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천안의 은석산에서 박문수를 만나고 마일령을 넘는다.

산중산담 2019. 6. 26. 10:47


천안의 은석산에서 박문수를 만나고 마일령을 넘는다.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천안과 병천 일대의 옛길과 문화유산을 찾아갑니다.

천안시 병천면은 현재 병천 순대로 알려져 있는데, 그 병천 뒷산인 은석산 정상부근에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상징적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박문수朴文秀의 묘가 있습니다.

은석사로 오르는 산길이 얼마나 그윽하고 아름다운지, 그리고 박문수 묘에 올라서면 왜 이 자리가 명당자리라고 알려져 있는지 풍주에 문외한이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은석산 자락에 위치한 천안시 북면 은지리에 있는 장이 병천?川장이다. 오늘날 병천순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아우내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시민과 유석 조병옥이 태어난 이곳은 삼일운동 당시 그 유명한 유관순 누나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바로 그 장터이다. 그런데 이곳에 시장이 개설된 이유가 재미있다.

박문수가 이곳 병천 지방에 체류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마부 노릇을 했던 김모씨는 지관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런 연고로 해서 박문수는 그에게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잡아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래서 지금의 은석산銀石山 정상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곳의 형세 역시 장군대좌형이기 때문에 박문수의 후손들도 병천시장을 개설함으로써 지세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박문수는 분묘로부터 바라볼 수 있는 동안은 자손이 번창하지만 만약에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옮기면 자손은 그 즉시 자손들이 몰락한다고 해 옮길 수도 없는 묘가 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산 길이 있고, 이름난 명당자리인 박문수 묘가 있는 은석산을 답사하고, 역사 속의 옛길인 마일령을 넘을 예정입니다.

택리지 <팔도총론> ‘충청도.’ 편에산줄기 하나가 북쪽으로 가서 청주시 명암동에 있는 거대령巨大嶺이 되고, 다시 달천을 끼고 서북쪽으로 경기도 죽산부근에 이르러서 칠장산七長山이 되었다. 칠장산에서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간 산줄기는 흩어져서 한강 남쪽의 서운산?광덕산 등 여러 산이 되었고, 서남쪽으로 간 산줄기는 오산?평택 쪽으로 이어졌다.

그 맥이 진천에서는 대문령大門嶺이 되고, 목천에서는 마일령磨日嶺이 되었다.“ 라고 실려 있는데, 거대령은 청주의 상당산성 부근에 있는 작은 고개이고 대문령은 진천에서 안성의 청룡사로 넘어가는 고개이지만 대문령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안시나 문화원에 문의해도 찾을 길이 없어서 글을 놓고 며칠 째를 보내다 밤에 일어나니 한심하기만 했다. 나는 잠이 안 오는데, 아내는 어떨까 싶어 바라보니 나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잠만 잘 자고 있고 아이들 방을 열어보아도 역시 마찬가지다. 고민을 풀어준 것은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국지명총람이었다. 천안시 목천읍 송전리에 매일고개(만일고개, 만일령, 매일령,):천안시 성거읍 천흥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만일사가 있다.“ 이 글을 찾아 읽을 때의 기쁨이라니, 마일령이 25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만일령, 매일고개, 만일재로 바뀌고 절 이름까지 만일사가 되다가 보니 역사 속에서 지워지고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천안과 목천 사이를 잇는 큰 고개였다.“ 라고 실려 있는 마일령을 넘어 가기 위해 천안 간 고속도로를 달려서 성거읍에 들어선 것은 열시 반쯤이었다. 길은 다시 성거산 자락에 있는 천흥리로 이어진다. 이곳 천흥리 일대에 천흥사天興寺라는 거대한 절이 들어선 것은 고려 태조 4년인 921년이었다.”

 

천흥사를 지나고 길은 홍경사비를 찾아나섭니다. 천안과 평택 사이를 흐르는 안성천 변에 자라잡은 홍경사터의 홍경사비는 국보 제 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찾는 이 없이 국도 1호선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역사의 길과 폐사지 천흥사터, 그리고 홍경사비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천안에 있는 은삭산과 마일령을 다녀오다.

천안에 있는 은삭산과 마일령을 다녀오다.

 

천안에 다녀왔다. 은석산,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골짜기를 올라가면

나타나는 은석사, 그곳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 묘가 있었다.

처음과 두 번째 세 번째도 그랬다.

올라갈 때 천안에 이런 곳이 있을까 하고 올라갔던 그곳,

폭우에 이어진 산사태로 그 모습이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그 작은 시내가 다 사라지고 큰 암반이 끝없이 어이지고, 사내는 공사중이었다.

자연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것 같지만, 가끔씩 무서운 기세로 세상의 모습을

순식간에 바꿔 놓는다는 사실을 두 분으로 목격한 것이다.

그래도 그 때 그모습으로 남아 있는 은석사와 박문수 묘,

은석산 자락에 위치한 천안시 북면 은지리에 있는 장이 병천?川장이다. 오늘날 병천순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아우내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시민과 유석 조병옥이 태어난 곳인데, 이곳이 이름난 것은 191931일 기미독립운동 때문이다. 삼일운동 당시 그 유명한 유관?? 누나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바로 그 장터인데, 이곳 병천에 시장이 개설된 이유가 재미있다.

박문수가 이곳 병천 지방에 체류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마부 노릇을 했던 김모씨는 지관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런 연고로 해서 박문수는 그에게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잡아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래서 지금의 은석산銀石山 정상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곳의 형세 역시 장군대좌형이기 때문에 박문수의 후손들도 병천시장을 개설함으로써 지세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박문수는 분묘로부터 바라볼 수 있는 동안은 자손이 번창하지만 만약에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옮기면 자손은 그 즉시 자손들이 몰락한다고 해 옮길 수도 없는 묘가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암행어사 중 박문수에 관련된 암행어사 설화가 제일 많다. 대개 박문수는 잘못된 평판이나 소문의 진실을 밝히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그려지고, 때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백성을 구명하여 억울함을 풀어주는 정의의 심판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실제 역사 속에서 박문수가 정작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없다.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것은 고작 한 번이었다. 1727(영조 3) 9월 박문수가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史)로 임명되어 영남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암행어사가 아니고, 어사의 직함을 가진 채 다음 해 3월까지 안동을 비롯해 예천, 상주 등지를 순행하며 도내 명망 있는 인사들을 공개적으로 만났던 것이다. 이때, 어사 활동으로 박문수는 다음 해에 곤경을 처하기도 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亂이라고도 함)이 발생하였는데, 난을 주도한 영남 지역 인사 가운데 한 명이 정희량이었다. 그런데 마침 박문수가 어사로 활동하면서 동계 정온의 후손인 정중원(鄭重元)의 상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정중원의 아들이 정희량이었기 때문에 반대세력으로부터 박문수가 영남을 순행하면서 거사를 모의한 것을 알고 있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처럼 역사 기록을 보면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으나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영남지역의 선비들은 과거를 볼 수 없었고, 그 여파가 1792년까지 이어졌으며, 이의 폐단을 알았던 정조임금이 1792년 영남지역의 선비들만을 위한 별시를 안동의 도산서원의 시사단에서 베풀었다., 그 때 모인 선비가 1800명에 이르렀다. 역사의 사실과 전해오는 설화가 얼마나 다른가를 확인하며 걸었던 은석산의 은석사 가는 길이 다시 옛 모습을 되찾으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인지,

 

하루 종일 이런 저런 생각으로 걸었던 천안의 길에 동참햇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