌에 있는 율곡 이이를 모신 사당이 봉평서재峯坪書齋라고 부르는 봉산서재이다.
봉산서재는 이곳에서 율곡이 잉태된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고을 유생들이 1906년에 창건(創建)한 사당(祠堂)인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곳에 살고 있던 홍재홍등의 유생들이 율곡과 같은 성인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상소를 올려 1905년에 판관대를 중심으로 한 10리 땅을 하사받았고 유생들이 성금을 모아 이이의 영정을 모신 봉산서재를 지은 뒤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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