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나날을 길에서 보내다보니,
이리저리 펼쳐진 길을
오래 오래 걷다가 보니,
길이란 것이 얼마나 신기하면서도 쓸쓸하게 이어지는지,
그 길의 끄트머리에서 바라보는 지나온 길이
얼마나 서럽고도 가슴 아린 슬픔이며
기쁨인지를 안다.
가고 또 가도 길은 멀고도 멀고,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나설 수 없는 길 앞에서
백석의 시 한편을 읽는다.
“거적장사 하나 산 뒷녘 비탈을 오른다.
아, 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산 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간다.
이스라치전이 그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뚜물같이 흐린 날 동풍이 설렌다.“
거적장사라는 구절에
무거운 짐 이고 고개를 넘어가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이고,
수리취라는 낱말에 할머니가 봄마다 밀가루 뒤범벅으로 해주시던
수리취떡이 생각나고,
가난했던 시절, 톱톱한 쌀뜨물을 넣고 끓여먹던
누룽지가 생각난다. 그리고
석양녘에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를 밟고 가는
한 사내, 그것이 누구였던가, 바로 나였다는 것도 안다.
길은 길대로 이어지고,
내 길 또한 내 운명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절실히 깨닫는다.
“지금 홀로 스스로 가노니,
가는 곳곳마다 그를 만나네.
그러나 나는 지금 그가 아니라네.
지금 그가 바로 나라네.“
조동종의 창시자 동산 양개가 한 말과 같이
내가 나를 만나기 위해 가는 것이 길인가?
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만나러 가는 것이 길인가?
2018년 4월 26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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