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낙동강 하구둑까지

산중산담 2019. 6. 26. 14:05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낙동강 하구둑까지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열 한 번째 양산시 원동면에서 을숙도 낙동강 하구둑까지

 

2018년 정기기행 낙동강 기행이 마지막 회가 1214()일에서 16(일요일)일까지 23일간 실시됩니다.

양산시 원동면에서 물금읍을 지나고 호포를 지나고, 부산시 북구와 사상구를 지나 사하구 을숙도 낙동강 하구둑까지 걸어가서 다대포에 이르는 이번 기행에 참여바랍니다.

 

원동 또는 원댕이라 부르는 원동에는 세금으로 소금을 받다가 동학농민혁명이 막을 내린 을미년(1895)에 폐지 되었던 원동관터(院洞館)가 있으며 울산시에 식수를 보급하는 원동취수장이 있다. 자그마한 역 원동역에 들러 낙동강을 따라갈 수 있느냐 물었더니 없단다. 터널도 많고 길이 없으니 산길을 넘어가란다. 그래서 터널 위치와 열차 시간만 알려 달라고 하자 젊은 원동역장은 국가기밀이라 못 알려주겠단다. 하는 수 없지. 불법이지만 철길을 따라가는 수밖에 그러나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개옥나루에는 나룻배 한 척 보이지 않고 용수관?? 매달고 있는 철다리만 강을 질러가고 물금 취수장은 그림처럼 서있을 뿐이다. 이곳 취수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경부선 철길이 놓여있고 그 옆에 조선 성종 때 창건된 용화사가 있다. 열차가 끊임없이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기찻길 옆 용화사에 보물 제 491호로 지정된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말이나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이 용화사로 오게 된 사연이 여러가지다. 600여년 전 강 건너 고암마을에 살던 한 농부가 낙동강에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하는 물체를 보고 건져보니 이 불상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1947년 무렵 낙동강 변에 나뒹굴고 있던 것을 이곳 용화사로 옮겨왔다고도 한다.

 

낙동강에 자리잡은 모든 나루 나루가 폐쇄되었던 때에도 폐쇄되지 않았다해서 금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물금(勿禁)은 물구미 또는 물금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 구물금에 있는 물금나루에서 신라 탈해왕 21(77)에 아찬(阿?) 길문(吉門)이 군사를 이끌고 가야국과 싸워 군사 1,000여 명을 죽이는 큰 공을 세워 그 공으로 파진찬(波珍?)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물금역과 남부동을 지나 들녘으로 내려선다. 남부동은 원래 낙동강변에 있었던 마을이나 1946년 대홍수로 마을이 휩쌀려 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호포교 아래 낙동강변에는 배 몇 척 정박해있고 호포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자 했지만 매운탕집만 눈에 띈다. 다행히 백반집을 만나 식당에 들어?4?. 꼴이 말이 아니다. 모자에는 조금 전 풀섭을 헤쳐오며 붙어온 듯한 거미줄이 한 웅큼 매달려 있고 옷에도 도둑잽이들이 여기저기 묻어있다. 드디어 낙동강이 경상남도를 지나 부산광역시 북구에 접어든다. 강원도 태백에서 낙동강을 따라 이곳 부산까지 오는동안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가. 부산 지하철 금곡역에 도착하고 나는 안내판을 따라 따가운 햇살을 피한채 역 구내 통로를 따라간다. 창밖으로 부산행 열차는 요란스레 지나가고 금곡주공2단지를 지나며 강은 저 멀리로 멀어진다.

 

동원역을 지나며 뒤돌아본 물금양산일대에 낙동강은 한폭의 그림처럼 깔리우고 철길을 벗어나 강가로 접어든다. 끝없이 펼쳐진 비닐하우스 속에선 배추, , 호박들이 제철을 만난 듯 흐드러지고 붉은 상추가 풍성한 상차림을 연상케 한다. 갈대숲에선 오리 몇 마리 날아오르고 문득 아팠던 다리 다시 아프다. 너무 많이 걸었는가 강을 따라 간다는 것은 가다가 보면 대책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길이 아예 없어지거나 깊이를 알 수 없이 탁한 개울을 만나면 도리가없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길을 헤매고 헤맨 끝에 화정2교를 건넜다. 이곳 덕천동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에 대저수문이 있다.

 

낙동강 하류의 대저동, 강동동, 명지동 같은 삼각주가 낙동강 하류에 만들어진 낙동강 물이 수천 수만년을 흐르면서 흙과 모래를 실어다 날라 기름진 평야를 만들었다. 한편 삼각주들이 언제부터 육지로 변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낙동강 하구의 끄트머리에 있는 명지도에서 조선시대를 앞서는 연대의 무덤들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랜세월 저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낙동강 하구둑과 을숙도 휴게소가 저만치 보인다. 부산 나는 지금 부산 땅을 밟고서 걷고 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은 왔는데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운다라고 노래했던 조용필의 노래가 아니라도 부산은 내가 낙동강을 염두에 두고서부터 부산 그 의미 이상을 지니고 있던 땅이었다. 부산! 이곳 부산항이 강화도조약으로 개방된 것은 1876이었다. 일본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식민지 항구도시 부산이 개항되었을 때의 인구는 3300여명 남짓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낙동강의 끄트머리 강물이 바다와 만나야 되는 그러나 인공의 장벽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이 낙동강 하구둑에서 끝간데 모르게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보며 자연과 나를 돌아다보며 자연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등뼈를 이룬 백두, 설악, 속리, 태백 그리고 덕유산을 비롯한 모든 산이여. 그 산자락에서 흘러내려 동, 서해바다로 몸을 푸는 금강, 섬진강, 한강, 낙동강, 그리고 만경강과 동진강이여 세상을 넓게 바라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대들을 배신하고 괴롭힐지라도 사람들을 감싸주고 희망을 심어 주면서 세세토록 흐르고 흘러가라.

 

 

간절한 내 염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해는 구름 아래에서 그 붉은 몸체를 다시 드러내고 그 지는 햇살 아래 낙동강 가에서 몇 사람의 낚시꾼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강물은 감자를 심지 않네 목화도 심지 않네, 심는 사람은 잊혀지지만 유장한 강물은 흘러서갈 뿐,” 유장하게 흘러가는 강물 얘기가 떠오르며 문득 내 가슴속으로 형언할 길이 없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배낭에 집어넣었던 카메라를 다시 꺼내어 그 가슴 저리게 슬픈 풍경들을 렌즈 속에 담으며 저물어 가는 을숙도와 흐르고 흘러 바다로 몸을 합하는 낙동강 물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