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삶.
오랜만에 다시 읽는 루쉰의 소설집,
내 고향과 어린 날과, 어린 시절을 같이했던 한 사람이
떠올라서 이래저래 마음이 뒤숭숭했다.
윤남식이라는 친구, 그의 아버지는 기와를 만들고 굽는 기술자였다.
전남 장흥 회진이라는 먼 곳에서 내 고향 백운에 있던 기와공장
(지금은 백운 중학교가 들어섰다)에 취직하는 바람에
병든 아내, 아들 셋, 딸 하나를 데리고 와서
아내는 저 세상으로 보내고, 한 삼사년 머물다가 가는 동안에
나의 친구가 되었던 아이가 윤남식이었다.
눈빛이 날카롭고 머리는 명석한 그였지만 나도 그도,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결국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함께 가출해서
전남 곡성의 석곡까지 섬진강을 따라 갔다가 되돌아왔었다.
그런 추억을 같이한 그는 아버지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고,
한 참 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난 뒤였다.
그는 그 사이 반농 반 어부로 변모해 있었다.
동생들 뒷바라지로 한 시절을 보내어서 그런지 날카로움도 사라지고,
그냥 말 그대로 촌부가 되어 있었으며
나는 그때에도 작가에 대한 꿈을 놓지 못하고 있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리고 한 참의 세월이 또 흐른 뒤
다시 우리 땅 걷기 회원들과 찾아간 2010년 나는 깨달았다.
꿈을 꾸고 사느냐, 꿈을 잃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은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사람의 정서를 아는 방법 중의 하나가 그가 부르는 노래, 그가 좋아하는 노래다.
그런데, 그가 부르는 그의 노래는 안타깝게도 60년대 후반 가요
(뽕짝. 물론 그런 노래가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에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남도의 바다에서 들려오는 자맥질 소리 같기도 한 그의 노래를 듣는 그 밤
내 마음을 여러 상념들이 휘젓고 지나갔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지나가는데,
그 지나가는 과정 속에 저마다 가는 길이 다르고
그 길을 다른 목표를 정하고, 다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같은 목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리저리 떠돌면서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기막힌 일인지,
오늘 다시 루쉰의 <고향>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다시 그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누운 채 배 밑바닥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란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결국 문투와 이 정도까지 격절되었지만, 우리의 후배들은 아직 한마음이다. 흥얼은 수이성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희망한다. 그들은 더 이상 나처럼, 사람들끼리 격절되지 않기를, .....
그러나 나는 또한, 그들의 한 마음이 되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나처럼 괴롭고 떠도는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고, 그들이 문투처럼 괴롭고 마비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괴롭고 방종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을,
희망을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문투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시도 그것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몰래 그를 비웃었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도 나 자신이 만들어낸 우상이 아닐까? 다만 그의 소망은 아주 가까운 것이고, 나의 소망은 아득히 먼 것이라는 것뿐이다.
몽롱한 가운데, 나의 눈앞에 해변의 초록빛 모래밭이 펼쳐졌다. 그 위의 쪽빛 하늘에는 황금빛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그렇다. 그에게는 그 자신만이 걸어갈 길이 있고, 나에게는
나만이 걸어갈 나의 길이 있다.
그 길을 저마다의 방법으로 살아 온 것이고,
앞으로도 생이 다하는 날까지 걸어갈 것이다.
길이 사라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다가
결국 누구나 가는 길에서 만날지 못 만날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운명,
문득 아련한 슬픔처럼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안개처럼 떠오르는 것은
슬픔인가? 기쁨인가?
병신년 유월 스무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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