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

산중산담 2018. 4. 27. 13:37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못살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고,

어떤 사람은 자살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 부끄러움을 견디고

오히려 당당하게 그 시간들을 잘 넘긴다.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부끄러움.’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묘사한 글 한 편이 있다.

 

부끄러움이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없어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없으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있다.

 

그러므로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부끄러운 일에 부끄러워함이 있는 사람은

그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부끄러워함이 없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게 되려고 생각하게 되고,

부끄러움이 없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는 것이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이것을 일러서 부끄러움을 닦는다고 한다.

요컨대 이를 닦아 힘써 실천할 뿐이다.

 

부끄러움을 닦는 법(脩恥贈學者),‘이라는

이 글을 지은 식산(息山)이만부(李萬敷)1664년인 현종 5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옥(李沃)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숙종 때는 남인(南人)과 서인(西人) 사이의 정쟁이 치열했는데,

영조 8년인 1732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가계는 근기남인(近畿南人)의 명문이었으나

아버지가 20년 동안이나 귀향생활을 하자,

이를 계기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학통은 남인학파에 속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조선 중기의 학자 허목(許穆)의 학문을 이어 받았고,

다산 정약용의 선조인 정시한(丁時翰) 등과 교류하였으며,

<성호사설>을 지은 이익(李瀷) 등의 후배를 양성하였다.

서울(한양)에서 성장한 그는 1697(숙종 23)에 상주로 낙향한 뒤

영남의 이현일(李玄逸), 이형상(李衡祥) 등과 학문적인 교류를 통하여

한평생 재야 학자로 지냈다. 저술활동에 몰두한 이만부는

조선 후기 영남학파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리학자이자 실학자였던 이만부는 서예에 뛰어났고,

글씨도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특히 잘 썼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

 

오늘의 이 시대에 꼭 들어맞는 이 글의 요지는 간단하다.

부끄러워해야 능히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

그래서 부끄러움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심오하고 심오하면서도 간단한,

역설적이면서도 단순 명쾌한 철학적인 시를

부끄러울 ’ ‘서른다섯 자를 써서 사람의 마음을

부끄러움을 부끄럽게도 하고, 부끄러움이 없어지게도 한 것이다.

스스로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한 사람이

명나라 때 사상가인 이탁오였다.

 

스스로 헤아려보기에 마음에 삿된 것이 없고, 몸에 잘못이 없고,

형체에 티끌이 없고, 그림자에 먼지가 없어 예로부터 부끄러움이 없다

꿀릴 것이 없다란 말이 있었는데, 내가 실로 그에 해당한다.”

 

오늘의 시대에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이만부 선생이 살았던 그 시대에도 충분히 부끄러움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고,

지금의 시대도 마찬가지로 부끄러움을 간직한 채 저마다 살아가고 있다.

오죽하면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가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 라는 글을 썼겠는가?

나도 그렇고, 그대도 그렇고, 아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속성 학원에 가서 올바른 부끄러움을 배워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지고, 그래서 혼자서 비식거리며 웃기도 하고,

자책도 하는 그런 시간을 오래도록 가져야겠다.

그런 뒤에야 지금까지의 괜히 부끄럽고, 부끄러운 그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봄바람 같은 환한 미소 짓는 아름다운 시대가 찾아올 지도 모르겠다.

2018313일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