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 예천시 풍양면에시 풍산읍에서 구미시 낙동강대교까지

산중산담 2019. 6. 26. 10:53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다섯 번째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다섯 번 째 예천시 풍양면에시 풍산읍에서 구미시 낙동강대교까지-

 

낙동강 천 삼 백리 다섯 번째 여정이 2018622()일에서 24()일까지 23일간 실시됩니다.

 

비경중의 비경 의성포 물도리동

그처럼 낙동강의 큰 흐름과 내성천과 금천이 합쳐지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의성포가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느닷없이 커브를 돌면서 거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물도리 동으로 이름난 곳은 안동이 하회마을과 정여립이 의문사한 전북 진안의 죽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와 못지 않게 천하 비경을 자랑하는 곳이 예천군 의성포 물도리 동이다. 향석초등학교에서 내성천을 건너면 비룡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1km쯤 올라가면 이곳 사람들이 남산절이라 부르는 장안사가 있다. 대구 박지숙씨의 배려로 장안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실상사에 계시다 이 절의 주지로 온 영해가 고향인 지정스님은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평민 의병장 신돌석에서부터 견훤과 왕건 그리고 목은 이색에 대해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장안사 뒷길로 300m쯤 오르면 전망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의성포 물도리동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만큼 신비하기 짝이 없다.

의성포는 회룡 남?却? 있는 마을로 내성천이 감돌아 섬처럼 되어서 조선조에 귀양지로 되었던 것을 고종 때 의성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의성포라고 하였다고도 하고, 1975년 큰 홍수가 났을 때 의성에서 소금 실은 배가 이곳에 왔으므로 의성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육지 속에 고립된 섬처럼 그렇게 떠 있는 의성포의 물도리 동은 정감록의 비결서에 십승지지로 손꼽혔었고 오지지만 땅이 기름지고 인심이 순후해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예천군 풍양면(豊壤面)은 원래 용궁군의 남쪽이 되므로 남하면이라 부르다가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풍양 부곡의 이름을 따서 풍양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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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는 문경시 영순면 이목리로 건너가는 하풍나드리 또는 꽃개나루가 있다. 너동 또는 너들마라고 부르는 마을 북쪽에는 용담산이 있고 너들마 서쪽에 한들개라는 큰 들판이 있다. 하풍제방 뚝을 따라가며 바라본 강 건너 말등리에 강물은 휘돌아가고 모양이 말처럼 생겼다는 말바우 아래에서 영강이 낙동강으로 접어든다.

영강은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 문장대에서부터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흐른 뒤 문경군 농암면 중앙을 뚫고 가은읍 납부를 지나서 왕릉리에 이르러 서북쪽에서 오는 물을 합하게 된다. 마성면 남쪽에서 소야천(문경군 산천)을 만나 흐르다가 점촌읍과 호계면 선양면을 지나 영순면과 상주시 합창면의 경계를 이루고, 함창면 금곡리에서 이안천(상주군 삼천)을 합하여 동쪽으로 꺾이면서 낙동강에 몸을 푼다. (...)

 

크지 않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경천대 국민관광지에는 이른 아침이라 사람의 자취를 찾아볼 길이 없다. 나는 한 폭의 그림같은 경천대에서 명나라 때의 문인 오종선의소창지기중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새벽에 흐르는 강물가에 앉아있는데 어기여차 노젖는 소리가 느닷없이 들려오면 산수를 향한 정이 불쑥 솟아남을 금할 수 없다하지만 이곳 경천대에선 노젖는 소리도 뱃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낙동강 천삼백?? 가운데 자연경관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경천대는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굽이쳐 흐르는 강물, 그리고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형성되어 하늘이 만들었다하여 자천대로 불렸었다. 그 뒤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으로 경천대라 고쳤다. 별제 채득소가 바위에 대명천지 숭정일월의 8자를 새겼는데 198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경천대 남쪽 200m 지점에 있는 바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정기룡 장군이 이곳에서 용마를 타고 훈련하였다고 한다. 강 건너 중동면 회상리(回上里)는 회가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인데 횟골 북쪽 가지박골에는 철이 많이 나온다. 회상리는 노란빛으로 눈이 부시고 경천대를 벗어나자 길은 포장도로로 이어진다. 강 건너 회상 나루에는 나룻배 한 척 없고 강가에 흰 모래펄이 끝없이 펼쳐진다.(...)

 

도남서원이 있으므로 도남 또는 서원이라고 부르는 도남리에는 중동면 오상리 대비로 건너가는 대비 나루터가 있고 나루터 북쪽에는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있다. 선조 39(1606)에 창건한 도남서원에는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유성룡, 정경세를 배향하였으나 고종 때 헐리었다. 도남동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병풍산 자락으로 길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길은 없단다. 우측길로 나가서 버스를 타고 중동면 강항으로 가란다.

 

길만 나있어도 행복하다

그러나 차도 없고 하여간 산자락까지 가서보자 모양이 병풍처럼 생겼다는 병풍산(屛風山 : 365m)자락이다.(...)

 

위천은 일연스님이 입적한 인각사가 있는 군위군 고로면 학암동 화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고로면의 중심부를 뚫고 화수동에 이르른다. 강은 북쪽으로 꺾여서 산성면과 의흥면의 경계를 이루고, 우보면, 의층면과 효령면의 북부를 가로질러 효령면 병수동에서 군위군 중앙을 뚫고 지나 소보면에서 곡정천(谷亭川)을 합하고 의성군 비안면과 구천면과 안계면 경계를 이루며 서북쪽으로 흘러 단북면과 단밀면 경계를 지은 다음 상주군 우물리에서 낙동강에 몸을 푼다.상주의 얼에 기록된 바로는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우무실 마을은 낙동강으로 위천의 물이 접어들고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 등 세산三山의 지맥이 한 곳에 모인 절승의 명기라고 한다.

우물리 마을 서쪽에 있는 128m의 봉황샘이란 산을 중심으로 낙동강과 위천이 흐르기 때문에 동, , 남면이 강으로 둘러 쌓여있으며 영양에 솟구친 일월산이 남쪽으로 내려와 낙동강과 만나고 동쪽 쉰등골은 대구의 팔공산이 위천을 따라 올라와 매듭을 지었다. 그러고 강 건너 나각산은 상주시 하북면에서 비롯된 속리산이 내려와 마무리 지었기 때문에 이곳이 이수삼산합국二水三山合局의 천하대지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곳 뒷디미 마을에서 의성군 단밀면 생송동 밤실로 건너가는 나루가 뒷디미 나루터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멀리 낙단대교가 보인다.

천 삼백리 길을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의 호칭은 삼국시대에는 황산강(黃山江), 황산하(黃山河), 황산진(黃山津)으로 불리웠다가 고려 조에 들어와서 위의 강 이름과 낙동강(洛東江) 명칭을 같이 사용하였다. 조선조 이후 낙동강이 대표적인 명칭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경상북도지명유래집을 보면 낙양리(洛陽里)는 중국의 낙양성을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낙양의 동쪽을 낙동, 서쪽을 낙서, 남쪽을 낙평, 북쪽을 낙원이라 한다. 상주의 옛 이름인 상락(上洛)이 부근에 있으며 여기에 조선시대의 교통제도인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낙동면과 낙동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곳을 둘러 흐르는 낙동강의 이름을 따서 낙동면이라 하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상주의 옛 이름이 낙양이었기에 낙양의 동쪽에 있으므로 낙동이라는 이름이 붙게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가락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낙동강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의 낙단대교는 가을 햇빛을 받아 찬연하게 빛나고 낙단대교 옆에는 그 사이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옛 시절의 낙동나루는 영남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용무를 보러가거나 과거 보러 갈 때에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길목 중의 하나였다. 경산, 영주, 영천, 대구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상주를 거쳐 영동으로 빠지거나 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괴산으로 가는 둘 길 밖에 없었고 죽령을 넘는 사람들은 안동 영양 일대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보러가던 사람들은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았고 추풍령 또한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말 때문에 넘지 않았으므로 문경새재 내 계립령을 넘어서 서울로 갔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상주를 거치는 사람들은 낙동나루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남의 한복판에 있는 선산군, 산과 물이 서로 어울려 기세가 화합하고 정기와 맑음이 모여 대대로 뛰어난 인물이 났다

조선 왕조 선조 때의 학자인 여헌 장현광이 그의 고향 선산을 자랑했던 말이다. 이중환 역시택리지에서 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영남 인물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했을 만큼 이곳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났다. 포은 정몽주로부터 학통을 이어 받은 고려 말의 삼은 중의 한사람이었던 야은 길재는 이곳 선산군 고아면에서 태어났다. 서른 여덟살에 고려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낙향한 길재는 강호 김숙자같은 제자를 길러냈고 김종직은 김숙자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무오사화 당시 함께 희생되었던 서른세명의 선비들이 김종직의 제자들이었다. 또한 사육신의 한사람이었던 단계 하위지는 선산읍 영봉마을에서 태어났고 조선 중종 때 반정공신이었던 성희안이 청송의 이름난 잣과 꿀을 보내달라는 청을 받자 잣은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떻게 구하리요라는 답장을 썼던 청송의 원이었던 정붕이 제자들을 길러낸 곳이 그의 고향이었던 선산이었다. 이곳 선산 땅이 인물이 많이 태어난 곳임을 말할 때마다 이곳의 명산인 금오산과 이곳을 거쳐 흐르는 낙동강의 수려한 흐름도 함께 이야기된다.(...)

 

한적한 시골이었던 구미(龜尾)시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5.16이 일어난 지 두해 뒤였다. 1963년에 면에서 읍으로 승격된 구미시는 1971년 구미수출 산업공단이 들어서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고 그 뒤 1978년에는 시로 승격되었다.

구미시가 그토록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 것은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이곳 구미는 1960년대부터 70년대가 우리나라 경제개발정책을 대표하는 곳이 있다. 총 면적이 530만 평인 이곳 구미공단에서 총 생산액은(96년 기준) 145천억원에 이르렀다. 낙동강을 중심에 두고 낙동강을 중심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1, 2, 3공단이 밀집해 있으며 낙동강 서쪽에 4공단이 들어서고 있는데 그 때가 되면 구미공단의 총 면적이 1720만 평이 될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