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책을 읽었더니 그만 지쳤다네.
하루 종일, 이 책을 펼쳤다가, 다시 저 책을 펼치고,
다시 뽑아서 이 책을 읽다가, 몇 줄의 글을 쓰고,
그러다 보니 하루가 저물었고, 다시 또 새날 새벽이다.
시작도 없지만 끝도 없는 길이 책속으로 난 길이고,
그 길에서 나는 매일 새로워지기도 하고, 가끔은 회의懷疑에 젖기도 한다.
오랜 나날을 길에서 길을 찾았고. 오랜 나날을 책에서 길을 찾았는데도
내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확실하지 않고, 그래서 자다가도
불현 듯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 책을 펼치는 나날,
지금은 어느 시대인가?
어느 날 한 중이 향림 화상에게 찾아와 물었다.
“저 달마는 멀리 이곳까지 와서 설교도 않고 소림산에 들어박힌 채
9년 동안이나 마주 앉아 있었다지만 도대체 무엇 하러 중국에 왔습니까?”
향림 화상이 대답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그만 지쳤다네.”
<벽암록>에 실린 글이다.
나도 그런 것일까?
아직 해야 할 일이 무던히 남아 있는데,
한 중이 운문을 찾아와 물었다.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운문이 대답했다.
“나무는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천지에 가을바람만 가득하지.”
그럴 것이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다 눈앞에서 금세 사라지고
시간이라는 바람이 이 세상에서 추구했던 것들을
다 ‘헛것’이라고 말하면서 봄 눈 녹듯 순식간에 데려갈 지도 모른다.
문득, 갑자기, 가고 부질없어 질 것들에 연연해하는 나를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하는데, 나는 너무 세상의 모든 일에
연연해하는 것은 아닌지,
시계의 초침소리가 정오를 알리던 오포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리는
이 새벽에,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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