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옛길과 구룡령 옛길을 걷다.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10월 단풍놀이를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한 곳인 오대산 상원사 길과 구룡령 옛길을 걷습니다. 속초에서 동해바다의 푸르름을 만끽하고, 폐사지인 선림원지, 그리고 가을빛과 함께 할 이번 행사에 참여 바랍니다.
“월정사 들머리에서 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전나무 숲길을 걸어간다. 죽죽 뻗은 전나무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고 나무사이로 보이는 붉은 단풍 아직도 월정사 부근은 가을이 많이 남았구나. 생각하며 월정사에 접어든다.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인 월정사의 창건유래가《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 오대산(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히 보았으나 범계梵戒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한 노승이 찾아와 범계를 가르쳐주고, 또 불사리를 주면서, “신라 하서부河西府에 일만 문수文殊가 있으니 그곳에 봉안하라.”하므로 귀국하여 봉안할 곳을 찾는 중에 이곳을 보니, 중국의 오대산과 비슷하므로 오대산이라 이름 짓고 탑을 세우고 가지고 온 불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지(閔漬)가 쓴 《봉안사리 개건사암 제일조사 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에 인용한 《대산본기(臺山本記)》에는 이때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현재의 월정사 터이며, 자장은 훗날 다시 8척(尺)의 방(房)을 짓고 7일 동안 머물렀다고도 전하고 있어 이 절은 643년 자장이 건립했다고 볼 수 있다.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땅으로 신앙되고 있는 이 절은 한국전쟁 당시에 깡그리 불타버리고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별로 없다.
월정사에는 대적광전 앞 중앙에 서있는 팔각구층석탑(국보 제 48호)과 그 탑 앞에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양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석조보살 좌상(보물 제 139호) 뿐이다.
적광전 앞 석탑은 자장율사가 건립 하였다고 전해오지만 고려 양식의 팔각 구층석탑을 방형 중심의 삼층 또는 오층이 대부분이었던 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고 고려 말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자장율사가 월정사를 세웠다는「월정사 중건 사적비」(이휘진 1752년)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고려시대에 와서야 다각다층석탑이 보편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하층 기단에 안상(眼象)과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층기단과 피임돌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만주를 비롯한 북쪽 지방뿐만이 아니라 묘향산 보현사에 팔각 십삼층석탑이 있고 여러 곳에 팔각다형탑이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으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탑을 세웠던 때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10세기 이전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
그 앞에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상원사에 조선 제 7대 임금인 세조에 얽힌 일화가 있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세조가 괴질에 걸린 것은 바로 그 뒤였다.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세조가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물이 맑은 계곡에서 세조는 몸에 난 종기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져서 몸을 씻고 있는데, 동자승 하나가 가까운 숲 속에서 놀고 있었다. 세조는 그 아이를 불러서 등을 밀어달라고 부탁한 뒤에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하자 그 아이 또한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대답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란 세조가 두리번거리며 찾았지만 문수보살의 모습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오랜 동안 괴롭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감격에 겨운 세조는 기억을 더듬어 화공에게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였고 그 그림을 표본으로 나무에 새겨 만들었다는 ‘문수동자 상’을 상원사의 법당인 청량선원에 모셨다. 상원사를 찾은 참배객들은 이 불상(국보 221호)에 정성을 드리고 또 드리는데, 다음해에 상원사를 다시 찾은 세조는 다시 한 번 고양이로 인해 이적을 경험하고 그 인연으로 이 절을 크게 중창했다.
현재의 건물은 1947년에 금강산에 자리 잡고 있는 마하연의 건물을 본 따 지은 것이지만, 이름 높은 범종이나 석등은 그 때에 조성된 것들이다."
응복산 자락의 선림원지,
“응복산(1.360Km)과 만월봉(1.281Km) 아랫자락에 위치한 선림원지로 들어가는 미천골은 고적하기 이를 데 없다. 미천골은 설악산국립공원 남쪽 미천골자연휴양림 안에 있는 계곡으로 사람의 발길이 적어 산천어 등 희귀어가 살고 원시림이 무성하다. 옛날 선림원에 스님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을 때 절에서 밥을 짓기 위해 쌀 씻은 물이 계곡으로 하얗게 흘러내려 미천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비포장 길이었던 길이 포장도로가 되고 길 아래로는 사시사철 맑은 계곡 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56번 국도에서 후천을 건너면서 가을 단풍이 온통 산천을 노랗고 빨갛고 새푸르게 물들이고 미천골 자연휴양림 매표소에 이르러 바라본 앞산에 연푸른 빛의 자작나무 숲이 너무 눈이 부시다. 매표소에서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동무삼아 얼마쯤 걸어가자 산비탈에 축대가 쌓여있고 그 뒤에 사림사沙林寺터라고도 부르는 선림원지禪林院址가 있다.
응복산 아랫자락에 위치한 선림원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804(애장왕5년)년에 순응법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1948년에 이 마을 사람이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큰 종을 발견하였는데, 범종의 높이는 1.3m였고, 둘레는 3.5m였다. 이 범종에 “정원 2년 4월(貞元 二年 四月 造成)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신라 원성왕元聖王 2년인 786년에 순응법사가 만든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범종이었다. 마을에서 종각을 짓고 보관하고 있는데, 문교부에서 억지로 월정사로 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당시 월정사와 함께 불에 타 그 잔해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조성 내력과 연대가 새겨져 있던 선림원지 동종은 오대산 상원사의 동종, 성덕대왕 신종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빼어난 유물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선림원지를 창건한 순응법사는 누구인가. 순응(順應)법사는 어느 때 태어나고 어느 곳에서 입적했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802년 해인사를 창건한 사람이다. 일찍이 출가한 순응법사는 신림(神琳)의 지도를 받다가 766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고승들로부터 불경을 배우고 선을 공부하였다. 그 뒤 보지공의 제자를 만나 <답산기>라는 책을 얻었고 보지공의 묘소에서 7일 동안의 선정에 들어가 법을 구하였다. 그 때 묘문이 열리면서 보지공이 나와 친히 설법하고 의복과 신발을 전해주며 우두산 서쪽 기슭에 대가람 해인사를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귀국한 순응법사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사양문의 인도로 현재 해인사 자리에 초암을 짓고 선정에 들었다. 그 무렵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나서 고생하고 있었지만 어떤 약도 소용이 없었다.“
구룡령가는 길,
현 위치에서 묘반정까지 1.04Km 술 반쟁이까지 0.2Km 술반쟁이에서 횟돌 반쟁이까지 1.10kM. 횟돌반쟁이에서 옛 길 정상까지 0.4Km
맑게 흐르는 시내를 건너자 입구부터 S자 길이 이어지고 산은 온통 단풍 천국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던지 길은 움푹 패여 있다. 길옆에는 조릿대ㅑ라고 부르는 산죽이 드문드문 서 있고, 조금 오르자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가 뿌리가 뿝힌 채 길을 기로질러 누워 있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겸손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부러 누웠는지는 몰라도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지나갈 수가 없다.
밤새 떨어졌는지, 길을 휘덮은 나뭇잎을 미안감도 느끼지 않고 밟고 지나가는 나그네여, 노란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활짝 미소 짓고 들어오는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여,
길은 저마다 자유롭게 그늘 드리운 나무숲 사이로 이어져 있다. <구룡룡 옛길> <옛날 삭도> 푯말이 보이고 천천히 걷는 숲길, 저마다 한적하고 고적하게 이어진 길을 걷는 재미에 빠져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않는다. 나뭇잎이 수북하게 쌓인 길옆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마음까지 내려놓는다.
더러는 낙엽 위에 눕고 더러는 낙엽을 이불삼아 덮고 더러는 앉아서 세상 이야기에 정신을 놓는다.
우리가 오르고 있는 `구룡령 옛길'은 양양과 홍천을 연결하는 옛길로 양양, 고성지방 사람들이 한양을 가기 위해 넘나들던 고갯길이었다. 산세가 험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보다 산세가 평탄하여 이 길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특히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상품 교역로였고, 양양, 고성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가며 명칭에서 유래하듯 용의 영험함을 빗대어 과거 급제를 기원하며 넘나들던 길이라 하며, 구룡령이라는 이름은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는 등 역사와 전설이 살아 전해오는 옛길이다.
그런 연유로 문화재청이 명승 제29호로 지정한, 이 구룡령 옛길은 옛날 사대부들과 혼인한 신랑 신부가 가마타고 가던 고갯길이자 영동과 영서를 잇는 가장 짧은 고개였다.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만큼 산이 높아질수록 나무들은 세상의 짐들을 내려놓은 채 가볍게 서 있는 것을 바라보자 문득 정현종의 시인의 시 한편이 생각난다.
"제 몫으로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생각하라. 얼마나 무거워야 가벼워지는지를. 내가 아직 자유로운 영혼, 들새처럼 영혼의 힘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짐이 아직 충분히 무겁지 못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헐벗은 나무들 사이로 구룡령 옛길 정상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명계리까지는 아직도 멀다.
능선길에 키작은 조릿대가 우리를 환영하듯 서 있고, 길고긴 능선 길을 헤치고 나와ㅓ 계단 길을 내려서자 멀리 보이는 도로 표지판 <여기는 구룡령 정상입니다. 해발 1013미터> 그리고 저 멀리 그리운 버스가 보였다.
“그리움의 뜻을 아는 이라야. 나의 슬픔을 알 수 있어라! ”는 괴테의 말이 문득 떠오르는 그 사이에 버스는 떠났다.“
신정일의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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