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속에 변하는 세상 풍경,
그새 오래 전 일이다. 1995년 가을에 모악산 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을 때 큰 절의 모스님으로부터 몇 사람이 초대를 받아 절에 갔다.
주지스님이 차를 따르면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고 일행들이 듣고 있던 중, 그 중 한 사람이 말씀 도중에 주지스님에게 질문을 드리고자 하는데, 기독교인이라서 스님에 대한 존칭이 생각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님” 하고 느닷없이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 상황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말씀을 이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우리들은 웃을 수도 없고, 그냥 가슴만 움켜잡고 있을 뿐이었다.
중 ‘승僧’자니까 ‘중님’ 이라고 해도 맞고, 스님이라고 불러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시속에서 정한 것도 아니지만 ‘스님’이 관례가 되었고, 그것이 습관이 되다가 보니, 그 ‘중님’이라는 말이 그렇게 어색한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중님도, 맞고, 스님도 맞다, 그런데 그 스님들의 삶의 형태나 수행의 형태가 세월 속에 많이 변했다.
고려 때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이규보가 지은 <송 찬수좌 환 본사서送璨首座還本寺序>를 보면 그 당시 스님들의 행적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대개 중으로써 한 번 청산에 들어가면 나물 먹고 물마시고 일생을 마치며, 홍진紅塵을 밟지 않는 것은 머리 깎고 검은 옷 입은 자의 직무가 그래야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도로써 본다면 이 역시 고립孤立. 독행獨行하여 한 가닥의 세절細節을 지키는 것에 불과하니, 무엇을 옳다고 할 수 있으랴. 달인達人은 그렇지 않고 능히 물物과 더불어 추이推移하되 사물에 물들지 아니하며, 능히 세상과 주선하되 세상에 집착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 높은 행실에 손상됨이 없으며, 또한 그 자액滋液이 사람에게 두루 미치는 것이다.
우리 스님의 행세하는 것은 이 도를 따라서 왕궁의 제전에 나아가 설법하는 것도 사양하지 아니하며, 상문相門의 후저後邸를 찾아가서 시주를 받는 일도 거절하지 아니하며, 또한 우리 무리와 더불어 시사詩社에 출입하며 주석에 참예하여 자유롭게 노닐어 가함도 가하지 않음도 없으니, 참으로 달관한 사람이라 이를만하다.
그렇지만 서울에 오래 머물러 있고 보니, 능히 상하桑下의 그리움이 없을 수 없는지라 세상 사람들을 집집마다 찾아가서 호유할 수 없으매 어찌 스님으로써 인간 세상에 연연한 생각이 없지 않다고 하지 않겠는가?
지금에야 산수가 맑고 깊숙한 경치 좋은 절을 얻어서, 막대기 하나를 손에 들고 돌아가는 듯이 굴갓 하나 이마에 얹고 거뜬하게 한가한 구름이 산봉우리로 돌아가는 듯이 떠나가니, 우리들과 같이 바쁘고 바쁜 인생이 어찌 마음속으로 부러워하지 아니하랴.
비록 그러나 나 역시 늙었으니, 또한 어찌 다 버리고 영원히 세상을 떠나 백운과 청산 사이에서 스님을 모실 날이 없겠는가. 전송의 자리에 시를 지어 작별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늙은 거사는 서문을 쓰는 바이다.“
그 당시 이름 높은 스님들은 왕궁에서 법회도 열었고, 집집마다 시주를 다니기도 했으며, 깊은 산속 깊숙한 곳에서 도를 닦기도 했고, 온 나라를 걸어 다니며 고행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사람들이 절을 찾아다니고, 스님들은 절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그러다 보니 온 나라를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찾아보기가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사물에 물들지 아니하며, 능히 세상과 주선하되 세상에 집착하지 아니한다.”
이규보 선생의 글 속에서 보이는 그런 삶을 살 수도 없을뿐더러 살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세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하면서도 이규보 선생이 살았던 그 시절처럼 세성을 초월한 것처럼 살았던 그런 스님들이 그리운 것은 그 무슨 연유인지,
2017년 12월 4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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