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서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2019년 1월 26일 토요일에 군산을 갑니다. 군산의 아름다운 길 옥산 저수지 길을 걷고, 일제시대의 군산의 근대문화유산을 만나고, 신라 때 사람, 고운 최치원 선생의 자취가 남은 자천대와 발산리 문화유산을 보게 될 이 답사에 참여바랍니다.
“지금은 군산시에 딸린 하나의 면인 임피 서편에 있는 옥구읍은 만경강의 끝자락인 서해와 인접하였으며, 백제 때의 이름이 마서량현馬西良縣이다. 옥구읍 상평리 동문 밖의 옥구향교에는 자천대自天臺가 있다. 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찍이 당나라에서 학문을 닦고 돌아왔을 때 세상이 몹시 혼란하고 민심이 흉흉하자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독서로 시름을 달랬다는 곳이다. 건평이 30평쯤 되는 이 건물은 원래는 지금의 군산 비행장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말에 옥구군 유생들이 옥구읍 상평리 향교 옆으로 옮겼다. 옮기기 전의 자천대를 이곳 사람들은 원자천대라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자천대의 최치원이 앉았던 바위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국과 멱을 감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중환이 《택리지》에 기록한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자천대라는 작은 산기슭이 바닷가로 쑥 나왔고, 그 위에 돌로 된 두 개의 돌 농(籠)이 있었다. 신라 때의 최고운(崔孤雲)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와서 농 속에다 비밀 문서를 보관하였다는데, 농이란 것이 마치 큰 돌과 같았다. 산기슭에 버려져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열어보지 못하였고, 혹 이를 끌어 움직이면 바다로부터 바람과 비가 갑자기 왔다. 마을 백성은 이 농을 이롭게 여겨서, 날씨가 가물 때 수백 명이 모여 큰 밧줄로 끌어서 움직이면 바다에서 비가 갑자기 와서 밭고랑을 흡족하게 적시었다. 그런데 사객(使客, 임금의 명을 전달하거나 시행하는 사람)이 옥구현에 올 때마다 번번이 가서 구경하게 되기 때문에 고을에 폐가 될까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예전에는 이곳에 정자도 있었으나, 백 년 전에 정자를 허물고 돌 농도 땅에 묻어 자취를 없애 버려서 지금은 가서 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군산이 고향인 소설가 채만식은 소설 《탁류》에서 금강을 ‘눈물의 강’이라고 명명하였는데, 당시의 군산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급하게 경사진 강 언덕 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다닥다닥 주어 박혀 언덕이거니 짐작이나 할 뿐이다. 이러한 몇 곳이 군산의 인구 7만 명 가운데 6만 명쯤 되는 조선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 사는 곳이다. 대체 이 조그만 군산 바닥이 이러한 바이면 조선 전체는 어떠한 것인고, 이것을 생각해보았을 때에 승재는 기가 딱 질렸다. 채만식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 말에 매일 신보에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써서 친일문학가로 알려져 가난한 삶을 이어갔다. 그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를 을 짐작케 하는 글이 가까이 따랐던 후배 장영창에게 보낸 편지에 남아 있다. “장군張君, 인편이 허락하는 대로 원고지 20권만 보내주오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 같이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 본 일이 없네. 이제 임종臨終의 어느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용지를 수북이 놓아보고 싶은 걸세,” 채만식은 한국전쟁이 나기 전 두 주일을 남기고 1950년 6월 11일 익산시 마동에서 지난했던 생을 마감했다. 채만식이 태를 묻은 군산은 옥구군에 딸린 조그마한 포구였다. 백제 때의 군산은 마서량馬西良이었고, 고려 공민왕 때인 1356년에는 금강 하구에 포구를 설치하여 개성으로 가는 배들을 머무르게 하면서 진포鎭浦라고 불렀다. 1397년에는 군산진이 되었다. “군산진, 관아의 북쪽 30리에 있다. 군관 열 명, 지인 여섯 명, 사령 일곱 명이다”라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 군산은 1910년 10월에 군산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의 문신 박경이 “땅이 궁하니 3면은 좁고, 하수가 머니 양쪽 변에 편평하다” 하고 노래한 군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이곳이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한 쌀의 집산지임을 알게 되면서 쌀 수출항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말의 문장가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나라에서는 백성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가고 관리는 관리대로 농간을 부려 제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그래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전북, 충남, 경기의 곡창 평야 지대에는 버려진 옥토가 부지기수”였다고 고발한다. 매천이 말한 버려진 황무지를 일본인들은 힘들이지 않고 차지했는데, 일본의 고리대금업자들은 우리 농민들에게 고리채를 놓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았다. 쌀의 집산지 군산 농민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북간도로 줄을 이어 떠났고, 그때 〈아리랑〉 곡조에 실려 불리던 노래는 이러하였다. 밭 잃고 집 잃은 동무들아 어데로 가야만 좋을까 보냐.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 오소 북간도 벌판이 좋다드냐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그 당시 군산의 상황이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금강포구의 왼쪽을 따라 해변으로 이어지고 있는 군산은 온통 왜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곧게 뻗은 새로 난 길들이며 그 길을 따라 새로 지어진 높고 낮은 집들이 하나같이 일본식이었다. 예로부터 조선 사람들의 초가집은 해변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 개항이 되면서 일본 사람들은 비워둔 해변가를 다 차지했던 것이다. 또한 1930년대에 군산을 찾았던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는 〈사비성을 찾는 길에〉라는 기행문에서 군산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그때 보던 군산은 벌써 꿈과 같아 잘 기억할 수 없으나 지금 보는 군산과는 판연히 다른 줄 안다. 그때는 저렇게 일본식 가옥이나 서양식 건축물이 많지 못하고 저렇게 시가도 번창하고 정리되지 못하고 조선인 부락도 저렇게 되지는 아니하였다. 과연 금석(今昔)의 감이 없지 못하다. 더구나 군산은 조선 미곡의 도회로서 해마다 수백만 석이 모여들었다가 그것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고 조선인들은 집도 없이 한편으로 몰려 움을 묻고 산다는 말을 들음에랴. 이 현상이 군산만이랴. 그 빈민들은 장사도 못하고, 품도 못 팔고, 거지로 아니 나가면 됫박이나 들고 다니며 미곡시장에서 볏섬이나 추스를 적에 몇 알씩 떨어지는 알맹이를 주워다 먹고 연명을 한다.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이번 기행에 참여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